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일 수요일

"메스티자적 자의식과 양성애"

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5강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V 글로리아 안잘두아: [메스티자적 자의식 (La Conciencia de la Mesiza)]과 양성애

멕시코 철학자 Jose Vasconcelos는 메스티자(mestiza)를 마음에 그리면서 그것을 세상의 주요 네 인종을 껴안는 다섯 번째 인종, 우주적 인종이라 불렀다. 미국에서 흔한 순수 아리안족이라는 호명이나 인종순수정책같은 것을 편다거나 하는 것에 반대해 그의 이론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 유전자의 강이 합류하고 염색체가 지속적으로 “넘나들면서” 혼종의 자손... 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그리고 생물학적 상호수분(cross-pollinization)으로부터 “이방인” 자의식은 지금 새로운 메스티자 자의식을 만들고 있다.
경계들의 투쟁
왜냐하면, 나, 메스티자
계속해서 한 문화의 밖으로 걸어나와
다른 문화의 속으로
왜냐하면 나는 모든 문화 속에 동시에 있으니까
목소리들의 부딪힘으로부터 양가성은 정신과 감정의 뒤얽힌 상태를 야기한다. 내부의 충돌은 불안과 불확정성을 야기한다. 메스티자의 이중적 혹은 다중적 인성(/격)은 정신적으로 쉴 수가 없어 괴로움을 겪는다.
... 아즈텍(Aztec)말로 길들 사이에서 찢어졌다는 뜻인 메스티자는 한 집단의 문화적, 영적 가치를 다른 집단으로 옮긴 결과물이다. 삼문화적(tricultural)이거나 하나의 언어만 쓰거나 두 개의 언어를 쓰거나 혹은 다언어를 쓰거나 방언을 쓰거나 하며 영원한 변화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메스티자는 혼종 번식의 궁지에 처한다: 어두운 피부의 어머니의 딸은 어느 집단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한 문화에서 길러지고 두 문화 사이에 끼어서 세 개의 이 모든 문화와 각각의 가치체계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메스티자는 육신의 투쟁, 경계의 투쟁, 내전을 겪는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소통하는 현실 세계를 인지한다. 하나의 문화 이상에서 살거나 그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들처럼 우리는 다중적인 가끔은 서로 대립되는 의미들을 갖게 된다. 두 개의 자기 모순되지 않는 그러나 습관적으로 나란히 갈 수 없는 참조틀이 함께 간다는 것은 문화적 충돌을 야기한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치카나(chicana)의 문화 안에서 흔히 가지고 있는 백인 문화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흔히 가진 멕시코 문화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고, 이 각각의 문화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흔히 가진 선주민 문화에 대한 믿음을 공격한다. 잠재의식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믿음에 대한 공격을 위협으로 보고 그에 맞서기 위해 반대위치를 취한다.
그러나 반대편 강둑 위에 서서 큰 소리를 질러 묻고, 가부장제, 백인관습에 도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반대위치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결투 안에 우리를 가둔다; 경찰과 범죄자처럼 사투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둘 다 폭력의 공통분모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위치는 지배문화의 관점과 믿음을 반박하고 이로 인해 자랑스럽게 반항적이다. 모든 반동행위는 그것이 맞서는 바로 그것에 의해 한정지어지고 그렇게 그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반대위치는 권위-내/외부 마찬가지로-와의 문제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로 한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방식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새로운 자의식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반대편의 강둑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 죽음을 무릎쓴 두 전사들 사이의 분열이 극복되게 되면 우리는 이쪽 강가에 한 번, 저쪽에 한번 양쪽 강가에 있고 뱀과 독수리의 눈을 통해서 보게 될 것이다. 혹은 아마 우리는 지배 문화에 가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 치부해버리고 경계를 건너 완전히 새롭고 동떨어진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다른 길로 들어설 지도 모른다. 일단 우리가 반동(react)하지 않고 동(act)하려고 결심만 하면 가능한 것들이야 널려있다.
양가성에 대한 관용
이렇게 널려있는 가능성들은 메스티자를 이름모를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한다. 대립되는 정보와 관점을 인지함에 있어 그녀는 자신의 심리적 경계의 늪에 의해 좌우지된다. 그녀는 자신이 개념이나 생각을 엄격한 경계 안에서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치않는 생각을 쳐내기 위한 경계와 벽은 행동 습관과 경향을 공고히 한다; 이 습관과 경향은 내부의 적이다. 엄격함은 죽음을 뜻한다. 오직 유연함을 유지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수평으로도 수직으로도 뻗칠 수 있는 것이다. 메스티자는 꾸준히 습관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에서부터 떠나와야만 한다; 한 곳으로 집중되는 생각으로부터, 이성을 이용해 어떤 하나의 목적지(서구적 양식)를 향해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는 분석적 추리로부터, 이미 세워진 모양과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고 배제하기보다는 포함하는 그런 온전한 시각을 향하는 운동으로서 특징지어지는 서로 다른 생각들로 이동해야만 한다.
새로운 메스티자는 모순을 위한 관용, 양가성을 위한 관용을 개발함으로써 헤쳐나갈 수 있다. 그녀는 멕시코 문화 안에서 인디언이 되는 것을 배우고, 앵글로(Anglo)의 관점에서 멕시코인이 되는 것을 배운다. 그녀는 문화들을 놓았다 잡았다 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녀는 다수의 인격을 가지고 있고, 다원적 양식-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못생긴 것이든 아무것도 밀쳐내지지 않는, 거부되지 않는, 버려지지 않는-안에서 행동한다. 그녀는 모순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양가성을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녀는 그 양가성을 뒤집거나 융해하려는 격렬하고 종종 고통스럽고, 감정에 북받치는 사건들로 인해 흔들릴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그리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일은 땅 밑에서-잠재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영혼이 수행하는 일이다. 메스티자가 서있는 곳을 잇는 초점 혹은 받침점은 현상들이 충돌하는 곳이다. 분리되어 있는 모든 것을 결합할 가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 조합은 끊어져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조각들이 단순히 모인 곳이 아니다. 대립하는 권력들을 균형잡는 곳도 아니다. 합성체를 만들기 위해 자아는 잘려져 있는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세 번째 요소를 더한다. 이 세 번째 요소는 새로운 자의식-메스티자 자의식-이고 그것이 극심한 고통의 원인이라 해도 그것의 힘은 각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단일함을 계속해서 부수는 창조적인 몸짓이 지속됨으로써 생겨난다.
En unas pocas centruria, 미래는 메스티자에게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는 패러다임을 부수는 것에 달려있고, 두 개의 혹은 더 많은 문화들에 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화적 가치관(mythos)-현실을 인지하는 방식,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을 만들어냄으로써 메스티자는 새로운 자의식을 만들어 낸다.
메스티자 자의식이 할 일은 자신을 수용범(prisoner)으로 두는 주체-대상 이원론을 부수는 것이고 그녀의 그런 작업에서 살(flesh) 안에서 형상(image)을 통해 어떻게 이원론이 초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백인종과 유색인종 사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리 자신, 우리의 문화, 우리의 언어, 우리의 생각의 바로 그 밑바탕에서부터 시작된 분열에 대한 치료에 있다. 개인과 집단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이원론적 사고를 통째로 뿌리뽑는 것은 긴 투쟁의 시작이지만, 바라건대, 그것이 우리에게 강간과 폭력과 전쟁의 끝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La excrucijada / 사거리 (the corssroads)
닭 한 마리가 희생되고 있다
사거리, 단순한 흙무덤
Eshu의 흙으로된 사당,
Yoruba, 불확정의 신
그녀가 택한 길을 축복해주는
그녀는 길을 떠난다
Su cuerpo es una bocacalle. 메스티자는 희생양이다가 다시 사거리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여신부가 된다.
메스티자로서 나는 나라가 없다, 내 고향땅은 나를 쳐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나의 나라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여자들의 자매이고 잠재적인 연인이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으로서 나는 인종도 없고, 내 민족은 나를 부인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인종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종 안에 내 안의 퀴어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주의자로서, 나는 인도-히스페닉과 앵글로들의 남성중심적인 집단 문화와 종교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문화로 휩싸여있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 또 다른 문화, 세상과 우리가 그것에 참여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에 참여하고 있고, 우리를 서로에게 이어주고 이 행성에 이어주는 형상들과 상징들로 이뤄진 새로운 가치계체의 창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Soy un amasamiento, 나는 하나의 반죽하는 행동이고, 통합하는 행동이고, 어둠의 창조물과 빛의 창조물을 만들어낸 것뿐만 아니라 빛과 어둠의 정의를 질문하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창조물을 결합하는 행동이다.
...옥수수같은 선주민들, 옥수수같이, 메스티자는 다양한 조건에서도 보존될 수 있도록 구상된 교차번식(crossbreeding)의 산물이다. 옥수수의 귀-암씨(female seed)를 배는 기관-처럼 메스티자는 고집스러워서 그녀의 문화의 껍질 안에 단단히 싸여있다. 옥수수 심에 착 들러붙어있는 옥수수알처럼; 두꺼운 줄기와 튼튼한 버팀뿌리를 가지고, 그녀는 땅 위에 단단하게 서있다-그녀는 사거리들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Lavando y remojando el maíz en agua de cal, despojando el pellejo. Moliendo, mixteando, amasando, haciendo tortillas de masa. 그녀는 라임에 옥수수를 적신다, 그것은 부풀어 올라 부드러워진다. metate 위의 돌굴림대를 가지고 그녀는 옥수수를 갈고 또 간다. 그녀는 반죽하고 모양을 만들어 tortillas 속으로 동그란 공모양의 반죽을 두드려 넣는다.
우리는 돌 metate 안의 통기성 바위이다
땅바닥 위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는 밀방망이다, el maíz agua,
la masa harina. Somos el amasijo.
Somos lo molido en el metate.
우리는 지글지글 뜨거운 코말(comal)이다.
우리는 거친 바위다.
우리는 가는 몸짓이다,
섞어놓은 마약, somos el malcajete.
우리는 막자다, the comino, ajo, pimienta,
우리는 칠레 콜로라도다,
바위를 깨는 초록의 새싹이다.
우리는 머무를 것이다.
El camino de la mestiza / 메스티자 방식
... 그녀의 첫 번째 걸음은 목록을 가지는 것이다. Despojando, desgranando, quitando paja.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것만? 그녀 등에 지어진 무게-인디언 어머니로부터 받은 짐, 스페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짐, 앵글로부터 받은 짐?
Pero es difícil은 lo heredado, lo adquirido, lo impuesto 사이를 구분하는. 그녀는 역사를 체로 거른다, 거짓말을 까불어 골라낸다, 우리를 하나의 인종으로서, 여성으로서 하나의 부분이 되었던 힘들을 쳐다본다. Luego bota lo que no vale, los desmientos, los desencuentos, el embrutecimiento. Aguarda el juicio, hondo y enraízado, de la gente antigua. 이 걸음은 모든 문화와 종교의 모든 억압적인 전통에 대한 의식적인 파열이다. 그녀는 이 파열과 소통하고 그 싸움을 기록한다. 그녀는 새로운 상징을 사용해 역사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신화를 모양짓는다. 그녀는 어두운 피부를 가진 이들과 여자들과 퀴어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택한다. 그녀는 양가성에 대한 자신의 관용(그리고 관용못함)을 강화한다. 그녀는 나누고자 하며, 자신을 보고 듣는 낯선 방식들에 보호없이 그대로 열어두려고 한다. 그녀는 모든 안전이란 관념, 익숙함이란 관념을 포기한다. 해체하고 구성한다. 그녀는 나무, 코요테, 다른 사람으로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는 nahual이 된다. 그녀는 작은 “나”를 총체적인 자신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배운다. Se hace moldeadora de su alma. Según la concepcíon que tiene de si misma, así será.
Que no se nos olvide los hombres
"Tú no sirves pa' nada-
너는 아무짝에도 쓸 모가 없다.
Eres pura vieja"
“너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다”라는 말의 뜻은 당신이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그것의 반대는 마쵸(macho)인 것이다. “machismo”의 현대적 개념과 의미는 사실 앵글로적 발명품이다. 내 아버지같은 남자들에게, “마쵸”는 내 어머니와 우리를 보호하고 부양할 수 있을 만큼 강하고, 그러면서도 사랑을 보여준다는 뜻이었다. 오늘날의 마쵸는 가족을 먹여살리고 보호하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게 한다. 그의 “machismo"는 억압과 빈곤, 빈약한 자신감에 적응한 것이다. 그것은 위계적 남성 지배의 결과물이다. 앵글로는 부당하고 열등하고 무력한 자신에 대한 느낌을 바꿔서 치카노들을 희롱하면서 그 감정들을 이들에게 이전시켰다. 그링고(Gringo) 세계에서는 치카노가 과도한 비하와 자기소실, 자기수치와 자기비하로 고통받는다. 라티노들 주위에서는 이들은 언어의 부적절함과 그로 인한 불편함으로 고통받고; 미국 선주민들과 함께 할 때는 우리의 공통된 피를 간과하는 인종적 기억상실과 그에게 남아있는 스패인의 일부로 인해 스패인이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억압했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받는다. 다른 편에서 온 멕시칸들 주위에 있을 때 그는 과도한 보상심리적 오만을 부린다. 그것은 깊은 인종적 수치심을 덧씌운다.
마쵸안의 이 존엄감과 존중감의 상실은 잘못된 마치스모를 낳아 여자를 경멸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잔인하도록 만든다. 이같은 성차별적인 태도와 함께 있는 것이 모든 것보다 우월한 위치를 갖는 어머니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다. 헌신적 아들, 마쵸 돼지. 그의 행동에서, 그의 존재 자체에서 수치심을 씻어내버리기 위해, 거울 속의 금수를 다스리기 위해 그는 병나발을 불고, 코카인을 하고, 마약주사를 맞고, 쌈박질을 한다.
.... 여성이 함부로 대해지면 질 수록 우리 안의 인디언과 흑인도 함부로 대해진다. 메스티자의 투쟁은 무엇보다도 여성주의적인 것이다. ... 우리는 이미 중간정도 와있다-우리는 어머니의 사랑, 좋은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 이제 내딛을 첫걸음은 puta/virgen 이분법을 잊는(unlearn) 것이다...
부드러움, 연약함의 기호인 이것은 (그렇게 될까)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여자들에 대한 언어적 폭력에서 쏟아지는 것이다. 남자들은, 오히려 여자들보다 더, 성별 역할에 속박되어 있다. 여자들은 적어도 그 속박을 부숴버릴 용기가 있다. 오직 게이남성들만이 그들안의 여성성을 드러내고 현재의 남성성에 도전할 용기를 갖고 있다. 여기저기 드물게 상냥한 일반 남자들이 외롭게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고, 뿌리뽑아내버리지 못한 성차별적 행위에 빠져있다. 우리는 새로운 남성성이 필요하고 새로운 남자들은 운동이 필요하다.
.... 동성애자들은 백인 퀴어들, 흑인, 아시아인, 미국선주민, 라티노, 이태리, 오스트렐리아, 이 행성 나머지 곳들의 퀴어들과 강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색, 계급, 인종, 시기들로부터 왔다.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을 서로서로 잇는 것이다-흑인인과 유대인들과 인디언과 아시아인과 백인과 치외법권의 모든 이들과. ...
메스티죠와 퀴어는 이 시점에서 목적을 가진 진화적 연속태 위에 존재한다. 우리는 모든 피가 복잡하게 섞여있고 우리가 비슷한 영혼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혼합체이다.
너의 진정한 얼굴을 보고 우리는 너를 알 것이다
... 공통의 문화 외에 우리는 우리를 함께 묶어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보다 더 넓은 공통의 바탕이 필요하다. ....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각성은 내부의 변화 이전에, 사회에서 그 변화가 일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 우리 머릿속의 형상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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