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III부 양성애적 인식론 (Bisexual epistemology)
16. Yasmin Prabhudas: [양성애자와 혼혈(/종)인: 변화의 중재자들 (Bisexuals and People of Mixed Race: Arbiters of Change)] (1996)
이 글은 양성애 정체성과 ‘혼혈’ 정체성 사이의 유사함에 대한 논쟁을 펼치고 있다. 프라부다스가 이런 관점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Tracy Charette Fehr(1995)도 ‘이중적 성질(dual nature)’에서 비슷한 관점을 표현했고, 준 조던도 ‘유사함은 인종간 혹은 다인종간의 정체성이다. 나는 양성애의 유사함이 다문화적, 다민족적, 다인종적 세계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92b:193)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라마기오레도 지적했듯, ‘인종’과 섹슈얼리티의 상호 역동성은 양성애 사상에서 중요한 요소이고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은 특히 많다. 애디는 이것을 ‘이종족간 결혼’과 ‘혼종성’으로 형상화했고, 미국 사회에서 인종분류를 할 때의 기준인 ‘한 방울의 피’에 대한 클레인의 호소 등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른 저자들은 유대인이 기독교도로 ‘통과되기(passing)’하거나 양성애자가 일반이나 이반으로 ‘통과되기’하는 것과 같은 ‘실재의’ 자신보다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통과되기’되는 것에 주목한다 (Tucker, 1996). 이같은 비유의 사용은 상호연관됨의 중요성과 구분 흐리기를 강조하는 인식론적 관점을 만든다.
양성애적이 된다는 것은 게이이면서 동시에 일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동시에 양 성의 사람들과 충만한 관계를 맺으면서 혜택을 입는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사회에서) 혼혈이 된다는 것은 (대개는) 흑인이자 동시에 백인인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두 문화의 풍부함에서 동시에 혜택을 입는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양성애자와 혼혈인들은 자주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둘은 모두 이반/일반으로 구분된 집단에서 혹은 흑인/백인으로 구분된 집단에서 동시에 소외될 수도 있고 ‘사이인’으로서 종종 비웃음을 사면서 쫒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도 긍정적인 효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양성애와 혼혈인은 두 영역에서 이 영역들이 하나의 세상에서 얽혀 짜여져 있는 실타래라는 경험을 통해 종종 서로 아주 멀리 있는 이 영역들을 가깝게 한다.
17. Elisabeth D. Däumer: [퀴어 윤리학: 혹은, 레즈비언 윤리학에 대한 양성애의 도전(Queer Ethics: or, the Challenge of Bisexuality to Lesbian Ethics)] (1992)
다우머는 양성애의 유용함과 한계를 첫째는 정체성으로서 둘째는 인식론적 관점으로서 동시에 고려한다. 그녀의 논쟁은 양성애의 이 두 영역이 서로 너무나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일 양성애적 인식론적 관점이 주는 통찰력을 받아들이려면 양성애를 정체성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체성은 상대적이라 할지라도 항상 어떤 면에서 고정되고 안정된 것일 수 밖에 없지만 양성애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급진적 인식론은 바로 그것이 가진 모호성과 자기 모순에서 오는 것이다. ‘양성애적 관점’이라는 관념은 클레어 헤밍스(1997)같은 다른 이론가들도 취하고 있다. 다우머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와 가버가 보여준 ‘Tiresias’ 신화에서처럼 ‘레즈비언 남자’의 형상을 Cloe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가 레즈비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모니끄 위티그의 말처럼 레즈비언은 ‘성(여성과 남성) 분류의 바깥에 있다. 왜냐하면 해당 주체(레즈비언)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Wittig 1981:53). 만약 기존의 성정체성과 성별정체성을 거부하는 여자와 남자가 있고 이들이 관계를 가진다면 이것이 레즈비언 관계일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런 사고가 오히려 레즈비언을 보다 새롭고 위험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인가? 어떤 여자나 남자가 자신들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정의내리고자 할 것인가? 이런 관계의 개념은 어떻게 기존의 이성애적 특권이 이 관계 속에 여전히 잔존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게 하는가?
만약 클로에Cloe가 스스로를 더 이상 이성애자로도 레즈비언으로도 그리고 양성애자로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녀가 갖는 여자 혹은 남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클로에는 성적인 자신, 성별적인 자신으로서 가지는 많은 가능성, 그것이 성적이든 성감적(erotic)이든 지적이든 상관없이 이뤄지는 정열과 끌림, 환상과 관계의 많은 가능성, 현재 우리에게 가능한 섹슈얼리티 담론 안에서는 짜증나도록 숨죽여져있고, 말해지지 않는 그 가능성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클로에를 양성애라고 부르는 것은 주저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두 개의 대립된 성적 지향이라는 이항적 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으로든(Bi Any Other Name)”이라는 글은 양성애가 가시화될 때 그것은 성적 취향의 불변성과 성적 취향을 통해 구분된 사회적 구분을 문제제기함으로써 ‘단성애적 틀(monosexual framework)'을 붕괴시킨다는 것을 한 번 더 보여주고 있다(Hutchins and Kaahumanu 1991:3).
양성애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작동을 통합한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양성애는 이항적인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틀 때문에 생겨난 동성애혐오증과 성차별주의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주의자로서 그리고 레즈비언여성주의자로서인 우리 안에도 뿌리깊이 박혀있는 이항적인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틀을 검토하고 해체할 수 있는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유리한 위치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양성애를 하나의 관점으로서 받아들였을 때 가질 수 있는 혜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양성애는 정체성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모든 정체성의 모순과 틈, 즉 정체성 내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2) 양성애는 그 안에서 각각 서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정치화된 성적 정체성의 독특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3) 상호배탁적인 성적 문화 사이에 모호하게 위치해 있기 때문에 양성애는 우리로 하여금 강제적 이성애 제도와 이성애 관계를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이성애주의에 저항하는 개별 여성과 남성의 노력 사이의 차이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성애를 문제삼도록 할 것이다.
4) 양성애적 관점은 모순된 성적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들의 전쟁을 그 내부에서 행하기 때문에 정체성과 공동체 사이의 다리가 되 줄 수도 있고 우리 안의 공통점에 주목하기 위해 인종, 성별, 섹슈얼리티의 불가피해보이는 차이를 한시적으로 ‘잊을’ 능력을 강화해 줄 수 있다.
18. Gilbert H. Herdt: [양성애의 유동성과 문화적 특징에 관한 논평(A Comment on Cultural Attributes and Fluidity of Bisexuality)](1984)
양성애적 인식론에 대한 많은 공식들이 ‘유동성’ 개념을 양성애가 가진 내재성으로 간주한다. 이 글은 바로 이 ‘유동성’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양성애의 ‘유동성’은 (사실은) 많은 서로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주장한다.
유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유동성과 그것이 참조하는 것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유동성은 흐를 수 있는 역량 혹은 쉽게 변하거나 혹은 고정되 있거나 고체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양성애 정체성에서는 무엇이 변할 수 있는가: 성별 역할, 성적 정체성, 대상 선택, 성적 접촉에 쓰이는 성감적 기술(예, 구강성교 대 항문성교), 성적 접촉의 배타성, 혹은 접촉인지 관계인지를 특징지어주는 친밀함의 정도 등일 것이다.
Weeks(1977)는 중요한 정황적 특수요소가 성적 정체성과 성문화 사이를 중재한다고 보았다. 한 개인의 수 많은 요소들이 일생동안 변하는데 어째서 성적 정체성은 평생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성적인 일부일처제(혹은 단일 대상 파트너쉽)와 배타성이 그것의 근저가 아니라면 말이다.
성적 정체성과 유동성의 상호연관된 측면이 네 가지 있다. 첫째는 문화적으로 구성된 생애주기가 상대적으로 유연한 양성애적 책임과 선택을 허락하는 것으로 변천한다. 사회는 성적 규제와 허용에 따라 다양하다. 그 같은 요소들은 한 사회의 노동분업(D'Andrade 1966)과 성적 계층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멀레니시아인들(Melanesian)은 특정 시기에는 남성 간의 성적 접촉만을 허용한다. 미국 사회의 경우 사춘기 청소녀/년들은 동성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하고 종종 성적 접촉으로까지 진전되기도 한다. 영국의 기숙학교 그리고 유럽의 대학진학 전 학교에서도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 이 같은 경우는 혼전 성관계와 혼외 성관계에 대한 금기가 강함에 따라 나타난다. Paul(1983/1984)은 순차적인 양성애와 동시적 양성애의 대비를 잘 보여준다.
유동성의 두 번째 측면은 양성애적 성감적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에서 대조적 특색으로 쓰이는 성적 기호와 상징의 문화적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 현상학적으로 이러한 성감적 가능성들은 실제 무한정하다. 성별 차이를 세 가지 영역에서 성감적 특징으로 분류한 프로이드([1953]1925)의 유명한 에세이는 이것을 신체적 구조(성적 기호), 정신적 특성(남성적 혹은 여성적 상징), 그리고 대상물(내부에서 다른 이에 대한 흥분이 자극되는 기호와 상징)로 분류했다. 세 가지 영역에서 양극성(polarity)의 정도가 문화 속으로 구조화된 정도에 따라 성적 규제의 정도가 결정된다. 누가 누구와 상호작용할 것인지, 어떤 성적 행동이 허용되고 어떤 조건이 선호되고 받아들여지는지 등의 질문과 그것이 말해주는 사회적 압력은 궁극적으로 성정 정체성의 선택을 한정하는 것이다. 남/여 사이, 서로 다른 인종 사이 등 잠재적인 성적 대상과의 관계가 규제되고 억압되면 될수록 성적 긴장감은 커지기도 할 것이다. Stoller(1979)는 이러한 성감적 지형을 재기넘치게 조사했다. 맹목적 숭배(fetishization)의 개념은 성감적 요소들의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내적작용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해준다(Herdt 1982).
세 번째 측면은 서구 문화에서 일부일처제에 대한 압력이 강한 가운데 양성애에 대해 보이는 부정적 반응과 관련되어 있다. 서구 이반(gay)들은 이반적 삶의 제도화를 위한 노력에서 양성애가 어려운 문제라고 보며 이성애적 가족 성원들은 양성애자들이 이성애적 선택을 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선택의 문제가 핵심이다. 경계를 흐리거나 대립되는 둘을 무시하거나 하는 것은 양성애가 이성애 혹은 동성애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압력을 가할 때는 무관한 것이다.
멀레니시안 사회에서는 이성애나 동성애의 양분된 분류에 따라 사람들이 분류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그들이고 그냥 존재할 뿐이며 생애주기 동안 동성이나 이성 누구와도 성적 접촉을 할 수 있고 그럼에도 매우 규제적인 성적 체계(code)를 가지고 있다. 삼바(Sambian)남성은 동성과 이성과의 관계를 두루 겪어보고 이를 비교 평가하여 서로서로 그 경험에 대해 나눈다. 양성애에 대한 낙인은 없다.
유동성의 마지막 측면은 개인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갖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성적 상호작용 사이의 상관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동성사회적 행위와 동성애적 행위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동성사회성(homosociality)는 배타적으로 동성끼리 사회적 접촉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성별 역할이 양극화되면 될수록, 성적 코드가 규제적이면 일수록, 동성사회성의 발현정도는 높다. 동성사회성과 동성애는 상호의존적 요소이지만 범문화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동성사회성이 동성애로 불가피하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Messenger 1969). 문화적으로 특수한 개념 혹은 상황이 동성사회적 관계에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성감적 반응의 발달을 허용하는 것일수도 있다. Doi(1981:118)의 아매amae개념은 일본 문화에서 동성적 감정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친밀한 남성들 사이에서의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사랑에 대한 욕망이 ‘동성애적 감정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19. Amber Ault: [모호하지 않은 성/성별 구조 안에서의 모호한 정체성: 양성애 여성의 예(Ambiguous Identity in an Unambiguous Sex/Gender Structure: The Case of Bisexual Women)] (1996)
이 글은 양성애 여성들이 매일매일의 현실에서 취하는 인식론적 전략을 살피고 있다. 가버와 다우머와 같이 Ault는 양성애를 정체성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양성애의 잠재적인 변형능력이라는 인식론적 힘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질문지 연구를 통해 올트는 양성애 여성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과 여성주의, 레즈비언 혹은 양성애자들의 정치적 논쟁에서 가지는 위치에 대해 가지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어떻게 겪어내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응답자들이 불안정성, 반이항성(anti-binarism), 유동성으로서의 양성애가 가지는 변형적 잠재력을 믿는 한편, 스스로의 양성애적 자아를 설명함에 있어서는 성별과 섹슈얼리티라는 이항적 틀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어 양성애의 잠재력을 잘라버리고 있었다. 이로써 올트는 양성애 정체성과 양성애 정치학은 서로 맞서고 있는 형국이라고 보았다.
올트는 담론, 구조, 정체성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모호한 정체성 분류에 의해 표식된 주체의 담론적 협상을 추적했다. 정체성을 담론적 산물로 취급하는 것은 구조적 맥락에 의해 의미있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문화적으로 모호한 ‘양성애적’ 정체성 분류를 택한 여성이 지배적 성별 구조의 측면에서 위치지워지는지, 어떻게 이들이 이성애자들과 레즈비언들의 사회적 비난에 대응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구조와 주체성에 대한 최근의 연구작업들은 담론, 지배, 정체성 구성이 가지는 관계를 조사해 왔다. 백인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 기독교적 반유대주의, 식민적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연구는 어떤 지배적 집단들이 자신들이 배제하고자 하는, 속박하고자 하는, 통제하고자 하는 집단에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적 구조와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강화하는지를 통해 담론적 실천에 대해 살피고 있다(Corroto, 1996; Ezekiel, 1995; Frankenberg, 1993; Said, 1978; Taylor, 1994). 탈식민연구, 문화연구, 퀴어이론, 사회운동분석 등은 어떻게 낙인화와 지배가 일탈적 정체성 형성의 바탕으로서, 주변화된 주체들의 정치화를 위해, 반대되는 의식의 등장을 위해, 성적,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의 정치적 동원을 위해 복무하는지를 보여준다 (Butler, 1990; Fanon, 1969; Sedgwick, 1990; Taylor and Whitter, 1992; Terry, 1990,1991). ‘병리적인 것’이라는 분류가 ‘규범적인 것’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개념화했던 에밀 두르케임([1893]1964, [1895]1964)처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주변과 중앙, 하위주체와 식민주체가 상호 거리두기와 상호부정의 과정을 통해 서로서로 지속적인 협상을 한다고 주장한다. 두르케임과 달리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Smart 1993)은 중앙이 주변을 생산하는 코드를 확립하는 상징체계를 중앙이 틀어쥐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상징체계로부터의 탈출 불가능성도 용인하기를 바란다.
지배적 체계의 이항적 구조를 벗어나는 어려움은 모호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회적 분류에 대한 연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포리아, 양가성, 비결정성, 담론 종결이라는 질문, 행위자성에 대한 위협, 고의성의 상태, 개념을 전체화(totalizing)하려는 것에 대한 도전을 살피는 최근의 이론적 고무에도 불구하고’ (Bhabha, 1994; Visweswaran, 1994), 사회학자들은 종종 비결정적 주체를 분류의 양가성이 주는 쾌락과 위험을 중심으로 조사하기 보다는 다른 지배적 분류의 하위집단으로서 분석한다. 양성애 여성은 레즈비언 공동체가 그들을 거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 공동체와 연결되어져 왔다 (Ault [1996b], 1994; Blumstein and Schwartz, 1974; Clausen, 1990; Rust, 1993). 주변화된 집단들의 일탈에 대한 그와 같은 연구들은 담론, 정체성, 지배의 헤게모니적 체계(Gramsci, 1971) 연구에 큰 공헌을 했고, 어떻게 주변화된 집단이 지배적 담론을 자신들 고유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효율적으로 활용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성애 여성에 대한 레즈비언들의 낙인을 레즈비언의 이성애적 구성의 되풀이로 보는 것은 이것을 지배적 위치에서 읽는 것이고, 억압의 역동성을 일반화시키는 것이고, 각각의 사회적 지점을 하나의 보다 큰 이항체계 형상의 반복으로 읽는 것이다.
양성애를 이성애/동성애 구분 속에서 개념화하는 것은 지배적인 이성애 집단과 모호한 양성애 분류와의 직접적 관계를 생략해 버리게 하면서 모호한 주체들이 이미 지배화된 집단(여기서는 레즈비언)에 의해 가장 명백하게 ‘억압받는’ 존재라는 인상을 남게 한다. 이항적 논리의 승인은 모호한 분류를 주변과 중앙의 사이로서 봐야할지 그 이상의 것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다중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반되는 분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봐야할지 어렵게 만든다.
지배적 담론 체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체계의 측면은 항상 그것의 전복가능성을 전제하고, 이항적 대립은 궁극적으로 재조합을 통한 분류의 위반 가능성을 예시한다. 담론은 구조에 의해 모양지어지지만, 구조를 불안정화하는 재귀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정도까지 물적, 사회적 불평등이 정체성체계의 협상에 의해 바뀌어질 수 있을까? 지배와 자유의 지점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점점더 조직되고 있는 사회에서 ‘분배’를 넘은 ‘인정(recognition)’을 위해 경쟁하는 운동에서 (Fraser, 1995; Epstein, 1987; Taylor, 1994; Hennessey[1993]), 사회이론가들은 구조, 담론, 정체성, 주체성, 정치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 양성애 여성은 특별히 흥미로운 예를 제공한다. 양성애라는 명칭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별을 조직하는 이항적 체계를 참조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많은 정치적인 양성애 여성의 사안은 서구 문화의 이원론, 특히 이항적 성/성별/섹슈얼리티 체계를 명시하는 것을 철저히 맹공격하고 (Rubin 1975), 양성애 정체성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온 구조로서 여성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이론화해온 이원적 사회체계에 도전한다고 본다(Ault, 1994; Firestein, 1994). 양성애라는 분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담론적 행위자들은 지배적 범주를 붕괴하거나 뛰어넘거나 안정화시키는데 복무하는가? 지배적 구조는 어떻게 양성애 정체성과 양성애 기호 아래 나타날 수 있는 어떤 행위자들의 담론적 생산물도 억제하는가? 양성애 주체성의 어려움은 특정한 때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정체성이 생산될 때 구조와 담론의 관계성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가? 그리고 지배적 범주를 붕괴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이 질문들의 해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푸코는 ‘담론이 권력을 전달하고 생산한다: 담론은 그것을 강화한다, 그러나 그것을 폭로하고 그것의 토대를 침식하기도 하고, 그것을 약화시키기도 하고, 훼방놓기도 한다’고 보았다 (1980:100-101).
이 글에서 저자는 양성애 정체성을 성/성별 구조 속에 모호하게 위치해 있는 담론적 대상(Lorber, 1994; Rubin, 1975)으로 검토하면서 성적 정체성의 형성에서 구조와 권력의 의의를 생산하고 억제하는, ‘침식하고 폭로하는’, 저항하고 보강하는 담론의 역량에 대해 양성애 정체성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양성애 틀잡기
왼쪽에 레즈비언을, 오른쪽에 근본주의자들을
19-20세기에 등장한 다른 많은 성적 정체성들과 마찬가지로 (Terry 1990,1991) 양성애 분류도 섹슈얼리티에 대한 의료담론에서 모양이 지워졌다. 먼저 성과학자들의 글에서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프로이드의 작업에서 다시 나타났으며 (Evans 1993) 에이즈에 대한 의료적 담론과 대중담론에서 병리화된 몸으로서 나타나면서 제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Ault 1995; Crimp 1992). 의료적, 대중적 담론에서 병리화된 양성애의 몸은 남성의 몸이었으나 1990년대에 나타난 정치화된 양성애는 주로 여성이었다 (Weise 1992a).
양성애는 우파 기독교집단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집단 양쪽에서 낙인찍혀왔다. 1992년, 우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콜로라도에서 ‘양성애 지향’을 합법적으로 차별화할 수 있는 퇴행적 법안을 지지했다. 캘리포니아의 전통가치연합(Traditional Values Coalition)은 양성애자들을 ‘진정한 변태’라 불렀다.
모순되게도 비슷한 모습은 남성 이반이나 성(별)전환인, 혹은 양성애의 문제가 남성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많은 좌파 여성주의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양성애는 이반으로 커밍아웃하기 전의 상태일 뿐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설사 존재한다고 생각한다하더라도 양성애가 레즈비언 정치학이나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보았다 (Ault 1994).
이런 정황 속에서 양성애자로서 스스로를 위치시켰던 여성들은 두 가지 경쟁적인 목적을 위해 조직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사회적 인정을 증대시킴으로써 ‘양성애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항적 정체성 범주를 뒤엎는 것이었다.
양성애적 행위자성 그리고 이항적 성구조 안에서의 정체성
두갈래로 나뉜 주체성
이원주의를 박살내겠다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양성애 여성들은 지배적인 이성애/동성애 분류체계를 자신의 양성애 주체성에 대한 설명에서 재접합, 재강화하고 있었다. 양성애를 이성애, 레즈비언, 게이를 통일된 주체로서 이행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반반’으로 그려냄으로써 양성애 여성들은 양성애 주체성을 관습적 줄을 따라 갈라져 있는 것으로서 구성한다. 이는 ‘반(half)동성애’, ‘반(half)이성애’(Rust 1992)로 말해지기도 하고, ‘양성애 쪽’, ‘레즈비언 쪽’으로 말해지기도 하고, 양쪽 성별에 모두 끌리는 것, 자신의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을 모두 드러내는 것‘ 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누구쪽? 비가시성의 정치학
통일된 양성애 주체성의 형성에 반하는 구조적 압력의 결과로 양성애 여성은 종종 구조적으로 양분된 정체성의 어떤 특징을 선택해서 상반되는 분류를 따라 구조화된 사회 세계를 부정할 것인지 강조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놀랄 것도 없이 양성애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양성애 여성이 ‘앙갚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합법성이나 유효함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수치심 등으로 인해 스스로를 양성애로 표하지 못하도록 한다.
퀴어은폐기제
양성애여성들이 현재의 성구조에서 취하는 위치 중 또 하나는 성분류체계를 새롭게 재배치하는 것이다. ‘레즈비언’, ‘다이크’, ‘이반’ 등이 양성애 여성에게 여성공동체로 통합될 가능성을 제공하는 한편, ‘퀴어’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으로의 통합을 허용하고 성적 이항체계를 재배치하게도 한다. ‘게이’ 혹은 ‘레즈비언’의 오래된 별칭이었던 ‘퀴어’는 1990년대에 재생과정을 거쳤다. 1970, 80년대에 여성을 비하하는 수많은 별칭들을 재활용했던 여성주의 운동가들을 따라 급진적 여성주의자들과 게이 운동가들은 1990년대에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 안에서의 개념을 격려하기 위해 퀴어나라를 조직하면서 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Gamson 1995; Whittier 1995).
최근 퀴어운동가와 퀴어이론가들에 의해 활용되면서 게이, 레즈비언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이든 자신의 기질, 행위, 혹은 지배적인 성/성별/성적 정체성 체제를 비판하는 데에 공감하면 ‘퀴어’를 뜻하게 되었다 (de Lauretis 1991; Gamson 1995; Seidman 1993; Stein and Plummer 1994; Warner 1993). 이를 따라 이성애주의적 체제를 붕괴시키고자 하는 상당수의 양성애 여성들은 스스로를 퀴어로서 명명한다. 퀴어는 보다 대항적이고, 보다 비판적으로 비이성애스러운 느낌이 들게 한다고 많은 양성애여성들은 말한다. 양성애 여성에게 퀴어는 성적 다중성과 퀴어와 비퀴어의 이항적 세상의 구성에서 차이를 생략할 수 있는 역량을 주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퀴어/비퀴어 이항이 이성애/동성애 이항을 대신하면서 양성애는 또 다시 비가시화되고 경계는 새롭게 구성된다.
‘쾌락 두 배, 재미도 두 배?’ 양성 중심성과 단성애의 한계
양성애여성들이 말하는 대안적 이항체계는 양성애를 이성애자들보다는 게이와 레즈비언과 보다 가깝게 표하는 퀴어동화전략과는 다르다. 양성애의 본질화와 일반화는 양성애를 다른 성적 타자-단성애-에 반하여 특권화한다. 이 담론은 양성애자를 주변으로부터 중앙으로 이동시켜 양성애와 양성애 정체성이 규범적이 되고 이반과 이성애 남성과 여성이 상대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게 한다. 이 모델은 게이, 레즈비언, 이성애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반성애적(semisexual)'이라 보고 오직 하나의 성(sex)하고만 친밀함을 추구하는 병리적인 섹슈얼리티라고 위치시킨다. (그러나) 양성애를 지배적인 분류로 두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는 분류를 부정하는 것이고 ’누구나‘ 성적 혹은 개인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위치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담론을 다시금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세상은 다시 양성애와 단성애로 양극화된다. 이 집단은 성적 이원주의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성적 대상은 하나 혹은 다른 하나다. 대안적 ‘저항’담론은 단성애를 하나의 주변화된 타자로 생산한다. 이성애자들과 레즈비언 담론이 양성애를 타자로 만드는 한편 이성애/동성애 이항에 비판적인 양성애담론은 양성애적 몸을 ‘이성애’와 ‘레즈비언’ 사이에 틀어박고 양성애를 새롭게 구성되고 이제 낙인찍히게 된 집단적 타자인 단성애에 반한 합법적이고, 규범적이고, 중앙인 것으로 확립시키면서 이 분류를 공통된 주변으로 이동시킨다.
양성애자들 진실된 그리고 최신의
일단 성체계(sexual system)가 양성애/단성애 구분으로 재정비되고 나면 양성애 여성이 양성애의 정당성을 확립할 책임을 안게 된다. 양성애 여성에 대한 우파 종교의 반대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공동체의 공통된 반대를 봤을 때, 양성애의 정당화를 위한 기준이 이성애여성의 정당화와 레즈비언의 정당화를 명시하는 것과 닮은 것은 놀랄 것이 없다. 진실됨, 정조, 책임감, 합일체에 대한 헌신성,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적 대상, 심지어 소위 전통적 보수 가치도 진실, 합당, 진정 실재하는 양성애의 구성적 특징으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이 담론은 ‘문란하고’, 비정치적이고, 혹은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향한 사회의 비난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않은 양성애자들은 교정의 대상으로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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