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4강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IV 차이들
20. HÉLÈN CIXOUS: [메두사의 웃음(The Laugh of the Medusa)] (1975)
식수는 차이가 양성애를 이해하는 중심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성적 차이말이다. 정신분석학적 전통에서(특히 프로이드와 라깡을 이어) 이성애와 동성애의 차이보다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 말이다. 식수의 주장은(Sellers 1994)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측면에서 양성애에 대한 정신분석한적 설명이 성적 차이를 사실상 흐리게 하고 중성화하는데 이는 그 설명이 남성성을 여성성보다 우위에 두고 여성성을 남성성과의 관계에서만 규정하거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은 다시 말해 여성성은 남성성의 반대 혹은 그것의 부정으로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차이를 부정적인 개념으로서 재현하는 이러한 ‘중성의(neuter)’ 양성애에 반대하여 식수는 ‘다른 양성애(other bisexuality)’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긍정적으로 서로 다른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양성애를 말하고 따라서 여성성은 남성성과의 관계 하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식수에 따르면 이 ‘다른 양성애’는 “여성적 글쓰기(Feminine Writing)", 즉 남성저자가 쓰건 여성저자가 쓰건 상관없이(식수는 실례로 James Joyce의 ”율리씨즈(Ulysses)(1992[1922])" 듬) 성적 차이를 차이로서 긍정함을 통해 표현된다. 이런 면에서 양성애는 정체된 것도 아니고 중성적인 것도 아닌 역동적이고 과정 중에 있으며 활기넘치게 살아있는 것이다.
다른 주체들이 서로서로를 알고 다시금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의 경계를 살아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신을 다른 이 속으로 들여보내고 다른 이 사이로 들여보내는 수 만번의 만남과 변화를 겪어 자신의 형태를 갖추는 여성들처럼. 양성애: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의 현재의 위치-각 개인에 따라,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혹은 두 성 모두, 둘 중 어떤 다름도 배제하거나 두 성 중 어느 성도 배제하지 않고, 이 ‘자기허용’, 욕망의 기입의 효과의 증식, 내 몸의 그리고 다른 몸의 모든 부분에 온통 드러나고 두드러지는.
‘여성은 양성애자다’; 남성은 그 남근중심적 사고로 인해 그저 기괴한 모양으로 프로이드와 그 후학들이 말한것처럼 ‘자신이 여자일까 싶은 두려움’으로 소비되는 단성애적 존재일 뿐.
어두운 대륙은 어둡지도 탐험못할 곳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졌고 우리가 그렇게 믿었을 뿐. 그들은 우리를 두 가지 무시무시한 신화 사이, 메두사와 지옥 사이에 단단히 못박았다. 남근중심이성주의의 부인(sublation)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그것은 투쟁적이고, 오래된 모습을 재생산하며 거세의 교리 안에 정박되어 있다. 그들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았고, 그들의 욕망을 현실로서 이론화시켰다.
참 안 좋겠다 만약 그들이 여성들이 남성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면 혹은 어머니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다면. 그러나 이 두려움은 그들에게 편리한 것은 아닌가? 사실, 여성이 거세되지 않았다면 더 나쁘지 않았을까, 그들이 사이렌들의 노래 듣기를 멈추기만 했더라면 (사이렌들은 남자였으므로) 역사는 그 의미를 바꾸지 않았겠는가? 이제 메두사,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치명적이지 않다. 그녀는 아름답고 소리내며 웃는다.
21. Clare Hemmings: [양성애 정체성 위치짓기: 양성애 담론과 여성주의 이론(Locating Bisexual Identities: Discourses of Bisexuality and Contemporary Feminist Theory)] (1995)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와 차이의 실례로서의 양성애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 Hemmings는 여성주의와 퀴이이론과 정치학에서 차이 개념의 중요성을 반추하면서 이 분야에서의 정체성과 차이의 긴장은 이 분야 고유의 질병과 같다고 결론짓는다, 즉, 차이를 논하는 어떤 이론이건 역시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 정체성의 이론이고 정체성/차이 이항은(Ault가 19장에서 언급했던 다른 이항들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헤밍스는 이것을 문제로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양성애 이론가들이 이 모순되 보이는 것을 성적 주체성과 권력관계, 그리고 ‘위치의 정치학’의 시발점으로 활용해야한다고 제안한다. 헤밍스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이항구조를 구체화하는 데 있어 그리고 스스로를 급진적 주체들 혹은 ‘차이’의 살아있는 체현으로서 스스로를 재현하는 양성애자들 자신의 개인적이고 수사적(rhetorical)인 투자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검토를 포함한다.
양성애 담론들
차이의 이론들
여성들간의 차이에 대한 여성주의 이론은 자아의 분열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만약 초기 여성주의가 단일의미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남성성 모델을 재생산했다는 비난을 받는다면 최근의 ‘후기구조주의 학파’의 여성주의 이론에는 붙여질 수 없는 딱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에 대한 근래의 초점은 ‘양성애적 집’에도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일까? 여기 ‘퀴어 이론’도 관계가 있다. 퀴어이론은 여성주의 운동보다는 좀 더 자주 레즈비언과 게이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퀴어는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 내부에서의 분열과 차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같은 발전은 여성주의자들, 특히 레즈비언 여성주의자들의 모습 속에서 무엇이 정체성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념의 진보와 섞여 짜여져 있다. 양성애 여성주의자로서 ‘집’은 아마도 이 이론들 중 하나 혹은 모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Teresa de Lauretis같은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자들/퀴어이론가들은 권력을 억압으로 보는 관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우리의 정체성은 권력의 네트웤과의 협상을 통해 그리고 그 협상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권력에 반대해서 혹은 권력의 바깥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Butler 1990, 1993; de Lauretis 1991). 이같은 접근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이 얘기되어야 하지만 최소한을 얘기한다면 그것이 이성애주의에 반하면서도 단일체이거나 정적이지도 않은 ‘비고착된’ 일탈적 정체성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포스트모던 이론이 정체성의 고정관념을 받쳐주고 있는 동일함(sameness)/차이(difference)의 대립을 문제삼을 수 있는가 아닌가이다. 레즈비언 여성주의 담론 안에서 양성애를 구성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에 의해 긍정적인 관념으로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위반(transgression)이라는 개념을 보면 전적으로 차이에 초점을 둔 몇 가지 문제가 떠오른다. 위반은 전체주의자들과 좌파 투사들이 공통적으로 썼던 변이가능한 규념이다(Wilson 1993). 그것의 주된 기능은 그러나 기존의 경계를 건너는, 현 위치의 고의적인 역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반은 정말 지배적 담론에 도전할 수 있을까? 엘리자벳 윌슨은 위반을 다시금 위반할 필요가 생기는 새로운 경계를 설정하는 ‘더 나아가기’로서 규정한 미셸 푸코의 말을 바꾸어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지게 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적어도 영구히 계속되는 위반하는 나선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위반은 어떤 최종적 목적도 규정하지 않고 어떤 최종적 지배력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받아들여지는 행위의 경계, 예를 들어 성적으로 명백한 재현의 측면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경계, 바로 그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경계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Wilson 1993:110)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경계는 새로운 영역 혹은 새로운 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 위치의 위반은 사실 지배적 담론의 토대를 침식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합한다. 지배담론은 무엇이 지배적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규정하는 ‘타자’의 존재에 의존해 있다. 성정치(Queer,SM, etc.) 안에서 차이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초점이 후기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를 거부하는 차이와 맞먹는 따라서 동일/차이라는 양극이 여전히 유지되는 어떤 대안적인 반대를 그저 설정하지는 않는다. 차이는 차이자체를 특권화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위반이 실제로 담론을 떠받쳐주는 형식(forms)을 붕괴하지 않는다면 그 시도는 이항적 대립의 끝없는 나선운동의 또 다른 동반자가 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양성애가 퀴어와 후기구조주의이론 안에서 언급되나 결코 심각한 이론적 방식으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어 보인다. 예를 들어 테레사 드 로뤠티스는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에 단순히 하나 더해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그리고 질문하는 이들’ 식으로 되는 분류의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de Lauretis 1991:vi). 그러나 로뤠티스는 결코 실제로 레즈비언, 게이 연구에서 양성애를 포함시키는 것의 함의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사실상 그것을 다시금 언급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퀴어정치학에서 양성애는 주변화되어 있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많은 경우 회의가 양성애자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 않은 레즈비언과 게이 센터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Cherry Smyth는 "퀴어 관념에 대한 레즈비언들의 이야기(Lesbians Talk Queer Notions)(1992)“에서 여성주의와 퀴어정치학을 연결시키려는 용감한 시도를 하였다. 그녀는 ‘레즈비언’을 재발명하려고 하면서 현 퀴어정치학에서 양성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로뤠티스처럼 스미스도 양성애를 충분히 깊이있게 논쟁하지는 않았다.
양성애, 혹은 한 몸에서의 동성적 욕망과 이성적 욕망이 현존하는 것은 한시적이고 이동적인 위치로서의 정체성의 전형이라고 얘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즈비언이라는 단일체적 정체성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오직 레즈비언과 게이의 분류: 다시 말해 동일함의 위치로부터의 차이를 고정된 것으로 놓을 때나 가능한 것이 된다.
이항적 대립은 여성주의 안에서의 정체성의 정치학과 차이의 정치학을 구조화한다. 질문되는 ‘타자’는 달라질런지 모르나 그 범주는 달라지지 않는다. 타자화는 근본적으로 복잡한 고정이다. 그것을 위해서 당신은 받아들일 수 없는 바로 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바로 이것이 여성주의 안에서 ‘위기’를 구성하는 규념(terms)논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비관적으로 봤을 때 차이의 이론은 그저 오래된 논쟁의 새롭고 변이가능한 형식일 뿐으로 보인다(더 많은 것들이 변할 수록 더 많은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양성애의 위치잡기
기존의 여성주의 구조를 통해서 양성애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여성주의적 모델과의 관계에서 양성애를 분석하는 것은 양성애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 어려움을 강조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양성애는 어디에 위치할 수 있는가? 어떤 입장에서 양성애 여성주의 이론은 검토될 수 있을까?
외부자 지위를 요구하면서
‘진짜 문제’인 동성애혐오증을 간과하게 한다고 비난하는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의 비난에서 양성애를 비호하기 위해 종종 양성애 정체성을 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을 넘어선 그 위의 것으로 둘 때도 있다.
양성애(나의 양성애)를 정체성 이론 안에서 동일과 차이의 이항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서 사용하는 것은 외부자 지위를 특권화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외부자 위치에서의 나의 (특권적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이 이항을 특히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으로서’ 재생산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그 ‘지독한 이항’이 ‘바깥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적은 거의 없다. 그 이항은 다른 것들만큼이나 나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주고 그것을 생산해낸다. 나 스스로와 나눈 대화, 내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이항, 세상을 보는 나의 방식, 이 모든 것이 내가 해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들을 재구성한다.
엘리자벳 윌슨은 양성애가 동성애와 같던지 아니면 더 약하던지 그와 다르던지, 그 어떤 경우이건간에 이성애적 영역에 드리어져 있을 수 밖에 없다(Wilson 1993)고 보았다. 이 틀에서 본다면 왜 양성애가 ‘외부자’ 지위의 관념을 껴안게 되었는지 혹은 배타적인 명예을 위한 경쟁으로 들어가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정체성의 정치학은 창문을 넘어가서 위반과 성별놀이라는 관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양성애를 또 하나의 비정치적 씹(fuck)으로 보는 윌슨과 달리 양성애를 배제하려는 시도는 거의 권력구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내부에서 비가시적이 되기보다는 외부에서 가시적인 것이 낫다. 그런 측면에서 다른 이들에 의한 그리고 스스로에 의한 양성애의 배제는 둘 다 굉장히 정치적인 것이다.
양성애적 이론화
양성애를 이론화하는 데에 있어서의 주요한 어려움은-또한 쾌락이기도 한 그것은- 참조할 토대적 분류의 부재이다. 레즈비언이나 게이남성의 욕망 구조에 대해서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치고 들어갈 전제와 정체성이 있다. 그래서 양성애 이론이 동일과 차이 분류를 비판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안적 구조는 충분히 이론화되지 못했다-등에 진 것 밖엔 돌아갈 집도 아직 없는 것이다. 양성애는 동일과 차이 안에서 생산되기도 하고 생산되지 않기도 한다. 그것을 통해서 의미를 얻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성애 주체가 위치할 만한 어떤 정체성도 그 안에서 가질 수 없다.
존재적 분류로서의 양성애자와 경험적 분류로서의 양성애 사이의 차이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동성애와 이성애 바깥에 위치하는 성적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또한 어떤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가정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한편 ‘정체성’ 관념을 거부하면 나는 양성애가 이론화될 수 있는 입장을 정연화하려는 욕망을 부정할 수 없어진다.
아마도 (1) 특정 양성애 정체성을 특권화하지도 않고 (2) 차이를 위한 차이를 특권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집과 방법론을 찾는 것은 특정 시간의 특정 위치들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양성애; 양성애-양성애 등등 무한히)
어떻게 개개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가? 나는 주로 양성애‘프리섹스’ 남성보다는 레즈비언 여성주의자들과 가깝다가도 레즈비언, 게이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양성애혐오증에 대해서는 이 양성애 남자와 동맹하게 된다. 나는 동시적으로 계급, ‘인종’, 교육, 연령 등에 의해 위치지워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것을 ‘특수성(specificity)'이라는 규념으로 언급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못견딜만큼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어려움은 누가 한시적인 정체성와 동맹을 바탕으로 어떤 속함(belonging)이라는 느낌을 형성할 수 있는가이다. 참을 수 없는 질문은 어떻게 누가 또 다른 탈치(dislocation)된 주체들을 알아볼 수 있는 탈치된 주체가 어떻게 될 수 있는가이다. 탈치된 주체가 된다는 것은 두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양성애적인 것-을 현존하는 구조의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 안의, ’세상‘ 안의 모순을 읽는 것이다.
22. ANN KALOSKI: [양성애 싸이보그와 붙어나다: 정치학, 쾌락, 혼/난(Bisexuals Making Out with Cyborgs: Politics, Pleasure, Con/fusion)](1997)
이 글은 도나 헤러웨이(1990)의 ‘싸이보그’ 형상을 끌어와 쓰고 있다. 싸이보그는 인간의 살과 기계가 섞여있는 인간성의 변형체를 말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싸이보그 주체는 인터넷 상의 상호역할게임을 하는 주체이다. 칼로스키는 도발적으로 이 게임을 하는 동안 이뤄지는 성적 상호작용은 인터넷에서뿐만 아니라 실재 생활에서도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재발명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칼로스키는 어떻게 이와 같이 비록 인터넷 싸이트 게임 참여자들이 (열개의 성별 선택 사항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성행위를 하게 될 경우 스스로 남자 혹은 여자 역할에 한정해서 역할선택을 하지만, 이같은 역할이 존재하는 방식, 참가자들이 성적으로 다른 참가자들과 참가자 스스로의 실제 자아를 뒤섞는 방식이 잠재적으로 (양)성애와 성적 차이의 의미에 의미심장한 효과를 가진다고 보고 있다. 칼로스키는 이 효과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에게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모양 바꾸기 이야기는 이미 실제 삶에서의 정체성과 욕망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감염이 어떤 식으로 퍼질지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성애의 미래는 여전히 예측되지 못하는 것이다.
가상 양성애
이 다음 부분에서는 나는 가상 싸이버 도시에서 발달하고 있는 특정 형태의 싸이보그에 눈을 돌렸다. 이 글 전체에서 나는 (i) 가상성(virtuality)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서, (ii) 좀 더 광범위한 관객들에게 새로운 용어(terminology)를 소개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몇 잘 알려진 가상세계 규념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1991년의 ‘잔디깎는 남자’같은 영화에서처럼) 그림과 도형(graphic)의 가상적 현실과 달리 이 가상현실은 글자를 통해 생성된다. 그 말은 즉, 모든 상호작용이 화면을 따라 내려오는 글자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몸들, 성별들, 성행위들(sex acts), 섹슈얼리티들은 언어를 통해 재형성될 수 있다. 둘, 셋, 넷, 그 이상의 컴퓨터 사용자들이 가상적 몸을 취해 거기에 성격과 개성을 불어넣고 서로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을 바로 그 시간에 동시에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몸이 없는 환경에서는 성행위(sex)가 가장 마지막에 생각되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성행위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첫째로 사람들이 다중대상가상세계(Multi-Objects-Oriented, MOOs)에서 서로 소통하는 방법이다. 거기엔 성행위를 위한 많은 공적, 사적 방들이 있고 대화는 항상 ‘안녕... 예쁜이, 엉덩이에 한 번 씹해줄까...’는 식으로 거칠진 않지만, 가끔은 그렇게도 진행된다. 사람들이 여기서 자신의 특징 (10가지 중 선택 가능한) 성별을 선택하고 원한다면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 하나의 성별 이상과 성행위를 한다는 생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성/성별이 변이되는 공간에서 양성애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당신의 여자 애인이 실제 삶에서는 남자라면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상세계는 양성애의 천국인가?
나의 관심은 글자를 바탕으로 한 가상현실이 양성애 싸이보그 주체가 실험되어질 수 있는 공간-심지어 실험실-으로서 읽혀질 수 있는 방법에 있다. 나는 싸이버공간(cyberspace)에서 이뤄지는 언설(narratives)이 섹슈얼리티, 성별, 육체성(corporeality)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위해 가상세계를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고 본다. 정체성을 내세우고 동시에 그것이 무너지는 바로 그 사이의 연결지점이 양성애 싸이보그를 예리하고 정치적인 형상으로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재조합된 양성애 (The recombinant bisexual)
가상세계에 대해 비관적인 전문가들 중 하나인, Arthur Kroker는 Michael Weinstein과 함께 쓴 글에서 ‘재조합된 몸(the recombinant body)’이라는 규념을 만들어 내었다 (Kroker and Weinstein, 1994).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싸이보그와는 다른 은유적 그리고 전자적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다: 싸이보그가 몸과 기계(인공두뇌적 유기체)의 융합(fusion)인 반면, 재조합된 몸은 몸과 정보로 구성이 되어 실제세계에서가 아닌 싸이버공간 어디쯤에서만 존재하거나 혹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글에서 재조합된 몸을 별개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싸이보그의 한 유형으로서 위치시키려 한다.
Julie M. Albright(연대미상)의 ‘글자 바탕 가상세계 속의 양성애 정체성의 등장’이라는 글에서 줄리는 온라인 여성 양성애 모임에서 양성애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에 관심을 두었다.
어떤 면에서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싸이보그인가? 한편에서 이들은 양성애 정체성을 발달시키기 위해 몸과 기술(technology)을 조합하고 있고, 이것이 이들을 싸이보그 양성애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또 한편에서 이 온라인 이메일 리스트는 스스로 양성애 여성이라고 정체화한 이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섹슈얼리티와 성별 분류 둘 다 가상세계 밖에서 확립된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참가자들이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자신의 정체성을 ‘재활용’하기 때문에 (Turkle, 1995) (싸이보그는 인간에 가까운 로봇과 똑같이 형태지워지지 않아도 되므로) 이 성적, 성별적 정체성들은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전에 이들이 어떻게 정체화되었던 상관없이 이 가상토론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양)성애정체성은 몸, 기계, 정보로 인해 양성된 것이 되었다.
올브라이트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하는 언설을 통해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을 사용하고 있다. 그녀는 양성애 여성 (bi-wimmin)이 새로운 형태의 양성애 정체성의 언설을 가상세계 참여자들을 통해 경험하고; 그것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각들을 생성하는 양성애 여성들이 함께 모여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싸이버공간의 참가자들이 특정한 효과를 생산하는 그런 곳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이곳은 가상세계의 상대적인 익명성이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열어놓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이 가상적 공간은 현실세계에서는 금기인 비-일대일 관계에 대한 생각들을 즉각즉각 가능하게 한다. 셋째, 가상세계에서는 글자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양성애 정체성에 대한 어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양성애의 언어적 가시성을 위한 노력이 진행된다. 그리고 넷째, 이것이 올브라이트가 싸이보그 혼/란(con/fusion)의 방식으로서 상당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인데 직접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싸이버 공간의 반-구조(anti-structure)는 ... 이상적 낙원(utpoia)에서부터 프로그램까지 대안적 삶의 모델의 다수성(plurality)을 생성하고 저장할 수 있고, 이것은 주류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역할에서 .... 급진적 변화의 방향으로 이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Albright, 1996(?)).
‘양성애 여성(Bi-Wimmin)’의 참가자들은 그것이 어떻게 협상가능하든 간에 어떤 종류의 정체성을 가정하고 있다. (대부분) 자신의 진짜 이름을 쓰고, 리스트의 목적은 어떤 면에서는 ‘진짜’ 성적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다. 다중대상가상세계에 로그온한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환상(예, 동물 형상물을 창조하는 것 같은)이나 관심(예, 포스트모더니즘)같은 공통의 관심사라는 연결지점을 가진다. 그러나 대체로 참가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지 않고 자신의 수행을 혼란스럽게 하고 뒤섞으려고 한다.
성과 성별로 되돌아가서
양성애 싸이보그는 가상세계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 가상세계와 양성애에 공통된 두 가지 관심은 성과 성별이다.
이쯤에서 가상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데 뭐가 컴퓨터 성행위냐?’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의 대답은 글자만이 모든 것이고, 성행위는 당신이 쓰는 말만큼 안정되거나 난폭할 수 있는 세계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대답은: 컴퓨터 성행위는 몸의 한 부분으로 (대체로 한 손의 손가락들) 자판기로 화면에 글자가 뜰 수 있도록 하고, 당신의 몸 다른 부분들에 성적인 쾌락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넷 위에서 자위하기’라는 말로도 잘 알려져 있다 (Butterworth, 1996).
자위로의 이탈 (A digression into masturbation)
교감하는 가상 성행위에서 자위는 어떻게 재규정되는가? 현실세계에서의 상호 자위적 행위와 다르게 가상세계에서는 하나의 몸과 둘 혹은 그 이상의 성적 파트너들이 있다. 당신 자신의 피부가 당신 자신의 피부를 만지지만 당신 손가락들 끝의 욕망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선으로 연결된 자위는 싸이보그 친밀의 시작이다. 무슨 새로운 (양)성애적 행위를 기술(technology)이 생성하는 것인가?
성별과 양성애의 관계는 가장 복잡한 지점이고 사실 어쩌면 혼/란의 지점이다. 양성애자들 사이에서는 성별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 ‘성별은 무관하다’ 혹은 사람들 사이의 그 같은 무의미한 차이는 무시해도 된다. 이 입장을 취하는 양성애자들은 ‘사람을 사랑한다’. 둘째, 양성애자들은 정확하게 -양성애적-이지 양성별적이지 않고, 양쪽의 성에게 끌릴 뿐이지 비슷한 성별적 특성에게는 끌리지 않는다. 클레어 헤밍스가 최근 영국의 대화프로그램 킬로이(Kilroy)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번 둘러보러 나갈 때 어떤 성(sex)이든 나는 가죽 재킷에 부치 태도를 가진 사람을 찾는다’. 셋째, 성별은 변이가능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특정한 차이를 인지하고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짐! 성별이었어. 그런데, 우리가 알던 그런 식으로가 아니야
람다(Lambda)에는 열 가지의 ‘포장되어 나오는’ 성별이 완전한 대명사로 제공된다. (현실 세계와 같은) 남자, 여자; (성별이 모호한) 스피박; 중성;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그것’인) 스플랫; 왕/완전; 제멋; 두 번째; 그리고 복수(plural) 등이다. 이 중 가장 인기있는 것이 프로그램 책을 쓴 마이클 스피박(1990)을 따라 지은 성별 ‘스피박’이다. 이것은 탈성별(post-gender)의 장소; 성별 딱지들에 압도되어서 인지가능하고 성별의 정의가 무의미해지는 환경인가? 한 번 보자....
(람다에서는 손님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공적인 성행위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 여기서 10개의 성별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지 어떤 성별도 선택안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람다에서 어울리기 위해서는 스피박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다. 남자이거나 여자여야 하는 것이다.) Anne Balsamo에 따르면:
싸이버 공간은 백인 남자에게 그들의 문화적 부담감에서 잠시 유혹적인 휴식을 제공한다. 싸이버공간의 허구의 이야기는 진부한 살덩어리로서의 몸을 떨궈내는 환상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허구는 몸에 기반한 차이와 지배의 체계를 근절하지는 않는다.
(Balsamo, 1995)
나는 간단하게 양성애의 의미에 영향을 주는 가상세계의 싸이보그 성별에 대한 세 가지 측면을 규정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성별을 선택할 가능성은 열려져 있다. Sherry Turkle이 가상세계 정체성에 대해 한 연구는 성별 놀이 경험의 기간에 주목한다 (Turkle, 1995).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성별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동시에 변이적인 것이다: 이 말은 가상적 드랙(drag)은 주체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다중대상성행위가 흔한 것이 되면 많은 가상세계 속의 일반(straight) 참가자들은 가상의 동성 성행위를 갖기 위해 성별을 바꾼다. 이것은 양성애에 대한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기계 속의 성행위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고무시키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둘째, 다른 참가자들의 현실세계 성별을 만드는 참가자들 사이의 중요성. ‘너 남자니 여자니?’ 혹은 ‘너 정말 여자니?’라는 것은 말을 처음 걸 때 하는 익숙한 질문이다. 이렇게 분류에 집착하는 것은 오직 단순반응인 것일까? 그것은 또한 성별의 다른 의미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세계에서의 ‘진정한’ 표현과는 모순되고 대조되는 가상세계에서의 정체성 표현으로서의 성별말이다. 성별을 고착화하려는 시도의 행위자체가 결국 성별이 변이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 번째 지점은 다중대상 가상세계에서 상투적 성별의 유행과 관련되어 있다. (파멜라 앤더슨이 실베스타 스텔론을 만나다와 같은) 상투성의 극단은 현실세계 성별의 가상세계로의 이동이 아니라 게이 여왕, 부취-펨 레즈비언의 형태 속에서 새로운 성별의 연결점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두 성 모두와 씹하고 싶다/욕망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레이텍스(laytex)와 폰섹스와 싸이버섹스가 성적 차이를 대체하고 있고 새로운 성감대를 생산하고 있는 때에 양성애는 무엇을 의미할 있는가?
로그오프를 하면서...
.... 그러나 람다에 와서 나를 만나서, 내게 말을 걸고 myx에게 메시지를 남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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