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III부 양성애적 인식론 (Bisexual epistemology)
13. Jo Eadie: [양성애의 활성화: 양/성적 정치학을 위해(Activating Bisexuality: Towards a Bi/Sexual Politics)] (1993)
미국, 영국 등지에서 양성애와 양성애자는 레즈비언, 게이 담론과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왔는데 이것은 우연이기보다 좀 더 깊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비롯된 증상이다. 이 증상은 동성애건 이성애건 서로를 서로에게서 분리하는 차이를 양성애가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애디는 이 불안정은 오히려 환영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양성애 혹은 양성애자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성애/동성애 쌍의 붕괴가 궁극적으로는 섹슈얼리티가 영위되고 조직되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양성애는 성적 다양성에 대한 사고에서 ‘혼성(hybrid)'의 위치를 갖는다.
양성애식 소개
성적 대상이 남녀 둘 다인 양성애는 이중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양성애와 게이, 레즈비언과의 강등은 비일관된 규정 때문이다. 성적 정체성의 불안정성은 전장이 되었다.
양성애는 성정치적 현상의 범위 속에서 얘기될 수 있다. 이 범위 안에는 스스로를 양성애자라 규정하는 사람들, 적극적으로 레즈비언, 게이, 일반(straight)이라 규정하는 이들 중 동성, 이성에 대한 욕망과 행위를 하는 이들, 양성애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법을 벗어난 (outlawed) 양성애적 감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 남,여 모두를 욕망하지만 ‘양성애’라는 규념이 문화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위협과 안전에 관한 것이다. 양성애자들이 배제되어온 이유와 (양성애자들로부터)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세 가지 이유에서 제기되어 왔다. 첫째, 권력집단의 탄압적 행위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공간이 필요한데 양성애자들은 ‘이성애적 특권’을 갖고 있고, 이성애적으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둘째, 양성애자들은 다른 경험세계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해당 집단(게이, 레즈비언 집단)이 공통된 경험을 나누거나 그에 기반한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셋째,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서 다시금 억압집단에 속한 성원의 존재로 인해 불편하기 싫기 때문이다.
양성애집단의 작업은 주로 어떤 안정된 경계가 없는 협동체(collectives)를 만드는데 관심을 가져왔다. 양성애 정치학은 이성애/동성애 양자관계에 제3의 규념을 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양자관계를 유지하는 총체적인 장치를 분해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분해는 성적 지향들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의 근거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성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매우 모순적인 것이도록 만드는 지점일 것이다.
(영국의) 노팅햄 양성애 모임에 온 많은 이들은 양성애 정체성이 사전에 완성되어져 있어 그냥 택하기만 하면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에 있는 것이고, 이 논쟁에 참여해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할 가능성을 두고 있다. 이로써 현재 작동하고 있는 정체성 범주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성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전략은 버틀러의 말처럼 통일체(unity)라는 목표나 전제없이 일시적인 통일체가 정체성의 접합과는 다른 목적들을 가진 구체적인 행동들의 맥락 속에서 솟아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동성 간 욕망을 지칭하는 언어와 기회가 증가해 온 정치적 상황에서 양성애의 가시화도 부추겨 졌지만, 양성애에 대한 적대심은 양성애를 몰아세웠다. 욕망의 상품화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증가하면서 섹슈얼리티에 시장논리가 개입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우파들이 ‘가족 가치’를 강화시켰지만 성적 쾌락은 더욱더 구매가능한 것이 되고 있다. 신우파(the New Right)와 에이즈 위기는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가 행동에 나서게끔 했고, 증가하고 있는 동성애 혐오에 맞선 게이프라이드의 강화와 퀴어나라(Queer Nation)의 경계에 대한 강화는 양성애에 대한 낙인을 늘렸고, 따라서 양성애 공간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성적 욕망, 관행, 관계, 정체성이 비규정적임을 밝힘으로써 양성애 집단은 그들이 모이게 된 토대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어떤 양성애자들이 시작한 단체는 양성애가 아니라 좀 더 광범위한 성적 다양성을 중심으로 모이기도 했다. 이러한 접근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그 중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양성애 공동체 전반에 ‘충분히’ 양성애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불안감은 ‘올바른 방식’의 양성애가 될 수 있을 어떤 규범적 정체성이 부재하기 때문에 생성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의 부재, 그 부재함이 평가를 받으면 성적 주체들이 서로서로 짜맞추어지는 공동체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조건에서 정체성의 부재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나, 어떻게 게이, 레즈비언 성적 인식론이 양성애를 배제하고 이성애/동성애 양극 구도를 굳힘으로써 그러한 가치평가를 차단해 왔는가? 그런 것을 구조화하는 데 어떤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지금 현재의 이러한 광범위한 성인식론을 문제삼고 오래된 확신을 버리고 부조리함(비일관됨)의 혜택을 받을 때가 왔다.
양성애적 삶(Bisexual lives)
‘1990년대 게이, 레즈비언 연구의 지침’을 마련했다고 얘기되어져온 Plummer(1992)의 [동성애(homosexuality)]에서 양성애는 게이, 레즈비언의 파편화된 경험으로서만 언급되었고, 색인에도 올려지지 않았다. 이 책의 5가지 문제는 이렇다. 첫째, (이미) 문서화되어있는 변화들을(도) 간과했고, 둘째, 동성애 행동에 관한 언어, 모든 동성애적 행동을 동성애로, 이성애적 행동을 이성애로 간주해 버림으로써 양성애가 존재할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셋째, 구분의 붕괴, 주체들을 전적으로 레즈비언 혹은 게이로 규정함으로써 이렇게 주어진 틀 안에서 결국 양성애가 가시화될 수 없게끔 만들었고, 넷째, 불특정한 불안정성, ‘동성애’, ‘게이’, ‘레즈비언’ 이름붙이기가 어려울 때가 있고 따라서 그 개념을 가지고서는 한계가 많은 때에도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양성애를 하나의 주체로 명명하지는 않았으며, 다섯째, 레즈비언, 게이로 정체화된 이들이 이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근대 섹슈얼리티(Modern Sexuality)]는 양성애를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Elisabeth D. Däumer에게 양성애는 레즈비언, 게이, 일반(straight)의 정체성을 괴롭히고 뒤흔드는 체제붕괴의 가능성 자체이다. ‘만약 실수로 자신이 잡고 있는 손이 남자의 혹은 여자의 것인지를 잊어버린다면?’라고 그녀는 묻는다. 다우머의 바램은 양성애가 레즈비언, 게이, 일반 사이의 분리를 무너뜨려 이들 사이의 연결점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양성애는 레즈비어니즘 혹은 게이니즘과 완전히 달라서 어떠한 연관성도 동맹성도 가능하지 않아 보이거나 아니면 너무 비슷해서 기존의 사고에 전혀 문제의식을 던져주지 않는 것 사이에 빠져 있어 보인다.
레즈비언, 게이 공동체 안에서 일반(straight)을 보는 시각-이성애적 특권, 다름의 에로틱화, 나이듦, 고지식하고 촌스런 옷차림, 성별 역할 순응, 춤 못춤, 성별바꾸기(cross-gender)욕망, 못생김, 번식 등 애가 있고, SM을 하고, 성별 역할을 즐기고, 이성과 관계하는 ‘일반’ 레즈비언과 ‘일반’ 게이는 숙청당하고-은 이 모든 것들이 퀴어 세상 안에 들어와 있는 일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쉽게 하기 위해서 몸의 정치학은 그것을 쉽지 않게 하는 주체들, 관행, 쾌락, 태도들을 제거한다. 규범화의 담론은 손상된 정체성(spoiled identities)을 생산한다. 억압에 반대하는 실천에서 ‘쉬운 정치학(politics of ease)’은 권력과 편견이 추방당한 ‘안전한 공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종종 전제된 규념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이 추방된 공간이다.
영국 맨체스터의 한 나이트클럽 ‘Flesh'에서는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입구에서 레즈비언인지 게이인지 질문을 했고, 양성애자들, 당시 동성과의 관계에 있던 양성애자들도 입장을 거부당했다.
위험한 정치학
만약 양성애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장애가 이성애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레즈비언과 게이’의 구성이라면 양성애 정치학의 이론화를 위한 핵심사안은 그 경계들을 해소하는 것이다. Mary Douglas(1966, Purity and Danger)는 순수(purity)를 위협하는 더러움(dirt)을 ‘밖으로 나와 있는 물질’로 규정하면서 ‘더러움은 체계적인 서열화와 분류화의 부가물이다’라고 보았다(p.35). 오염(pollution)이라는 것은 엄격한 분류화가 있는 곳에서만 환경을 체계화하려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존재한다 (:2). 더글라스는 오염을 사회변화의 과정으로서 옹호하면서 순수는 변화의 적이고 모호함과 타협의 적이라고 보았다 (:162). 그녀는 순수와 낙인찍힌 더러움의 기능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고, 분리(separation)와 경계설정(demarcation)이 특정 사회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을 분석해 냈다.
양성애에 관한 불안감도 상징체계, 즉 이성애/동성애 이자관계의 붕괴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의 표현으로서 읽혀질 수 있다. 더글라스는 권력구조의 틈새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나은 지위를 가진 이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지는 편집증적 사회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위험하고 통제불능의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고, 이로써 이들을 억압해도 된다는 구실이 주어진다(더글라스 1966:104). 양성애도 이런 식이다. 이들과 만나면 양성애자로 변할 것이라거나 이들은 항상 너와 다른 성의 파트너를 찾아 떠날 것이라거나 게이 정치학의 원동력을 갉아먹는다거나 에이즈 위험군이라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영화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에서 보여준 양성애 여성 살인마, 영화 Crush, 1983년 미국 게이만화에 등장한 ‘양성애 보험’등에서 볼 수 있다.
다음은 영역과 위험에 관한 것이다. 이성애주의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유지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이성애와 이성애주의를 등치시키는 것은 정치적 동맹을 훼방놓은 게토식 사고방식을 부추길 뿐이고 그것은 섹슈얼리티 외에는 별달리 억압받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동맹같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이들의 사치이다.
이성애주의적 폭력이 우리 모두에게 현실적인 위험이기는 하지만 터무니없이 많은 에너지가 ‘내부의 적’에게 쏟아지고 있다.
더글라스는 구분을 위반하는 존재에 대해 이뤄져 온 세 가지 접근방법을 보여주는데 첫째, 또 다른 구분을 할당한다. 이것은 양성애는 진정한 게이다 혹은 일반이다는 식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그들은 위험하고 따라서 피하거나 통제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상담전화에서 전화응답을 회피하거나 클럽입장을 거부하거나 관계맺기를 거부하거나 하는 등이 그 예이다. 셋째,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기존의 한정된 틀을 깨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선택사항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차이를 삼켜버리지 않는 관계형성이 필요하다. Donna Haraway의 글에서 이종족간 결혼(백인-흑인 결혼 등)이 검토되었다. 고정된 이항법을 돌려놓고, 급진적인 차이(radical difference)를 보존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한 은유로서 헤러웨이는 이종족간 결혼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면서 그것에 부여된 공포의 억압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양성애는 이종결혼의 위치에 있다. 한편에서는 이성에 대한 성적 욕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퀴어성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양성애 자체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성적 지향들의 어려운 섞임의 장소인 것이다.
Homi K. Bhabha는 ‘혼종성’을 어떤 문화적 역사의 특정한 물질적, 상징적, 정신적 겹쳐짐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했다. 바바는 문화적 차이가 적극적인 문화적 차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1985:99). 메리 더글라스가 밑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듯 분리화와 조직화라는 체계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정말이지 우리 같지 않다’는 식이다. 바바에 따르면 ‘혼종성’은 어떤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 고유의 권리와 특권을 가진 권력기능으로서 작동하는 기존의 문화적 자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기존의 담론의 다른 의미들을 모아낸다. 그것은 지배적인 규념(terms)을 보충하고,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함으로써 기존의 것이 가진 한계를 알려준다. 그 보충물이 지배적 의미 속으로 넌지시 섞여드는 것(insinuation)은 차별화 과정이 멈짓 서면서 이전과 같은 것을 더 이상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혼종은 ‘권위의 존재와 그것의 형상을 교란시키는 질문들’과 같은 효과를 낳는 것이다.
혼종은 첫째, 과거의 현존을 과거와 완전히 똑같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과거의 권위가 그대로 영원히 지속될 수 없게 한다.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자긍의 날’이라는 제목이 그 한 예이다.
혼종성은 과거와 급진적으로 단절하지는 않는다. 혼종성은 과거가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을 성립하는 데 한 역할을 인정하고 지배문화가 자기재생산을 통해 만들어내는 영속성 안에서 스스로를 안치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지배문화를 보충하고 그로써 미래를 다시 씀으로써 막아낸다.
또 하나는 공식적인 역사와 현재 문화의 형식을 다시 쓰는 것이다. 어떤 규범적 문화든 엄청나게 복수적인(plural) 근대적 공간을 지속적으로 추방하는 것을 법제화한다. 게이문화에서 사용되는 ‘분홍삼각형’등도 그 예이다. 그 같은 역사의 변화에 이해관계는 엄청 강하다.
바바는 분열적인 잠재력을 부정하지 않는 다름(otherness)을 통합시키는 모델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언설(narrative), 정체성, 공간은 다른 역사, 자아, 공간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은 우리를 매우 다른 사람들로 만든다. 성정치도 그런 것으로 만들어 가야한다.
14. Marjorie Garber: [역으로도 마찬가지로: 양성애와 일상의 에로티시즘(성애)(Vice Versa: Bisexuality and the Eroticism of Everyday Life)](1995)
가버는 ‘양성애’ 개념을 고찰하며 그것이 남/여, 남성성/여성성, 이성애/동성애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답하고자 하는 것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양성애’의 다중적이고 이동하는 의미 자체가 핵심이라고 본다. 양성애는 파악할 수 없음(elusiveness)와 유동성(flux)을 의미하고, 그로써 성애(eroticism)의 본질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양성애는 이성애/동성애, 남성성/여성성 사이의 구분을 문제삼거나 해체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분자체가 결국 불가피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양성애는 진정 보다 광범위한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 올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양성애는 확실성을 다시 흐트려 놓는다. 그것은 정체성이지만 정체성이 아니고 모호함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기호이고, 구분을 문제삼고 무화시키는 구분이다.
어떻게 2등급 시민이라는 생각을 심어놓지 않고서 차이들을 추구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무차별적 ‘인본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첫째, 양성애 혐오는 동성애 혐오에 기반해 있다. 동성애 혐오가 끝장나면 양성애 혐오도 쉽게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저 ‘자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분리와 배제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레즈비언들에게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분리를 통해서 얻어질 필요는 없다. 셋째, 양성애정치학은 어떤 면에서는 ‘성적’ 인 것도 정치학인 것도 아닌 성애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성애는 불평등, 권력, 부정, 요구, 욕망 등이 어떻게 이야기되어지냐에 따라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uncorrect) 것이었다. 사랑도 성욕도 인간의 선택을 규제하는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인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면 예측되지도 통제될 수도 없다. 양성애를 긍정한다는 것의 긍정적이고 정치화된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June Jordan).
양성애 정치학은 정치적 행위와 성적 욕망 사이의 겹침을 이해할 수 있는 모델이다. 양성애는 그 존재함 자체로서 우선함(priority), 단일성(singularity), 진실함(truthfulnss), 정체성 등에 대한 생각들을 흐트려 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성별과 섹슈얼리티에 빠져있을(preoccupied) 때 인간의 자유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하는 중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바꾸기(Shifting)는 양성애에서 핵심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인간 욕망의 특질 중 핵심이기 때문이다. 성애는 구분(분류)을 부숴 뜨리고, 규칙을 가로지르며 탈주하고, 경계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명서나 기록물, 실험실 실험 혹은 선언 등으로 그 의미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양성애는 정확히 저항 그 자체이다. ‘하나로 한정되는 것에 대한 거부’이다. 그 ‘하나’가 ‘양(bi)'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해도 말이다. 양성애는 그것의 특징으로 인해 다중적 욕망과 그것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함의한다.
양성애의 참조대상은 자기 자신인 주체인가 아니면 상대방인 대상인가? 아마 이 질문은 섹슈얼리티 자체가 주체와 대상 어느 쪽을 참조준거로 잡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자신의 구성된 성적 정체성을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의 쾌락에 대해 알고 받아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결국은 이성애적 관계를 목적으로 두는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기질의 측면에서 양성애를 개념화하는 것은 프로이드에게 양성애는 하나의 정신 내부에 두 가지 이성애적 욕망이 우발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버틀러 1990:60-61). 이렇게 ‘기질’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국 여성성과 남성성, '이성애적 욕망의 태(matrix)'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일 러빈이 지적했듯이 규범적 이성애의 관념은 성과 성별의 사회적 조직의 일부이다. 퀴어 욕망의 존재에 대한 진실을 환영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동성애 혐오증처럼 양성애를 이성애적으로 형상화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성애적 욕망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15. Maria Pramaggiore: [담장의 인식론 (Epistemologies of the Fence)] (1996)
프라마기오레는 이 글에서 1990년대 양성애 연구 영역이 어떻게 발달했는지를 ‘담장의 인식론’으로 형상화하면서 조망해주고 있다. ‘담의 인식론’은 ‘벽장’이 동성애자들과 동성애적 욕망을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비가시화했다고 보고 이에 대해 조사했던 Eve Kosofsky Sedgwick(1990)의 ‘벽장의 인식론(Epistemology of the Closet)'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시작했다. 프라마기오레는 담의 형상이 양성애의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는 잠재적인 은유라고 본다.
1995년 7월 17일 뉴스위크지에는 ‘양성애: 게이도 아니고 일반도 아닌. 새로운 성정체성의 등장’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유명한 옛날 양성애자들 게리 그랜트, 빌리 홀러데이, 제임스 딘같은 사람들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양성애에 대한 ‘새로운’ 것이라는 말인가? 뉴스위크같은 잡지에 의한 공식적인 인정 외에 말이다. 어떤 위치에서 이 ‘새로운’ 성적 정체성이 ‘떠올랐다’는 말인가?
어떤 섹슈얼리티가 혹은 어떤 문화적 현상이 새롭다는 수식을 하는 것은 미국 소비문화의 수사법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대개 성적 정체성이라고 불리기 뭣한 경우가 많다. 그것이 양성애의 역설이듯이 말이다.
‘결국 그것은 불을 끈 후 단순히 따스한 인간의 몸 사이의 신비스러운 당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저자는 글을 맺는다. 그러나 저자는 왜 지금 그 시기에 양성애가 ‘새로운’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검토하는 것을 간과했다. 양성애적 인식론은 서구 사회의 섹슈얼리티 정치학을 모양지으면서 유행보다 빨리 진행되는가?
여기에서의 관심은 담장, 양성애를 수식하는 위치는 단순히 최근의 성적 위치들 그 이상의 것이다. 담장 위는 전혀 새로운 위치가 아니다.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담장은 문화적 지형에 점을 찍는다.
[벽장의 인식론]에서 세즈윜은 벽장의 관계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구분,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에 달려 있고, 발화행위의 권력으로 점철된 성질과 발화행위로서 고려되는 것들 사이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이가로 보았다 (Sedgwick 1990:3). 그녀는 21세기의 동성애 억압의 특정한 핵심은 지식에 관한 질문과 근대 서구문화에서 알아가는 과정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그것이 벽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간격은 벽을 담장으로 다시 쓴다. 세즈윜의 벽장은 규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해소하고 또 재생산한다.
담장은 사이 안에 있는 장소이고 그리고 비결정의 장소이다. 담장 위에 앉는다는 것은 한시적으로 기반한 하나의 성적 파트너쉽의 우위를 가정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별칭으로서 이것은 성별을 이항분류에 따라 규정하는 제한적 도식을 거부하고, 하나의 성별 혹은 단일 성별화된 대상을 선택하는 하나의 섹슈얼리티와 연결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성적 행동을 성적 정체성과 등치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양성애적 인식론은 성행위와 정체성 간의 일대일 대응, 성감적 대상과 섹슈얼리티와의 일대일 대응, 정체성과 욕망의 일대일 대응을 거부하고 유동적 욕망과 욕망 주체의 욕망이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버는 ‘성애와 욕망이 항상 어느 정도는 위반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나 성애와 욕망은 개인적 수준에서 그리고 문화적 수준에서 구조화되고 경찰된다’고 본다. 문화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속박하고 경계짓는다. 그 욕망을 작동시키는 것이 제도적이고 심리적인 구조를 생산하고 이 구조는 ‘다른’ 양식의 섹슈얼리티가 감지되고 수행될 수 있는 골에 의해 구멍이 생기게 된다. 침투해 퍼지는 구조로서의 담장은 배제적인 ‘아니면/혹은’ 보다는 상호포괄적인 ‘양쪽 모두/그리고’에 가장 가깝다.
세즈윜이 지적하듯이, ‘성별개념이 없다면 간단히 말해 동성애 혹은 이성애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여러 성적 선택의 측면들은 이같이 성별과 결정적인 관련성을 갖지 않고 인종 혹은 계급의 유사성이나 차이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세즈윜 1990:31).
양성애에 대한 작업에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양성애를 위한 공간을 위해 담장을 치다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 공간은 퀴어이론과 여성주의 이론과 겹치고 근접해 있고, 인종이론과 계급이론을 흡수하고 그것을 고취시킨다.
담장은 그것을 동사형태로 볼 때 따로 떼어놓기, 발뺌하기, 단수의 반대자 받아넘기기 등을 함의한다. 그러나 담장치기는 무술처럼 혹은 춤처럼 상대방이 곧 파트너이다. 양성애의 이론적 지점에서 접촉과 갈등은 상호성을 위한 지점으로 변한다. 좋은 담장은 좋은 친구를 만든다. 우리는 양성애의 이론화과 운동이 이미 담장치기 경쟁에 돌입했다고 본다. 양성애 이론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새로운 퀴어운동의 환경에서 성숙기를 맞고 있으며 그 맥락 바깥에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성애 이론이 생산적이고 때로 고통스러운 소통을 통해서 발전시켜온 영역 중 하나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담론 정치학 안에 있고 이것은 특히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이 양성애적 욕망과 가지는 관계라는 문제, 섹슈얼리티의 쾌락과 위험에 주목하는 레즈비언과 여성주의 정치학의 이론 때문에 생긴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94년 11월 ‘퀴어의/이론/행위 안에서(In Queery/Theory/Deed)'라는 제목의 학회에서 발표된 여러 발표문들은 양성애로 스스로를 드러낸 레즈비언들의 경험, 양성애 정체성의 구성과 레즈비언 정체성의 구성 사이의 차이, 그리고 양성애 여성들과 레즈비언들의 다분히 정치적인 동맹에 초점을 맞추었다.
1990년대에 출간된 양성애로 커밍아웃한 이들의 이야기들은 스스로의 성별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이성애적 차이에 기반해 규정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해 양성애를 이론화하고 활성화하는 데에 성별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게 한다. 이 출간물들은 어떻게 성별의 차이가 양성애 이론과 행위에 중요하거나 중요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양성애 정체성 위치짓기’에서 클레어 헤밍스는 1970년대 이래로 여성주의 안에서의 여성주의 이론과 양성애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양성애의 이론화가 ‘정체성의 이론들과 차이(들) 사이에 일어난 난국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양성애에 관한 남성들의 작업은 주로 성(별)전환, 자웅동체, 다항적 도착에 관심을 두고 여성들과 여성주의자들의 작업은 양성애가 그것이 가진 이항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성별화된 권력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유용한 규념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새로운 섹슈얼리티 정치학’에서 시인이자 수필가이자 활동가인 June Jordan(1990)은 양성애정치학을 ‘중간지대(middle ground)'로 보면서 이것이 예상가능하지도 않고 통제가능하지도 않고 정체성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도 않는 자유로운 개인의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고 본다.
우리는 유동성과 상호 포함성을 강조하는데 양성애 인식론은 특별한 관점이나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인 사안은 아래의 것을 포함하되 이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즉, 첫째, 양성애가 프로이드의 모델에서 볼 수 있는 정체성의 단성적 모델을 분열시키고 치환하는 방법; 둘째, 일시성(temporality)과 섹슈얼리티의 관계; 셋째, 성별 내부와 성별을 교차하는 욕망의 삼각 구조; 넷째, 비가시성의 관념과 게이와 레즈비언의 벽장과 본질화된 인종적 차이에 의해 놓여진 것들과는 다른 식의 통과되기(passing)의 관념; 다섯째, 동일시와 욕망 사이(between/among)를 구분하는 것의 어려움; 여섯째, 성적인, 성별적인, 인종적인 모호함의 관념들 사이의 동조; 일곱째, 엄격하게 섹슈얼리티를 성별의 관점에서 체계화하지 않는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 찾기; 여덟째, 게이정치학과 연구, 레즈비언, 퀴어, 성전환인, 성별전환인, 양성애 연구와 정치학 사이의 긴장과 갈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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