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연 2007 여름강좌
- 섹슈얼리티 I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강좌 자료>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Feminism and Sexuality) / 스테비 젝슨(Stevi Jackson), 수 스캇(Sue Scott), 1996
성적인 논쟁지점과 여성주의 내의 분파들: 여성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25년간의 논쟁
- 이성애와 레즈비어니즘, 그리고 양성애
번역: 여이연 섹슈얼리티 세미나팀
최초의 이성애에 대한 비판은 초기 여성해방운동에 개입했던 여성주의자들 사이의 논의에서 잘 드러나 있는데, 이는 레즈비어니즘이 가부장적 지배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이자 실현가능한 한 가지 대안으로서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레즈비어니즘과 이성애에 대한 논쟁은 여성해방운동진영 내부에 긴장을 불러왔다. 이 긴장은 여성운동 내부에 균열을 초래했다는 측면에서 파괴적이기도 했으나 이성애를 보다 적합한 이론으로 만들도록 강제했다는 측면에서 생산적이기도 하였다.
제2세대 여성주의 초기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이성애에 관한 논의와 동의어였고, 남성과의 관계에서 만족감을 높이려는 여성들의 싸움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이성애는 삽입 성행위를 ‘진정한 것’으로 강조하면서 남성의 쾌락을 우선시해왔고, 질오르가즘 신화를 지속시켜왔다. 안느 코에디뜨Anne Koedt의 글은 발표될 당시 최소한의 성기접촉을 하면서 최대한의 쾌락을 느끼는 것이라고 속아 지내왔던 여성들의 성행위 방식을 바꾸는 데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글이다. 여성의 성적 절정이 질보다는 음핵에 집중해 있다는 논쟁의 근거는 주류 성과학 연구물로부터 여성주의자들이 목적에 맞도록 차용해 사용한 것이다. 코에디뜨와 몇몇 다른 이들은 이 ‘발견’이 성적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했고, 삽입성행위를 부차적인 성행위로 간주하게 하였으며, 여성의 성적 만족에 남성의 성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게끔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코에디뜨의 비판은 잘 겨냥된 것이었다. 남성의 성적 욕구와 여성의 성적 의무라는 신화에 빠져 있었던 많은 여성들에게 여성이 성적 쾌락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비교적 새로운 주장이었다. 1970년대가 되면서 성이 여성에게도 즐거울 수 있고, 즐거워야 한다는 인식은 주류 문화 속으로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여성주의를 접하지 않은 많은 젊은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성적 기관들과 성적 쾌락의 가능성에 무지했다. 심지어 지금도 이와 같은 정보들이 [코스모폴리탄]같은 잡지를 통해서 유통이 됨에도, 젊은 이성애자 여성들은 자신이 어떻게 쾌락을 느끼는지에 대해 말하고 이것에 대해 요구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코에디뜨는 여성의 성적 쾌락을 위해 남자들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고 제안했는데, 이것을 레즈비어니즘까지 밀고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여성주의자들의 논쟁은 레즈비어니즘과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레즈비언들은 여성해방운동 초기부터 가시적인 존재들이었으나 그들의 역할은 그들 각자의 정치적 개입 여부와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이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의 정확한 관계는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게이운동과 여성운동이 1960년대에 거의 동시에 일어났고, 양 진영 모두에서 보다 급진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은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을 직면했다. 두 나라 모두에서 게이해방운동(GLF)은 다른 피탄압집단과 동맹관계를 맺고자 노력해왔고, ‘여성탄압의 근원이 자신들에 대한 탄압의 근원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봤다. 많은 레즈비언들이 게이해방운동을 통해 성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거나 게이정치와 여성주의정치 모두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게이정치에서 남성 중심적인 의제들이 환멸을 불러왔다. 레즈비언들이 전세계적으로 여성운동 내부에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여성주의운동이 전국여성조직(NOW)에 의해 대표되듯이 개량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즈비언들도 결합하기는 했지만, ‘존경받을만한’ 얼굴들로 대표되고 싶었던 이 조직에서 환영받지는 못했다. NOW의 영향력있는 회원이었던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1970년 제2회 NOW 총회에서 레즈비언들을 ‘보라색 골칫거리’라고 불러서, 이들의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NOW의 회칙을 바꾸고 여성들이 스스로의 성적 권리를 스스로 규정할 권리를 재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경향 아래에서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문제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미국과 여러 다른 곳에서 레즈비어니즘을 핵심사안으로 만들어 낸 이들은 바로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었다. 뉴욕에서 레즈비언들의 주변화에 대해 저항했던 그들이 1970년 [급진적 레즈비언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여성관계적 여성(women-identified women)”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레즈비어니즘을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위치시킨 최초의 선언 중 하나였다. ‘한 명의 레즈비언은 일촉즉발에 있는 모든 여성들의 분노다’ 라고 적혀 있는 이 글은 여성들이 개별 남성들과의 관계를 위해 애쓰는 동안은 스스로의 해방과 더불어 모든 여성들의 해방은 늦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레즈비언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힘을 탄압자인 남성들이 아니라 바로 자매들인 여성들에게 쏟는다. 이 후 몇 년 동안, 많은 북미, 유럽과 호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이 같은 관점을 발전시켰고, 이것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의 한 가지인 개량주의자들은 미국 밖에서 별로 진전을 거두지 못했고, 여성운동 내부에서의 레즈비언들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도 미국 밖에서는 덜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여성해방운동의 주류는 급진주의적 여성주의와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였고, 레즈비언들은 이 양 집단 모두에서 주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불편함이 존재했고,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은 ‘남성혐오 뚝방(dyke)들의 집단’이라 부르며 여성주의자들을 폄하하는 태도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는 ‘규범적’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영국 여성해방운동 초기의 주요사안은 특별히 레즈비언관련 사안을 배제했고, 197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요구사항에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스스로 규정할 권리와 레즈비언들에 대한 차별종식을 첨가했다. 이때가 돼서야 레즈비언 여성주의는 영국여성운동진영에서 주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성애자들로 지내왔던 많은 여성들이 이 시기에 레즈비언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냈고, 선천적인 기질로서보다는 정치적 입장이나 삶의 한 양식의 개념으로써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레즈비어니즘은 어떤 이들에게는 ‘어떤 여성이건 할 수 있는’ 이라는 표어에서 보여지듯이 어떤 여성이건 선택하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렇지만, 이 여성들을 여전히 이성애자로 남게 하는 많은 제약들이 있다는 인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성애에 대한 비판은 남성적 성적 부조리에 대한 불만족에 대한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이성애는 남성이 여성의 몸과 여성의 노동을 전유하는 제도로 간주되었다. 남성에 대한 낭만적 애착은 결국 착취로 귀결되었다. 또 하나의 유명한 표어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당신이 그의 두 팔 안에 안기는 것에서 시작해 당신의 두 팔을 그의 씽크대에 담그는 것으로 끝난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따라서 가부장적 지배로부터의 탈출이자 그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런 면에서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가부장제를 남성지배체제로서 보는 급진적 여성주의적 관점을 이미 견지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주로 나타났다. 이들 중 몇몇은 ‘분리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고, 남성들과의 어떤 개인적, 정치적 동맹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생긴 급진적 레즈비언들과 다른 여성주의들 사이의 긴장이 1970년대 말기에 와서는 여성해방운동에 특히 저해가 되었다. 다른 경계지점들을 따라 생겨난 불화들과 함께 이 불화는 하나의 통일된 여성운동이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레즈비언들과 이성애 여성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 많은 레즈비언 여성주의자들이 분리주의를 정치적 해결책으로 추구하는 것에 반대했고, 특히 분리주의 노선이 이성애자로 머무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는 것에 반대했다. 여성해방운동이 일기 이전에 이미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던 소위 ‘진짜 레즈비언들’은 이 시기 성정체성 전환에 대한 열의에 대해 반신반의했고, 이렇게 전환한 이들의 (성적) 욕망의 진정성에 대해 우려했다. 섹슈얼리티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안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레즈비언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논쟁에서 대체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었다. 레즈비언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이 양진영 모두에 포진해 있어서 급진적 여성주의 내부에서 격렬하고 고통스런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이 논쟁이 불러온 긍정적인 측면은 이성애에 대해 비판적인 진영과 레즈비언 정치학 진영 모두에서 풍성한 이론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지표적 출판물이 에드리엔 뤼취Adrienne Rich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의 현존’이다. 뤼취는 이성애의 제도화에 초점을 두고,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간주되는 이성애가 사실은 여성에게 강제되는 것이었음을 주장했다. 그녀는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기 보다는 모든 여성들이 위치될 수 있는 레즈비언 연속성(a lesbian continuum)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다른 레즈비언들은 뤼취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의 특정성과 이들이 레즈비언으로서 겪는 억압을 부정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편, 스스로를 급진적 레즈비언이라고 규정하는 이들은 뤼취가 제도 자체의 억압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성애에 대한 강제성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애에 대한 뤼취의 비판은 이성애 여성주의자들 개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사실 이 점이 급진적 레즈비언들이 그녀의 견해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쉴라 제프리Sheila Jeffrey는 뤼취가 ‘이성애 여성들이 레즈비언 연속성에 공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정당하다고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남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당시 나왔던 다른 분석은 이성애 여성주의자들과 이들과 분리되기를 바라지 않는 레즈비언들에게 훨씬 더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은 여성해방운동의 배신자라는 생각은 1970년대 초기부터 있어왔던 것이었지만, 70년대 말이 가까워오면서 유럽에서는 큰 목소리를 얻기 시작했다. 1978년 영국에서 열린 마지막 여성해방운동 총회에는 이 사안을 중심으로 혼란스러운 적대 전선이 형성되며 분열되었다. 이듬해 리즈 혁명적 여성주의자Leeds Revolutionary Feminists라고 알려진 단체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반이성애의 예’라는 제목을 글을 배포했는데, 이것은 이성애와 여성주의가 상호 배타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글이었다. 이것은 더욱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급진적 여성주의와 혁명적 여성주의자들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긋는 결과를 낳았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레즈비언이건 이성애자이건 간에 여성해방운동이 모든 여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모든 여성들이 공통적인 억압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똑같이 신랄한 논쟁이 프랑스에서도 있었는데, 모니끄 위티그Monique Wittig의 ‘일반의 사고방식The straight mind’이라는 제목의 글이 1980년 초반 여성주의자들의 질문Questions Féministes에 실리면서 급진적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공적 논쟁이 촉발되었고, 이 논쟁은 ‘누구도 여성으로서 태어나지 않는다(One is not born a woman)’라는 제목으로 다음 호에 실린 글에 의해 더욱 가열되었다. 위티그는 레즈비언은 가부장적 계급 체제로부터 이탈한 탈주자이고, 여성은 남성에 대한 스스로의 종속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므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결론짓는다. 그 해 파리 여성주의 집단들에서는 이성애 여성들은 자신들을 옹호해주었던 레즈비언들이 ‘kapos’라고 매도되고, ‘동성애 여성들’이라고 불림으로써 레즈비언이 될 자격이 부정되는 동안 조력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이성애자건 레즈비언이건 마리에-조 다버나스Marie-Jo Dhavernasr를 포함한 많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이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영국에서의 자매들처럼, 이들은 급진적 레즈비언들의 이러한 전위적 입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이들이 남성이나 가부장제가 아니라 이성애 여성을 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여성운동을 반여성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논쟁은 거의 여성들 사이의 다른 차이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이 이루어졌다. 남성을 계급의 적으로 위치시키면서 좀 더 넓은 사회적 의미에서의 계급개념은 무시되었고, 인종의 차이도 마찬가지로 간과되었다. 여성이 다양한 형태의 교차적 억압의 위치에 놓여있는 방식은 레즈비어니즘과 이성애 양쪽 모두의 경험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준다. 흑인 레즈비언으로서 셔릴 클락Cheryl Clarke은 동성애혐오증과 인종주의에 저항해 흑인공동체와 백인공동체 양측에 대항해 싸우는 등 다양한 전방에서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안은 여성주의 내부에서의 차이들에 대한 질문을 더욱 광범위하게 불러왔고, 이로 인해 여성의 삶에서의 본래적인 모순과 복잡성을 다양하게 고려하면서 기존의 남성지배에 대한 이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빚어진 결과 중 하나가 여성주의 이론을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지고 이론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었다.
특히 좌파 학자들 중에서 전통 맑스주의에 대해 실망하고 있던 이들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 매력을 느꼈다. 여성주의자들과 게이이론가들 사이에서 전유되고, 섹슈얼리티에 적용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결과적으로 퀴어이론의 발전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레즈비언’ 등과 같은 범주를 만들어 이것을 정치적 정체성의 바탕으로 삼기보다는, 퀴어이론은 남성과 여성, 일반(straight)과 이반(gay) 등을 양분화하는 기제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와 같이 정체성이란 각 개인 주체가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이동적이어서 채택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하며, 유희적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전복되기도 하고, 각각 다른 맥락 속에서 전개되기도 한다. 급진적 레즈비언 관점은 레즈비어니즘을 가부장제도의 반대적 위치에서 가부장적 관계 외부에 있는 어떤 고정된 저점으로 둠으로써 본질주의로 보여졌다. 정치적으로 퀴어이론의 목적은 성별(gender)과 성적 범주가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담론의 결과물인 ‘조절(규제)되어지는 허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퀴이이론은 공공 ‘키스소(kiss-ins)’, 조롱 결혼식(mock weddings), '성별과 씹하기(gender fuck)'의 개념 등 길거리에서 모방적인 수행을 연행함으로써 옷입기와 관습에 위배되는 성적 수행을 해 성별 범주에 도전하고 이로써 퀴어정치학과 만난다.
퀴어는 성별과 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퀴어도 있고, 양성애 퀴어도 있으며, 트 래니(tranny) 퀴어, 레즈(lez) 퀴어, 꽃미남 퀴어도 있고, 에스엠(SM)퀴어, 손가락 (fisting) 퀴어도 있고, 이 냉담한 우리 나라 거리 곳곳에 퀴어들이 있다.
이 인용글은 퀴어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꼬리표달기가 오직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레즈비언 여성주의와 게이 운동에서 제외되어왔던 양성애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 사이의 이성애적 성적 행위와 심지어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성애적 성적 행위를 충분히 위반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성적 실천까지 포함할 수 있다.
이성애적 행위가 항상 ‘일반적(straight)’인 것은 아니다. 내가 딜도를 둘러입고, 내 파트너와 성행위를 가질 때, 우리는 ‘이성애적’ 행위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퀴어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우리 할머니와 제씨 헴 (Jessie Helm)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메리 와이트하우스(Marry Whitehouse)도 똑같이 말 할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주요한 퀴어적 특성, 즉, 위의 두 인용글이 암시하고 있듯이 윤리와 성별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전복적이라는 것을 더욱 잘 말해주고 있다. 클레서 헤밍(Claire Hemmings)은 양성애적 맥락에서 수행성이란 것이 위계적인 이성애적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엘리자벳 윌슨(Elizabeth Wilson)은 그 같은 행위는 쉽사리 인습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변태적(kinky)’인 이성애 한 쌍의 행위가 이런 불안정화라는 결과를 하나도 가지지 않으면서 지속될 수도 있다고 헤밍의 해석을 반박한다.
퀴어 정치학은 또한 레즈비언을 여성주의자들보다는 게이남성들과 한묶음으로 재편성해 놓는다. 에이즈 사안에 있어서나 게이남성들과 레즈비언들에 대한 도덕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면서 많은 레즈비언여성주의자들은 오래전의 게이남성들과의 동맹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여성들 모두가 스스로를 퀴어라고 정체화한 것은 아니지만, 급진적 레즈비어니즘의 지시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되살아난 이 동맹은 많은 레즈비언들이 이런 새로운 정치활동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다른 이들은 좀은 회의적인 체로 남았다. 처음 의도했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퀴어는 또 하나의 정체성 정치의 일환으로 보여질 수 있다. 더욱이, 퀴어가 차이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를 흐리는 방법이라고 주장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백인 게이 남성들이 성정치에서의 그들의 의제를 강제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제도화된 인종적, 성적 탄압에 의한 제약을 간과하게 만드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저명한 흑인 레즈비언 활동가들이 지적해 왔다.
퀴어이론과 퀴어정치는 완전히 동일어가 아니다. 퀴어운동은 지금까지와는 반대의 새로운 정체성을 긍정하는 이상 퀴어이론이 그같은 정체성의 경계를 해체한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학계의 이론가들이 ‘성/성별/욕망의 강제적 질서’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한편, 게이 문화에서 성별 범주를 흐리는 것은 정치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스타일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닥 마틴(Doc Martins)에 발레용 치마를 입는 것으로 가부장제를 꺾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또한, 퀴어이론의 강점은 민중의 투쟁에 힘이 되기보다는 학계에서의 명성에 힘이 되는 것인 것 같고, 길거리 정치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기 보다는 학계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인 것 같다. 이 이론의 많은 부분은 이론이 생산되는 학문 영역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말들로 되어있다.
한 펨(여성적?) 레즈비언이 설명하기를, 자기는 자신의 남자친구들이 여자이기를 좋아하는데, ‘여자이다’는 것은 부치(남성적? 레즈비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남성성’을 설명해주고, 재표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남성성은-이렇게 불려도 된다면- 항상 문화적으로 인식가능한 ‘여성의 몸’에 상대적인 것으로 구제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조화적으로 나란히 놓인 배치와 그것을 위반함으로써 생기는 성적 긴장이 욕망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나와 있는 이들이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래된 논쟁들이 사그라들지 않은 한편, 최근 이성애에 관해 쓰여진 엉첨난 물량의 글들은 퀴어이론과 퀴어정치와 맥을 공유하고 있다. 이성애적 성행위가 여성에게 반드시 탄압적인지, 이성애가 여성주의자들이 권장받을 만한 행위인지는 여전히 토론해봐야 할 사안이다. 모든 여성에게 이성애가 똑같은 의미일 필요는 없다. 인종주의에 대항해 항상 흑인남성들과 동맹관계를 가져왔던 흑인 레즈비언들이 여자들끼리만 하는 퀴어적 위반행위에 대해 백인여성들만큼 깊은 인상을 받지 않는 것처럼, 흑인 이성애자 여성들이 남성들과의 관계를 반드시 반동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이성애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면서 남성과의 관계를 재협상하고, 성적 행위를 재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점은 여성에게 섹슈얼리티가 가져다주는 쾌락과 위험에 대한 많은 질문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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