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1일 수요일

"생물학적 결정론 문제삼기"

여이연 2007 여름강좌
- 섹슈얼리티 I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강좌 자료>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Feminism and Sexuality) / 스테비 젝슨(Stevi Jackson), 수 스캇(Sue Scott), 1996
"본질주의 대 사회적 구성주의: 생물학적 결정론 문제삼기"
번역: 여이연 섹슈얼리티 세미나팀

섹슈얼리티를 정치적 사안으로 만들면서 여성주의자들은 섹슈얼리티는 변화하며 따라서 성적 욕망과 실천이 자연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기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가정을 문제삼을 수 있는 개념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삼기는 여러 가지 사안들에 걸쳐 제기되었다. 여성해방운동(WLM)은 여성종속을 낳은 조건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만약 그 조건들이 자연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반대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것의 기원이 사회적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적이어서 불가피하거나 혹은 불가피한 것이어서 자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지 않는다.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 아닌 것은 자연적이 아닌 다른 것, 즉, 그것이 자의적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반발심처럼, 여성들의 반발이 가지는 논리적이고 필연적 함의는 그 상황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곧 그 상황이 사회적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결정론을 문제삼는 것은 여성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정치적 전략이지 단순히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관련된 것이 행위성(agency)과 구조(structure)의 문제이다.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할 때, 생물학적 결정론을 또 다른 형태의 결정론으로 대체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섹슈얼리티를 강제하는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관습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거기에 더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이러한 제약 속에서 성적 실천에 관해 협상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려해야한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사회구조와 행위자(agent)로서의 우리 자신과의 상호관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변화를 위한 어떤 전략도 만들어 낼 수 없다. 여성주의 성정치학은 우리가 하는 선택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에 관심을 가져왔다. 한편, 여성주의자들은 섹슈얼리티에 미치는 복잡한 사회문화적 영향에 대해 인식해 왔고,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지나치게 개별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인식해 왔다.
여성억압의 기원이 사회적이라는 믿음은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공감했고 또 공감하고 있지만, 이 가정에 대한 분석 방식은 항상 서로 달랐다. 게다가 각각의 분석방식은 지난 몇 십년동안 더욱 발전했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섹슈얼리티의 현 형태가 탄압적이고 따라서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항상 섹슈얼리티 자체에 대한 분석의 발달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개량주의적(reformist) 여성주의자들은 강간 피해자의 치료나 성희롱과 같은 문제들에 관련된 법률적 또는 관료적 변화에 더 초점을 두어 왔다. 좀 더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이런 사안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섹슈얼리티를 좀 더 근본적으로 사회문화적 질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사안들을 이 맥락 안에서 보고자 한다.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론화해 왔던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이러한 급진적인 경향을 가진 이들이다. 대다수의 이 이론가들은 섹슈얼리티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개념화해 왔지만, 정확히 그 구성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제되고 억압받아온 진정한 여성적 섹슈얼리티가 있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의견도 항상 있어왔다.
많은 여성학 교재에 제시되어 있는 것과는 반대로, 이런 관점의 차이는 사회주의 적 여성주의, 후기구조주의적 여성주의, 포스트모던 여성주의를 한 편에 두고, 급진적 여성주의를 다른 한편에 두는 구분에 따라 무리없이 구분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는 섹슈얼리티가 자본주의에 의해 억압되어 왔다고 보는 전통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적 여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기 위해 억압(repression)을 중심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이론인 정신분석학으로 돌아섰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본성과 본질적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믿기 때문에 종종 본질주의자로 잘못 재현되기도 한다. 본질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는 이와는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여성이 가지고 있는 ‘차이’가 있다는 학설에 항상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급진적 프랑스 여성주의 전통을 잇고 있는 이 중 하나인 크리스틴 델피는 이미 앞서 언급했다. 영국에도 본질주의에 강하게 반대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흐름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특히 오인받고 있는 집단이 몇몇 북미 여성주의자들인데,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이 한 예이다. 기록 상에서 봤을 때, 그녀는 여성이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근본적으로 반대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종종 본질주의자로 분류되어 왔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견해와 태어날 때부터 잠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다른 이론적, 정치적 구분을 가로지르며 나타난다. 강조할 지점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도 여성주의자들의 글에 나타난다. 섹슈얼리티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이들은 사회적 구성의 어떤 측면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세 가지 주요 분석 요소를 중심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첫 번째는 남성 지배의 문제를 가장 우선시 하면서 가부장적 구조와 관련지어 섹슈얼리티를 분석한다. 두 번째는 개별 주체의 수준에서 성적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는 지에 집중하는데, 곧, 어떻게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성적(sexual)이 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성적 욕망의 다양성(variability)과 유연성(malleability)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비록 여성주의자들이 많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각각의 분석 요소에 기여해 왔지만, 특정 이론집단은 세 분석 요소 중 하나와 주로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주로 첫 번째 요소와 관련되어 있고, 정신분석학적 여성주의자들은 두 번째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세 측면 모두를 연결하고 있는 지점을 찾고자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것이 앞으로 여성주의 섹슈얼리티 이론을 위해 가져가야할 최선의 방향일 것이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의 이해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 중 인간 섹슈얼리티의 유연성이라고 규정된 세 번째 입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섹슈얼리티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생각은 모든 사회구성주의에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섹슈얼리티가 모든 문화에서 같지 않다는 것과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효과적인 반론을 펼칠 수 있다. 게다가 변화해 왔다는 것이 보여진다면, 이것은 미래에 또 변형될 수 있다는 잠재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다양한 이론적, 정치적 신념을 가진 여성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섹슈얼리티가 취한 다양한 형태에 대한 지식의 축적에 공헌해 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책 첫 부분의 세 글들은 이렇게 공통된 관심사에 대해 서로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이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최소한 1930년대 이후 다른 사회들에서 성별과 섹슈얼리티가 조직된 방식을 살펴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는 남성과 여성이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포함해 각기 다른 사회에서 남성적 또는 여성적 특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미드는 뉴기니(New Guinea)의 세 사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각 사회는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해 매우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앤 오클리Ann Oakley는 이 관점을 잇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모든 문화가 성별이라는 한 쌍의 양극적인 특질이 각각 여성과 남성에게 영구적으로 체화되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성별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서구적 개념화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모든 문화가 반드시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내적인 인간 본질이라고 보는 것도 아니다. 초기 인류학자들이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성 관습을 목록화한 후, 최근의 연구는 성적 행위를 성립시키는 무엇인가를 사전에 확연하게 결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넓게는 문화적 맥락과 당장은 대인관계적 맥락에 따라 특정 행동에 주어지는 의미가 있고, 어떤 것이 성적(sexual)인지 아닌지는 이 의미에 달려 있다.
이 같은 분석은 더 이상 우리가 섹슈얼리티를 우리가 표출하거나 표출하지 못하도록 억압받는 어떤 내적 욕망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슷한 결론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서도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빅토리아 시대는 성이 억압되었던 시대로 간주되고, 이것이 성적인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허용적인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성이 벗어나게 되었다고 간주된다. 이러한 관점은 어떤 주어진, 따라서, 자연적인 섹슈얼리티가 도덕적 관습과 제약에 의해 규제되어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미 몇몇 이론가들이 이런 관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1970년대 후반의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저작은 섹슈얼리티의 역사에 대해 광범위한 재고를 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푸코는 섹슈얼리티가 권리박탈과 금지를 통해서 규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법규와 격려를 통해 생산도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엇을 하지 말라고 듣는가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지를 보게 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19세기가 성적인 것에 대해 침묵했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행동과 기질을 목록화하고 분류하여 새로운 성적 어휘들을 탄생시키는 등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담론의 ‘광범위한 폭증’이 있었던 시대였다고 주장한다. 이 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섹슈얼리티의 개념이 나타났고, 이 때 색광(nymphomania), 동성애(homosexuality), 시간증(necrophilia)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섹슈얼리티들에 이름붙이는 것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특정 행동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간 내면의 본질로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제 동성애자로 존재(be)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규제양식으로서, ‘병리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구분하고 분류해서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성과학이 등장했다. 따라서, 섹슈얼리티는 점점 더 의학적 시선에 영향을 받았고, 더 이상 단순한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동시에 섹슈얼리티가 정체성의 토대가 된 것은 그렇게 정체화된 이들로 하여금 부정적으로 정의되는 것에 저항하고 대안적인 정의방식을 개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동성애를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 정의 내렸던 과거의 역사 없이는 동성애 해방운동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푸코 자신은 성별에 별 관심을 쏟지 않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제를 단지 여러 많은 규제 가운데 하나로 여겼지만, 여성주의자들은 그의 연구가 매우 유용하다고 여긴다. 특히 푸코의 연구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단순히 억압되어 왔다기보다는 복잡하고 종종 서로 모순되는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또 재구성된 것으로 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음탕한 유혹자로 인식되던 여성이 19세기에 어떻게 ‘타고난’ 순수의 관념으로 이해되는 식으로 변한 것인지에 대해 보다 상세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을 이전에는 자유로왔던 성에 대한 표출에 대한 억압이라고 보는 것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관점은 첫째, 이전 세기에 여성에게 가해진 규제양식을 간과하는 것이고, 둘째,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복합적으로 구성했던 의미들의 다양성을 감추는 것이다. 여성은 독립적인 성욕이 없는 무성적인 존재이지만 자신의 성적 기관들에 의해 좌우됨으로써 섹슈얼리티로 가득찬 존재로 생각되었다. 스스로의 욕망은 없어도 유혹당하기 쉽고 따라서 자신의 위치에서 쉽게 쫒겨나 ‘타락한 여자’가 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설사 ‘순수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월경같은 여성 몸의 기능은 다른 것을 오염시키고, 여성의 재생산 기관은 규칙적으로 배출이 필요한 배수구로 여겨졌다.
여성의 복잡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출산과정에 대한 의료적 개입에 관한 푸비Poovey의 설명을 뒷받침한다.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의 이 시기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쉴라 제프리Sheila Jeffery는 레즈비어니즘이 어떻게 고안되었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여성들 사이의 절친한 우정이 병리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제프리는 가부장적 권력의 발현인 이성애 속으로 여성이 포섭되는 것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이 점이 그녀의 입장이 푸코적 관점과 다른 지점이다. 푸코는 권력을 훨씬 흩어져 있고, 다면적이며, 다양하게 산재되어 경험되는 속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개념화했다. 푸비는 푸코의 역사적 분석에 영향을 받았지만,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서 권력을 유지시키는 물적 근거에 관심을 갖었다. 그녀는 권력을 확산되고 다양화되고 다양한 추론적 실천들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개념화시켰다. 푸비는 푸코의 역사적인 분석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특정 사회관계에서 권력이 갖는 물적 근거에 또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만약 이러한 논쟁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섹슈얼리티가 사회적 구성물이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것이라면,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우리 개개인의 욕망과 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문화와 동시대가 구성해낸 섹슈얼리티를 그저 내면화해 표출할 뿐인가 아니면 문화적 관행과 개인의 주체성과의 관계는 덜 기계적이고 훨씬 열려있는 것인가? 여성주의는 개인의 섹슈얼리티가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 사회문화적 구조와 개별 행위성을 모두 아우르며 이론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이 당면한 과제이다. 이 중 이 사안을 현저하게 눈에 띄게 다루는 기존 이론이 정신분석학이다.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남성성기 선망에 의해 형성되고, 불가피하게 수동적이고 피학적이라고 봤던 프로이드의 관점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혐오주의적 관점이라고 보았다. 이후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깡Jacques Lacan에 의해 고무된 몇몇 여성주의자들은 프로이드의 관점을 문자그대로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면서 프로이드의 공헌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 관점의 매력은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구조를 강조하는 점이다. 우리는 문화적 구조와 언어적 구조 안에서 성이라는 주체(sexed subject)가 되어 위치지어지고, 문화적, 언어적 구조 안에서 이 주체는 불확실한 성취로서의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재현하게 되는 것이다. 라깡적 정신분석학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면) 상징적인 남성 성기를 문화의 중심에 자리매김함으로써 여전히 남성중심적이다. 라깡의 영향을 받은 몇몇 여성주의자들은 이점 때문에 대안적인 이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를 위한 하나의 가능성은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중심에 놓고 그것에 비교된 것으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정의하기보다 여성 몸의 특성에 바탕을 두고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남성성기적 특권을 문제삼는 것이다. 이것이 루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가 특별히 관심가져온 지점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정신분석학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정신분석학은 주체에 대한 보편이론을 내놓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해온 것으로서 보는 역사적 관점과 양립하기가 어렵다. 라깡적 관점에서 성화된(sexed) 욕망 주체는 언어와 문화 속으로 편입되어야 비로소 구성되는 것이라고 볼 때도 특정 언어와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발화 주체’가 되는 바로 그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떤 본질적인 전문화적인(pre-cultural) 여성섹슈얼리티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남성성기중심성을 문제삼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은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우리의 ‘선택 대상’인 성별로 환원해서 합성하기 때문에, 남성화된 여성 혹은 여성화된 남성이라는 관념 따위로 퇴보해 생각하지 않고서는 레즈비언적 욕망과 동성애적 욕망에 대해 적합한 설명을 내놓을 수가 없다. 정신분석이론에서 여성으로 존재하기는 곧 남성을 욕망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성을 욕망하는 여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많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여성주의적 이론화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개인의 성적 욕망을 설명할 수 있는 마치 유일한 관점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아마도 그 영향력은 부분적으로는 그 외에 뚜렷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론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합하지 않거나 개발이 덜 된 상태다. 사회화에 관한 전통적인 사회과학 이론들은 너무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이어서 외면되어 왔다. 몇몇 여성주의자들은 상호작용주의적 전통에 기반해 성적 의미의 협상에 집중해서 개인 주체를 스스로의 성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인 행위자로 위치시킨다. 다른 여성주의자들은 푸코의 관점을 가져와 주체성의 문제에 대해 답하려고 해왔다. 예를 들면 웬디 홀웨이Wendy Hollway는 남성과 여성이 각자 접근가능한 담론 내에서 스스로를 성적 주체와 객체로 위치짓는 방식을 분석한다. 이 관점들 중 어느 것도 충분히 발전된 것은 아니며, 두 관점 모두 중요한 개념상의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즉, 이 관점들은 주관적(subjective) 그리고 간주관적(intersubjective) 과정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 남녀 사의의 권력관계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을 대신할 설득력있는 대안의 부재는 여성주의이론의 주요한 결함이며, 이 점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관심이 쏟아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 여성주의자들이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에 관해 과거에 해놓은 작업들을 재평가하고, 그것의 장단점을 평가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여기서 특히 다이애나 퍼스Diana Fuss가 제기하는 질문은 본질주의적 관점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와 우리가 본질주의와 구성주의라는 그릇된 이분법을 취하는 위험에 놓여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한, 캐롤 밴스Carole Vance는 사회적 구성주의의 각각 다른 정도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성적 욕망을 구성된 것으로서 개념화하는 이론들이 섹슈얼리티를 탈체화(disempbodied)된 것으로 다루면서 몸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여기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이고 여성주의자들이 이제 문제삼기 시작한 것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실재로서 경험되는 몸 자체가 한편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사안 중 하나는 여성주의자들이 인간과 동물 사이를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대조적 관계로 놓음으로써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논쟁을 발전시켜온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의 마지막 글에서 린다 버크Lynda Birke는 우리가 동물에 관해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며, 그렇게 했을 때 사회구성주의이론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우리는 굳건하게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이것이 여성주의를 위해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필요하다고 본다. 본질주의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첫째, 이것은 문화적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어떻게든 오염되지 않은 ‘자연적’ 섹슈얼리티가 있다는 알아낼 수 없는 가설에 의존해 있다. 그 결과 그것은 인간 섹슈얼리티의 문화적, 역사적 변화를 적절히 설명해 낼 수 없다. 차별적 억압이란 이런 복잡한 변화를 설명해내기에는 너무 부족한 개념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부정적인 힘으로 개념화해서 섹슈얼리티의 형성에 있어서 그것이 생산적인 힘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용납하지 않는다. 본질주의적 관점은 남성성 안에서의 차이와 여성성 안에서의 차이를 ‘자연적인’ 차이 혹은 차별적인 억압 이외의 측면에서는 설명해 낼 수 없다. 이 관점에서는 여성과 남성은 태어날 때부터 다르고 어떤 것도 이것을 바꿀 수 없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섹슈얼리티보다 훨씬 억압받아왔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더 억압받아왔다는 관점은 현재의 남성 섹슈얼리티를 억압받지 않은 섹슈얼리티의 표준,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가 갖추어야 할 모습으로 정의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 관점을 정치적으로 문제적이지 않다고 받아들일 여성주의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대로라면, 정상적 섹슈얼리티는 이성애이고, 따라서, 그것이 가정하는 것은 성차별적인 동시에 이성애중심주의적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는 어떤 타고난 여성적인 성적 쾌락을 상상하는 것은 꽤나 마음이 끌리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타고난 섹슈얼리티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일이다. 분명하게도 그런 섹슈얼리티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와 문화의 바깥 영역에서는 우리는 어떤 것도 개념화할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섹슈얼리티는 항상 사회적 산물이었고, 미래에 어떤 형태의 사회가 나타나게 되던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억압 개념이 가지는 힘은 여성이 성적 영역에서 경험했던 피해와 위험을 잘 살려 말해줄 수 있는 데 있다. 그러나 그런 여성의 경험은 억압(repression)보다는 오히려 탄압(oppression)으로써 표현되는 것이 맞다. 억압이라는 개념은 근원적인 어떤 힘을 잡아놓는 것을 뜻하는 반면, 탄압은 권력과 지배라는 사회관계에 관심을 맞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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