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여성주의 안에서 그리고 레즈비언/게이 이론 안에서 양성애에 관한 이해는 그다지 되어 오지 못한 가운데 양성애는 '박쥐'같은 존재로, 정체성의 경계를 흐리고 정체성의 정치학을 흔들어 아직도 열악한 상황에 있는 동성애 진영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는 존재로, 그리고 때로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성적 경계 (Constructive Boundary) 혹은 완충지대 (Buffer Zone)로 인식되는 등 혼란 속에 있어왔다. 본 강좌는 [양성애: 비판적 읽기 (Bisexuality: a ciritical reader)] (멀 스토 Merl Storr, 1999)의 중심 내용을 번역해 읽고 이것을 통해 서구 퀴어여성주의 안에서의 양성애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고 한국사회에서 이것이 제시하는 의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강좌의 구체적인 흐름은 아래와 같다.
I강: 양성애 개념의 계보 (Genealogy of the concept of bisexuality)
1. 헨리 헤블록 엘리스:성심리 연구 1권(1987)과 2권(1915): 성도착 (Henry Havelock Ellis: Studies in the Psychology of Sex, Volume I: Sexual Inversion과 Volume II: Sexual Inversion)
2. 지그문트 프로이드:섹슈얼리티에 관한 세가지 에세이 (Sigmund Freud: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1. The Sexual Aberrations)
3. 윌헬름 스테켈: 양-성애적 사랑 (1920) (Welhelm Stekel: Bi-Sexual Love)
4. 알프레드 킨제이, 워델 폼로이, 클라이드 마틴: 남성의 성적 행위(1948) (Alfred C. Kinsey, Wardell B. Pomeroy and Clyde E. Martin: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
5. 프리츠 클레인: 양성애적 선택: 백퍼센트 친밀함이라는 개념 (1978) (Fritz Klein: The Bisexual Option: A Concept of One Hundred Percent Intimacy)
6. 아만다 우디스-케슬러: 킨제이 공식과 섹슈얼리티의 측정에 관한 기록 (1992) (Amanda Udis-Kessler: Notes on the Kinsey Scale and Other Measures of Sexuality)
II강: 양성애 정체성 그리고 양성애적 행위 (Bisexual identity and bisexual behaviour)
7. 필립 블럼스테인, 페퍼 슈와츠: 양성애: 사회심리학적 사안 (1977) Philip W. Blumstein and Pepper Schwartz: Bisexuality: Some Social Psychological Issues)
8. 제이 엠 케리어: 멕시코 남성 양성애 (1985) (J.M. Carrier: Mexican Male Bisexuality)
9. 와이어싯 시티라이, 팀 브라운, 씨라폰 버룰락: 태국의 양성애 유형 (1991) (Wiresit Sittitrai, Tim Brown and Sirapone Virulrak: Patterns of Bisexuality in Thailand)
10. 수 조지: 여성 그리고 양성애 (1993) (Sue George: Women and Bisexuality)
11. 잔 클로센: 내가 처한 흥미로운 상황 (1990) (Jan Clausen: My Interesting Condition)
12. 마리아나 발버드: 성, 권력 그리고 쾌락 (1985) (Mariana Valverde: Sex, Power and Pleasure)
III강 양성애적 인식론 (Bisexual epistemologies)
13. 조 이에디: 양성애 활성화하기: 양/성애 정치학을 향해 (1993) (Jo Eadie: Activating Bisexuality: Towards a Bi/Sexual Politics)
14. 마조리에 가버: 역으로: 양성애와 일상의 에로티시즘 (1995) Marjorie Garber: Vice Versa: Bisexuality and the Eroticism of Everyday Life)
15. 마리아 프라마지오레: 울타리의 인식론 (1996) (Maria Pramaggiore: Epistemologies of the Fence)
16. 야스민 프라부다스: 양성애인과 혼혈인: 변화의 중재인 (1996) (Yasmin Prabhudas: Bisexual and People of Mixed-Race: Arbiters of Change)
17. 엘리자벳 다우머: 퀴어윤리학 혹은 레즈비언 윤리학에 대한 양성애의 도전 (1992) Elisabeth D. Daumer: Queer Ethics: or, the Challenge of Bisexuality to Lesbian Ethics)
18. 길버트 허디트: 양성애의 문화적 속성과 유동성에 대한 논평 (1984) (Gilbert H. Herdt: A Comment on Cultural Attributes and Fludity of Bisexuality)
19. 앰버 올트: 모호하지 않은 성/젠더 구조 안에서의 모호한 정체성: 양성애 여성 (1996) Amber Ault: Ambiguous Identity in an Unambiguous Sex/Gender Structure: The Case of Bisexuality Women)
IV강 차이 (Differences)
20. 헬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1975) (Helene Cixous: The Laugh of the Medusa)
21. 클레어 헤밍스: 양성애 정체성 위치잡기: 양성애 담론과 현대 여성주의이론 (1995) Clare Hemmings: Locating Bisexual Identities: Discourses of Bisexuality and Contemporary Feminist Theory)
22. 앤 칼로스키: 싸이보그와 만나는 양성애: 정치, 쾌락, 혼/란 (1997) (Ann Kaloski: Bisexuals Making Out with Cyborgs: Politics, Pleasure, Con/fusion)
V강 양성애: 퀴어 메스티자 (Bisexuality: Queer Mestiza)
- 글로리아 안잘두아: 경계지대: 새로운 메스티자 (1987) (Gloria E. Anzaldúa Borderlands/La Frontera: The New Mestiza)
- 총토론: 양성애: 퀴어 메스티자 (Bisexuality: Queer Mestiza)
Merl Storr는 이 책의 의도를 양성애 개념들, 양성애의 의미와 양성애 개념 사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주요 논쟁 영역들에 대한 소개라고 두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지점들은 첫째, 양성애 개념에 대한 재질문, 둘째, 각 개념이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현재 논쟁에 (여전히) 관계되는지, 셋째,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거나 지금까지의 개념들이 이것을 선폐할 가능성과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의 발견이다.
책의 모든 장들을 아우르고 있는 질문은 ‘무엇이 양성애인가?’ 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두 부분의 질문: (1) 양성애는 무엇으로 구성되나?; (2) 이것이 가지는 두(양)요소들-남자/여자(maleness/femaleness),남성성/여성성(masculinity/femininity),이성애/동성애(heterosexuality/homosexuality)의 관계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로 이어진다.
(1) 양성애는 무엇으로 구성되나? 즉, ‘양’의 양은 무엇, 무엇이 더해진 양인가?라는 질문에는 세 가지 대답이 가능(Bowie, 1992)하다.
첫째, 양성애는 생물학적 혹은 해부학적 측면에서의 남자와 여자로 구성. 따라서 남성의 유두, 여성의 얼굴털 등을 양성애의 신체적 특징으로 봤음. 의학, 성과학 등에서 19-20세기 초에 사용. 예) 헤블록 엘리스
둘째, 양성애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성됨 (예, 프로이드
셋째, 양성애는 이성애와 동성애로 구성됨.
둘째, 셋째의 정의가 첫째보다는 더 넓고 오래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은 특히 셋째의 정의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음. 이런 정의의 전환은 1970년대 일어난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1960,70년대의 동성애 해방운동과 1973년 미국의 심리학전문가들 지침서 “정신장애진단과 통계편람”의 ‘공식적인’ 성적 병리 목록에서 동성애가 제외되는 것에서 큰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여진다.
부적당하게 성별화된 욕망-남자가 남자를 원하는 욕망(feminen desire), 여자가 여자를 원하는 욕망을 갖는-으로 고려되었던 것이 수정된 것. 남자를 욕망하는 욕망은 언제나 여성적이고(femininity), 여자를 욕망하는 욕망은 남성적(masculinity)이라는 것이 도전받기 시작 (Butler, 1990, 1993; Weeks 1977). 이제는 이 도식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음. 대신 이성애, 동성애 구도로 정의가 이동. 그러나 1970년대 이후의 이 전환이 완벽이 이뤄진 것은 아님. 여전히 성소주자 담론 밖에서는 뒷덜미를 잡고 있는 지점.
*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지점
남자 -> 여자를 욕망 남자(femininity) -> 남자를 욕망
남자 (masculinity) -> 남자욕망 masculinity적 욕망 / femininity적 욕망
masculinity 가 masculinity를 욕망
여자 -> 남자를 욕망 여자 -> 여자를 욕망 여자 -> 여자 욕망
femininity 적 masculinity적 욕망 femininity가 femininity 욕망
(2) 무엇이 양성애인가의 두 번째 질문은 양성애에서 ‘양’요소들간의 관계에 대한 것. 즉, maleness/femalenes, masculinity/femininity, heterosexuality/homosexuality 사이의 관계이다. 양성애는 이 두요소들간의 조합(combination)인가? 이 두 혼합의 정도는 측정될 수 있는 혹은 없는 것들인가? 아니면 양 요소 중 각각이 한 선상의 양극단 지점에 있고, 양성애는 이 선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인가? 양성애는 이성애와 동성애를 분리하며 이들의 경계를 표해주는가? 아니면 되려 이 둘을 통합하는가?
2부에서는 양성애 정체성과 양성애적 습성에 대한 내용이 ‘양성애적’이란 개념이 개인들, 집단들, 습성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것에 주목하는 글들이 실렸다. 이 글들은 주로 경험적 연구에 기반해 있고, 상례적으로 정체성과 습성을 구분하고 있다. 정체성과 습성적 행위를 구분하는 것, 즉, 양성애적 욕망을 가진 적이 있거나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할지라고 스스로를 양성애자라는 정체성으로 정체화하지는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이 구분은 너무 양분법적인 인식이라 간주될 수 있고, 무차별적으로 사용될 경우 인간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협소하게 여기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정체성과 습성이 인간 섹슈얼리티의 모든 측면도 아니다. 환상(fantasy), 정서적 유대 등의 요소도 섹슈얼리티 안에 있기 때문이다.
Klein Sexual Orientation Grid(KSOG, 클레인 성적 지향측정판)에서는 환상, 정서적 유대감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성감대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어떤지의 여부, 즉, 자신의 성적 혹은 관능적 이미지, 자신의 상대방 파트너를 형성하는 중요한 지점들이 여기에서도 간과되었다.
많은 경험적 연구들이 성감적(erotic)인 지점을 성욕적(혹은 성관계적)인 것과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있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개념화할 수 있는 좀 더 상상력있는 가능성들, 방법들을 선폐해 버린다.
양성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촉발했던 사건이 1980년대 후반 AIDS의 발견, 전염병학자들, 보건전문가들은 에이즈 확산에 남성 양성애자, 특히, ‘드러내지 않은(closeted)' 이들이 에이즈확산에 큰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급연구활동. 에이즈와 관련해 더 안전한 성행위, 보건홍보물 등을 위한 연구가 양성애적 정체성과 행위(섭성)에 대한 연구에 주를 이룸. 이로 인해 양성애 관한 연구는 전부 남성 양성애에 관한 것.
여성 양성애에 관한 연구는 연구기금도 거의 없다. 따라서 연구수위도 낮다. 때문에 비교연구나 국제연구결과가 드물다.
남성양성애가 HIV 관련 연구 응답자의 주를 이룬 반면, 주로 여성양성애가 양성애 정치학과 양성애 이론에 관해 연구자거나 응답자가 되어왔다. 여성주의 운동과 여성학 덕분에 양성애 인식론은 공공연한 여성주의자들이거나 여성주의 이론에 고무받은 것이었다.
추상적인 인식론이 최근의 양성애 연구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인식론에 대한 요구는 양성애자들 자신이 ‘잘못 맞추어졌고’ 혹은 ‘외부자’라는 느낌을 갖으며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이성애/동성애 구분에 깔끔하게 들어갈 수 없다는 불편함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양성애학자들은 이성애/동성애 분류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적대감을 가졌고, 또 어떤 학자들은 분류와 분류화 자체를 의심했다. 이 책의 양성애 인식론에 실린 글들은 바로 이 분류화와 그것에 대한 불만(discontents)을 주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분류화의 일반적 원칙에 주의하며, 그것이 양성애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거나(하고) 양성애 자체가 이미 분류화 자체를 특이 이성애/동성애의 분류화에 본질적인 위협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양성애나 양성애자가 ‘타자’ 혹은 정체성들과 공동체들의 테두리를 정하는 표식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Rust(1995)는 미국에서의 연구에서 양성애 학자들이 분류화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지점은 분류화, 특히 이성애/동성애 분류 속에서 양성애자들이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어떤 다른 존재로서 배제된다는 것에 있다. 배제는 양성애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사람들이 많이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성애적 행위(습성)를 영위하지만 양성애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지 않는 이들은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에 대해 어떻게 느낄 것인가? 이는 어떤 인식론적 지평을 여는 것인가?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은 여전히 중요할 것이고, 그 구분이 쾌락의 한 원천일 수도 있고, 성애적(erotic) 삶에서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양성애로서 혹은 양성애가 아닌 것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은 차이에 대한 문제이다. ‘차이’라는 개념은 특히 여성주의 안에서의 논쟁의 핵심에 있어왔다. 차이, 다양성, 다중적 관점에 대한 인정은 차이(들)을 교정되거나 위계적인 사회적 구분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상호교차(intersecting)하며, 지속적인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게 한다.
레즈비언들이 때로 양성애와 양성애자들을 향해 보이는 크고 작은 적대감은 ‘양성애’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레즈비언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양성애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다른 성적 범주들의 구성적 경계(constitutive boundary)의 개념으로 보는 관점은 이 책 3부의 핵심 관점이다.
양성애 인식론은 대체로 분류화에, 특히, 양분법적 분리와 이원적 사고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몇몇 학자는 현혹적이라거 고정된 분류화만 아니라면, 어떤 맥락에서는 분류가 필요하거나 유용할 때도 있기 때문에, 특정 맥락에서는 양성애자들이 분류를 원칙적으로 거부하기 보다는 가능한 분류들을 확대함으로써 포함될 수도 있도록 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Colker(1996)는 분류를 사용하지 않고서 양성애자들이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평등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싸울 방법은 현 법체계 안에서는 없다고 주장한다. 몇몇 학자들은 양성애가 근본적으로 분류화를 불편하게 방해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양성애 개념은 다른 분류들이 사라지게 하기 보다는 다른 종류의 분류들 사이에서 ‘완충지대(buffer zone)'가 되줌으로써 그것들이 서로 다른 분류들 속으로 희석되버리지 않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해준다고보기도 한다. 그러나 반분류화적 양성애 인식론이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인식론적 개념으로서의 양성애의 잠재적인 전환적 효과는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했거나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라는 공식 속에서 파괴되고 있다.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와 양성애적 인식론 사이의 갈등은 이 논쟁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I부 양성애 개념의 계보
1. 헨리 헤블록 엘리스(Henry Havelock Ellis): [성심리연구: 성도착1권(1987), 2권(1915)]
헨리 헤블록 엘리스는 양성애에 대한 선조격 개념을 만든 사람이고, [성심리 연구:성도착](1987)에서 양성애에 대한 언급. 양성성(bisexuality)을 ‘성심리적 자웅동체’로 본 크래프트-어빙(독일인)의 분류를 따름. 한 생물학적 종에서 두 생물학적 성(sexes)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양성성을 사용. 한 몸에서 드러나는 남자/여자의 특성이 둘 다 있다는 것을 의미.
[성심리연구 II] (1915)에서 양성애 개념 변화. ‘성심리적 자웅동체’를 버리고 성적(sexual) 이형성과 남성/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아우르는 의미로 ‘양성애’를 사용하기 시작. 이어 이 의미로서의 개념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통용되던 개념으로 자리잡았음.
엘리스는 이성애/동성애/양성애 분류가 실제 삶에서 딱 떨어지게 나눠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매우 힘들고, 따라서 이것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거의 무의미하다고 피력.
[성심리 연구 I: 성도착] (1897)
남성의 성도착
어린 아이에게서 최초의 성본능이 나타날 때는 이후에 그렇게 되듯이 특별히 특화되는 것이 없다. 특정한 성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성적 대상도 분명하지 않다. .... 성본능이 점점 강해지면서 그리고 가족이나 친족바깥의 세계에서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울리면서 사춘기를 지나는 대다수 남자아이들의 성본능이 자리잡는 경로인 보통의 경로로 향한다. 이것이 진정한 성적 도착자라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몇몇은 대체로 다소 덜 발달된 성본능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다. ... 나는 단순한 도착과 첫째 등급은 동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개인들로, 둘째는 양성 모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이들로 대체로 불려지듯이 성심리적 자웅동체 사이의 임상적 구분 이상의 복잡한 분류화를 제안하지는 않는다.
성심리적 자웅동체
이것은 양쪽 성에 모두에게 끌리는 ‘성적 도착’에 붙여진 다소 이상한 이름이다. 이 형태는 단순한 도착보다는 분명히 덜 나타난다. 이들은 성적 쾌락과 만족을 남자와 여자 둘 다와 가지는 이들인데 어떤 경우에는 동성애적 본능이 이성애적 본능보다 훨씬 더 강한데, 이 경우는 단순한 도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도착자들이 이성에게 가짜로 끌리게 하는 많은 자극들과 동기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애적 본능이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동성애적 본능이 분명히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여성의 성도착
남자아이들처럼 여자아이들에게도 사춘기 전개 과정에 있는 학교에서 동성애가 처음 나타난다. 이는 지엽적으로 혹은 중심적으로 시작된다. 이는 두 아이가 한 침대에서 가까이 누워 서로를 만지거나 입맞추면서 길러진다. 이것은 가짜 동성애의 일종인데, 이것은 거의 보통의 본능에서 비롯된 조숙한 놀이에 불과하며, 진정한 성도착과는 어떤 관련도 없다. 생래적으로, 동성애적 경향이 있는 여아들에게서는 이것이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대다수는 이런 경향에 대해서 보통의 성적 사랑의 대상이 나타날 때 수치감을 느끼면서 가능한한 잊혀질 것이다.
성도착 이론
성의 발달과 각 성에서 잠재적인 자연스러운(organic) 양성애의 발달을 되짚어 보면 비정상성의 특성을 보다 잘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성발달 초기에는 서로간의 구분이 잘 되지 않고 삶 전반에서 초기 성집단(community of sex)의 흔적이 남는다. ... 성적으로 도착된 사람은 이성과의 이러한 집단성원으로서의 과도한 표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착된 사람들은 이성과의 보다 미미한 육체적/정신적 접촉을 한다. 이 문제를 순전히 추리적으로 다룬다면 잉태될 때는 50퍼센트의 남성발아와 50퍼센트의 여성발아를 가지고 있고, 발달하면서 다른 성의 발아를 죽이고 성숙한 개체로 발달했을 때는 이성의 발아가 조금 남게 된다. 동성애적 사람들과 성심리적 자웅동체 사람들에게서는 원래의 남성 혹은 여성 발아의 몇몇 특징 측면에서 이 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정상적 성충동 보다는 도착적 행위에 더 걸맞는 양태로 틀어지게 된 사람이 있게 되거나 정상적, 도착적 성충동을 모두 가지는 사람이 있게 된다.
성심리연구 II (1915)
성생활의 기본적 근간이 양성애적이라는 합당한 관점을 받아들이면-이후 이른 시기에 이것이 동성애 혹은 이성애로 굳어지게 되겠지만-동성애자들에 대해 어떤 확정성을 가지고 말하기란 힘들다. 구분은 이성애적 대상을 두고도 별 감흥이 없을 만큼 강한 동성애와 이성애적 대상이 있을 때는 이것에 의해 사라지는 약한 동성애 사이의 구분일 것이다. 이는 강한 동성애(spurious homosexuality)와 유사 동성애(pseudohomosexuality)의 구분으로 둘 수 있다. 이들 중 오직 이성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게 아니면서도 오직 동성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이들과 이성과 동성 양쪽 모두에게 끌리는 이들은 구분된다. 전자는 동성애자이고 후자는 크래프트-어빙의 개념에 따르면 심리적 자웅동체인 양성애자이다. 따라서 성적으로 기능하는 사람들을 넓고 단순하게 세 집단으로 나누자면 이성애자, 양성애자, 동성애자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분명히 이성애자라고 간주되는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과 분명히 동성애자라는 표시가 결정적으로 나는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이성에게 끌린 경험이 있거나 이성과 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성인양성애자들 중의 다수는 동성애적 경향을 이성애적 경향보다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손잡이 중에 원래는 왼손잡이였거나 왼손을 주로 쓰는 사람이 많은 경우와 흡사하다 하겠다. 따라서 동성애/양성애/이성애 구분은 이만큼이나 과학적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2.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성이론에 관한 세 가지 에세이: 1. 성적 도착)] (1905)
프로이드는 ‘세 가지 에세이’에 대한 수정작업을 계속했다. 따라서 그의 개념들도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했다. 양성애에 대한 논의에서 이 점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양성애 개념은 프로이드 사상의 주춧돌격이었으나 한 번도 그 위치로서 유형화되지는 않았다 (Bowie, 1992). 프로이드는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Wilhelm Fliess와 양성애 개념을 누가 먼저 유형화했냐에 대해 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플리스가 자신의 개념이라는 인용을 프로이드가 하지 않았다고 몹시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Garber 1995; Masson 1985). 이후 프로이드는 그 자신의 양성애 개념 계보를 만들어 이를 반박했다.
그의 글에서 ‘양성애’ 개념은 모호하고 그것도 대부분 동성애(혹은 ‘성도착’)에 대한 논의의 부분에서 다뤄졌다. 양성애를 한 몸 안의 남/여 요소의 혼합이라고 보았던 성과학자들(Havelocl Eliss, Kraft-Ebing)과 달리 프로이드는 성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성애적 기질(bisexual predisposition)이 있다고 보았다. 후의 연구에서 그는 각주를 통해 모든 인간은 양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며 여기에서 동성애, 이성애가 이후 발달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마치 양성애가 진화기의 전반부에 위치한, 따라서 마치 이성애나 동성애보다 ‘원시적’인 인간의 기질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Russelt, 1989; Storr 1997). 프로이드는 여전히 양성애가 무엇이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세 가지 에세이’에서 양성애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합이라고 보았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혼합으로는 보고 있지 않다. 작업기간 내내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 자체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었다. 프로이드에게도 양성애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미스테리였다.
양성애
도착과 신체적 자웅동체는 서로 무관한 독립적 요소이다.
양성애 이론은 ‘남성적 몸 안의 여성적 뇌(feminine brain in a masculine body)'라고 남성도착자를 일컫는 말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여성적 미‘란 어떤 기질을 말하는 것인지, 성기능을 주관하는 뇌의 부분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느 것도 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보기란 힘들다.
성도착자의 성적 대상
심리적 자웅동체 이론은 성도착자의 성적 대상은 보통 사람의 성적 대상과 반대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도착 남성은 남자를 찾는 여자와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부분 실상과 다르다. 상당한 경우 남성도착자는 남성적이고 오히려 여성적 성향을 성적 대상에서 찾는다. 예로써, 고대 그리스 성인 남성들이 소년애를 한 것은 소년이 남성다워서가 아니라 소년이 여성적-수줍음, 얌전함, 이끌리기를 바라고 도움받기를 좋아하는-성향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성적 대상은 동성 자체가 아니라 동성적 요소와 이성적 요소, 즉, 양성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이였고 따라서 대상의 몸(예, 생식기)이 남성적이어야하는 한편 이것은 남자를 추구하는 마음과 여자를 추구하는 마음 사이의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성적 대상은 일종의 주체 자신의 양성애적 기질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여성의 경우는 덜 모호하다. 적극적 여성도착자는 신체적, 정신적 양 측면에서 남성적 성향을 드러내고 여성적인 성적 대상을 추구한다.
E. Gley는 1884년에 최초로 양성애를 도착에 대한 하나의 설명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도착을 발달 기간 겪은 방해의 결과로 본다. A Dr Arduin(1990)은 모든 인간은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고, 이성애자의 경우는 이 중 특정 성향이 비교안되게 훨씬 강하게 발달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 글(프로이드)의 영문 번역자인 James Srachey에 따르면 양성애의 중요성에 대해 프로이드가 인식하게 된 것은 사실 Fliess 덕분이었으나 프로이드는 양성애가 억압의 설명을 제공한다는 Fliess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신분석연구는 동성애를 어떤 특정한 종류의 인간집단으로서 간주하고 이들을 나머지 집단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어떤 시도나 태도에도 반대한다. 성적 흥분(반응)(sexual excitation)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정신분석연구는 모든 인간이 동성을 성적 대상으로 취할 수 있고 무의식적으로는 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동성에 대한 성충동적 애착은 이성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한 개인의 정신적 삶에 큰 요소로서 작용하고 또 질병의 동인으로서 더 큰 역할을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선택 대상은 성에 상관없이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대상으로 삼으며- 아동기나 원시사회, 역사초기에 찾아볼 수 있듯이-이것은 어느 한 방향으로 제한되고 한정된 결과로서 정상이 되거나 도착으로 발달하거나가 그 기본인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성적 관심을 갖는 남자들도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화학반응적 끌림에 기반한 자명한 일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한 개인의 최종적인 성적 태도는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는 결정되지 않는데 그 결정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여러 가지 요인들의 결과이다. 이 중 어떤 요인들은 구조(구성)적인 것이고, 어떤 요인들은 우연적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중 몇몇 요소들은 아주 비중있는 영향을 미치게 되어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Ferenczi(1914)는 많은 경우 그저 도착적이라는 공통성 때문에 많은 경우의 상황들이/조건들이 ‘동성애’(혹은 Ferenczi의 말을 따르면 동성에로티즘)로 치부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적어도 스스로 여자같이 느끼고 행동하는 ‘주체동성-에로틱(subject homo-erotic)'과 완전히 남성적이면서 단지 성적 대상을 여자에서 남자로 대체했을 뿐인 ’대상 동성-에로틱(object homo-erotic)'의 경우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둘 중 전자가 진정한 ‘성적 중간자’이고 후자는 강박적 신경증으로 묘사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존재외에도 어느 정도의 ‘주체 동성-에로티즘’과 어느 정도의 ‘대상 동성-에로티즘’이 함께 나타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3. Wilhelm Stekel: [양성적 사랑](1920)
윌헬름 스테켈(1920)의 [양성적 사랑]은 [자위와 동성애(masturbation and homosexuality)]로 출간된 원고가 1922년 영어로 번역되면서 알려졌다. 정신분석학자 스테켈은 스스로를 프로이드의 후계자 중 하나로 표방하면서 그의 작업이 프로이드의 생각들을 발전시킨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몇가지 점에서 그는 프로이드와 현격히 달랐다(Garber 1995). 프로이드가 어렴풋이 양성애를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두면서 양성애 개념을 조심스럽게 다뤘던 반면 스테켈은 과감하게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양성애적이고 극단적 이성애 혹은 동성애같은 단성애(monosexuality)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 그가 양성애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합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의 혼합과 함께 어떤 복잡한 것으로 이해하려했던 프로이드의 도식화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묵적으로 이런 시각의 변화를 통해 스테켈은 양성애의 모호성을 해결하기 보다는 옆길로 샌 것이다. 단성애가 비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도 공평하게 되지 않았는데, 이성애와 동성애 둘 다 잠재적으로 신경즉적 비정상 상태이지만 동성애가 훨씬 더 신경증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에 프로이드가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프로이드의 것이라고 알려진 모든 것이 프로이드 자신이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 중 상당부분은 그의 후계자들의 오해와 잘못된 해석에 따른 것이다. 이 글에서 스테켈은 프로이드의 사고가 다른 이들에 의해 어떻게 취해졌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본래’ 양성애적이거나 ‘양성애적’으로 태어난다는 광범위하게 알려진 관점을 정연화하고 있다.
‘양성애’가 동성애와 이성애의 혼합이거나 이 둘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때 정신분석학은 모든 동성애자들이 생애 초기에 이성애적 경향을 예외없이 보인다는 것을 증명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단성애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이성애적 기간은 사춘기까지 계속된다. 모든 인간은 양성애적이다. 동성애는 자신의 이성애 경향을 억압하고 이성애는 자신의 동성애 경향을 억압한다. 자연은 우리를 양성애적 존재로 창조했고 우리가 양성애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춘기까지 현저히 양성애적인 기간을 보인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적 성향을 억압하고 동성애에 대한 갈망을 친교, 민족주의, 사회활동, 모임 등을 통해 승화시킨다. 승화가 실패하면 신경증적이 된다. 동성애적 성향을 완전히 극복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누구나 신경증적이기 될 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억압이 심할 수록 신경증적 반응도 강해져서 극단적이 되면 편집증으로 발달할 수 있다.
보통의 이성애자들보다 보통의 동성애자들에게 승화과정은 더 힘들다. 이것이 왜 동성애자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결과가 전형적인 신경증적 반응을 밝혀주는 지의 이유이다. 억압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은 불안, 수치심, 혐오, 증오 혹은 경멸감 등이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를 혐오하고 동성애자 남성은 여자를 혐오한다. 그러나 혐오는 끌림의 반대편에 있는 같은 감정이다.
드러내놓고 양성애적으로 살았던 민족은 그리스인들이다. 그러나 왜 양성애적인 건강한 삶을 살았던 그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던 그리스인들의 삶이 근대에서는 추구되지 않는 것일까?
4. Alfred C. Kinsey, Wardell B. Pomeroy and Clyde E. Martin: [남성의 성행동] (1948)
킨제이는 1930년대에 인간의 성행위에 대한 연구를 면접을 통해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8년에 방대한 양적 연구자료를 수집했고, [남성의 성행동]이라는 두 권의 책을 썼고, 1953년에는 [여성의 성행동]이라는 책도 이어 출간했다.
그의 연구방법이나 통계결과 등에 관한 질문이 계속 되어오고 있고, 성에 관한 태도나 인식은 간과하고, 성행위에만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개념 형성에 있어 그가 한 기여의 중요성은 지속되고 있으며,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지속되는 것, 즉, 유동적인 것으로서 유형화한 것은 성과학과 대중적 논의 둘 다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남자/여자, 남성성/여성성, 혹은 이성애/동성애 개념을 참고해서 이루어져 온 양성애 개념에 대한 논쟁은 1940년대 후반에도 성과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했다.
이성애-동성애 균형
성적 행위와 관련해 사고할 때 과학자든 평범한 사람이든 ‘이성애적’인 개인들, ‘양성애적’ 개인들이 있고, 성적 세계에서 이 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고, 다른 집단들 가운데 위치를 차지한 ‘양성애자들’이 미미하게 있을 뿐이라는 가정을 바탕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이 이성애자로 혹은 동성애자로 태어난다는 것을 함의하고 생 후에 이를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 경험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평생 오로지 이성애적으로 사는 이도 있고 또 경험으로나 심리로나 평생 오로지 동성애적으로 사는 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시못할 수의 인구가 개인사에서 경험이나 심리로 봤을 때 이성애적인 동시에 동성애적인 이들이 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이성애적 경험이 우세하고 어떤 이들은 동성애적 경험이 우세하다. 그리고 그 두 경험이 비교적 비슷한 이들도 있다. 성행위 유형이 계속 변하는 이들도 있는데 어떤 남성은 같은 시기(같은 해, 달, 주 혹은 날)에 이성애적 행위와 동성애적 행위를 하기도 한다. 양 성과 동시에 성관계를 갖는 이들도 그리 적은 편은 아니다.
<케인즈의 이성애-동성애 척도>p.33
0 1 2 3 4 5 6
0 절대적으로 이성애적이고 동성애적 경험이 전혀 없음
1 거의 절대적으로 이성애적이나 우발적인 동성애적 경험이 있음
2 거의 절대적으로 이성애적이나 우발이라고 하기에는 좀더 빈번한 동성애적 경험이 있음
3 이성애적 경험과 동성애적 경험이 동등하게 있음
4 거의 절대적으로 동성애적이나 우발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빈번한 이성애적 경험이 있음
5 거의 절대적으로 동성애적이나 우발적인 이성애적 경험이 있음
6 절대적으로 동성애적임
인구를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두 분리된 집단으로 나눌 수 없다. 자연은 완전히 분리된 분류가능한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 분류학의 기본이다. 오직 인간의 마음만이 분류를 만들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각각 분리된 정리함으로 강제로 넣기위해 애쓴다. 살아있는 세상은 모든 각각의 측면에서 하나의 연속태(continuum)에 존재한다.
다시 강조할 것은 현실에서는 이 각각의 분류들이 연속적인 연속체라는 것이다. 앞의 정황으로 봤을 때 누구도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동성애자들의 특성을 제3의 성(sex)이라고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동성애자 혹은 이성애자의 수를 묻는 질문은 따라서 불가능하다. 단지 척도에서 어느 지점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가에 따른 사람의 수를 세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양성애
50퍼센트가 배타적 이성애자이고 4퍼센트가 배타적 동성애자라면 46퍼센트는 성인기동안 양 성 모두와 신체적 혹은 (그리고) 심리적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양성애라는 개념은 한 번도 엄격하게 한계가 지어져 기술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개념이 척도범위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답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척도를 3개로 만들어 이성애,양성애,동성애로 둔다면 이들 사이에 있는 있는 그대로의 지속성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이 중간 척도들에 있는 집단의 사람들을 양성적(bisexual)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개념은 실재하는 특정 개인들, 즉, 사람을 일컫고, 그 어원과 대체로의 쓰임새는 이 사람들이 하나의 몸에 남성적 특질과 여성적 특질을 모두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성적, 동성적이라는 개념을 개인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명사로 쓰는 것에 반대해 왔다. ‘양성적’ 사람들이 마치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인 혹은 동시에 두 성일 수 있는 해부학적 혹은 내분비적 혹은 다른 종류의 신체적 혹은 심리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듯 말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양성적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에서 양 성의 기능이나 해부학적 구조를 포함하는 구조나 개인 혹은 개별 군체를 위해 쓰여왔다. 수정되지 않은 알에서 단성생식을 하는 모든 개체가 암컷인 단성류(unisexual species)가 있다. 반대로 암수 모두이면서 대체로 암컷이 낳은 알의 수정을 통해 개체생산을 하는 양성류(bisexual species)가 있다. 동식물 중에는 세대를 바꿔가며 한 세대엔 단성적, 그 다음 세대는 양성적으로 번갈아 하는 종들이 있다. 척추동물의 생식선으로 발달하는 배아구조에 양성적이란 말이 쓰일 때는 그 배아가 난소나 정낭 양쪽 어느 것으로든 발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렁이나 몇몇 달팽이, 드물게는 인간같이 자웅동체인 경우 양성적이란 말이 쓰일 수 있는데 이때는 하나의 몸에 난소와 정낭 양쪽이 다 있다는 말이다. 이상이 생물학에서 ‘양성적’이라는 개념의 쓰임새이다.
한편, 인간의 성적 행위에 대해서는 이 개념이 남자, 여자 모두와 성적 관계를 갖는 개인들을 가르킨다. 그런 성적 관계가 꼭 생물학적인 구조나 신체적 특질을 모두 가져야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이들을 양성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일반인들이나 성행위 연구생들이 이 개념을 즐겨쓰는데 양성적이라는 말은 동성(애)적, 이성(애)적이라는 말에 맞추어 만들어졌고, 대상의 성(sex)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뿐 당사자에 대한 어떤 것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5. Fritz Klein: [양성애적 선택: 백퍼센트 친밀함의 개념(The Bisexual Option: A Concept of One Hundred Percent Intimacy)](1978)
프리츠 클레인의 [양성애적 선택: 백퍼센트 친밀함의 개념]은 복잡한 시기에 출간된 책이다. 1970년대의 (서구) 게이해방운동이 성적 취향과 정체성을 정치적 사안으로 놓으며 ‘커밍아웃’을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것으로 강조했고, 이 와중에 특히 미국에서 상당수의 양성애적 집단이 등장했다 (Donaldson, 1995; Raymond and Highleyman, 1995; Udis-Kessler, 1995). 타임이나 뉴스위크같은 주요 시사잡지에서 양성애를 커버스토리로 다뤘고(Garber, 1995) 양성애는 신나는 혹은 ‘최신 유행’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양성애적 선택’은 마가렛 미드의 [양성애: 그것에 대한 모든 것](1975), 샬롯떼 울프Charlottee Wolf의 [양성애 연구](1977)와 함께 나온 주요 출판물 중 하나이다. 의료계, 정신분석학계, 상담계에서는 양성애가 성인의 한 성적 지향성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 중 몇몇은 양성애자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의 동성애를 부정하거나 드물게는 이성애를 부정하기 위해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Ruitenbeek(1973:204)은 양성애란 ‘신화’이고 그것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쓸데없고 해롭기까지 하며, 성적 선택을 어느 쪽으로든 내려서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클레인의 [양성애적 선택]은 양성애운동과 개념의 발달에 지침이 된 텍스트이다. 스테켈을 이어 클레인도 양성애를 이성애와 동성애의 조화 혹은 공존으로 다룬다. 킨제이처럼 그도 섹슈얼리티를 연속적인 것으로 봤고, 1990년대의 인식론적 논쟁을 예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양성애 인식론에 팽배해 있었다. Clare Hemmings(1993)에서는 ‘스파이’, ‘배신자’ 형상의 양성애가 계속 등장하고 성정치에서의 ‘이중 행위자(double agent)'로서의 형상, 인종분류와 같은 류의 분류로서 ’피 한방울 섞인‘ 등이 1990년대 특히 유색 양성애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퍼졌다 (Jordan, 1992a; Fehr,1995). 1993년 클레인은 HIV/AIDS와 관련한 내용을 덧붙여 개정판을 냈고, 킨제이의 연속태모델을 이어 클레인의 성적 취향표(Klein Sexaul Orientation Grid)를 개정판에 포함시켰다.
양성애를 감춰진 이성애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향. 시장, 정부, 종교계에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논리적. 개인의 자기 정체성 찾기에도 이런 관행이 발현됨.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에 집착했음. 비극이었음.
인간은 소속감을 필요로 한다. 사업에서 특이 두드러진다. 사고파는 것은 팔려는 사람이 그것을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때 가장 성공적이 된다. 양성애자는 주어진 것에 덜 충실할런지도 모른다. 차이(다름), 선택의 자유는 선사때부터 집단의 위협이었다.
오래된 낭만스런 질문 중 하나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이다. 내 대답은 그럴 수 있으면 그럴 수 있다이다.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으면 역시 그럴 수 있으면 그렇다이다. 이것이 충실함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관계에서 필요한 신뢰라는 부담을 지기 힘들다는 말일까? 아니면 (양성애자는) 이중역할을 하는 ‘스파이’인가? 전쟁 중 국제법에 의하면 스파이는 일단 잡히면 총살당한다. 반역죄를 지은 일반 시민은 더 가중한 처벌을 받는다. 공공연하게 심한 비난을 받고 종종 살해당하기도 한다. 간첩이나 배신자는 너무 혐오스러운 것이라 그들을 ‘없애는’ 데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양성애자는 스파이와 닮았다.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들 사이에서 성심리적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배신자와도 닮았다. 양쪽 진영의 비밀을 다 아는 위치에 있고 한 진영에서 다른 진영에 반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양성애자는 믿음을 줄 사람이 아니다. 소속된 부분에 충실하다는 것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실함이 없으면 인간의 성적 영역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되고 곧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위장은 속임수이다. 어떤 이가 평생 위장하며 살았다면 누구도 그를 신뢰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양성애는 동성애나 이성애의 위장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성적 표현인 것이다. 성적 상태(성향)가 어떻든 간에 그 사람은 죽는 그날까지는 연속선 속에 있다.
우리는 이름붙이기에서 위안을 받는다. 이름(호칭)은 서로서로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획득한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 우리의 특별함을 제한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현상은 바로 우리가 이름붙이기를 지속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붙이기는 불확실함, 모호함, 두려움의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 중 시도된 적이 있는 진정한 방법이 이름붙이기이다. 위협은 제거가능한 것일 때 가장 잘 다뤄진다.
거의 모든 이성애자들과 동성애자들에게 양성애자는 자신들의 성적 양가성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이중적(dual) 섹슈얼리티적인 낮선 존재이다. 그들은 그들이 선호하는 것은 공통되게 선호하고 그들이 회피하는 것은 또 회피하지 않는 양성애자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분쟁을 피하고 싶은 것은 삶에서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마음의 평화건 오직 스스로를 아는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나 허락된 일일 것이다. 부정은 안정이라는 것이 유지되기 위한 전통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동성애라고 이름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한편 이성애 남성은 어떤 동성애 남성이 어떤 남성을 성적으로 매력적으로 본다는 것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남녀 양쪽 모두에게 끌리는 양성애적 남성이 어떤 남성을 매력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맘편히 무시해버리기엔 어떤 관계라도 있는 듯 여겨질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친밀함에 대한 두려움이 부분적으로는 이성애 혐오증이나 동성애혐오증 혹은 이성이나 동성 혹은 둘 다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두려움의 주된 이유와 이로 인한 혼란은 섹슈얼리티와 친밀함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같이 붙어 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섹슈얼리티와 친밀함은 상호보완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독립적인 감정이다. 이 둘의 공존은 각각의 상황과 사회적 압력에 달려있다.
친밀함이 단순히 아픈 친구를 병문안해 돌보는 것같은 순수하고 가벼운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될 때는 성관계의 가능성이 생겨날 때이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는 느낌을 나눌만한 친밀한 상황에서 서로 포옹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울 때 어떤 개인적 혹은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그런 감정을 부정한다면 그들은 그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반응에 자유롭게 반응하지 않으므로 백퍼센트 친밀하지 않은 것이다.
성적 지향도 친밀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성적 지향이든 그 지향 안에서 총체적인 친밀함이 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은 성적 지향의 어느 척도에 위치해 있느냐에 관계없이 소위 시랑이란 것을 필요로 한다. 처음에 우리는 어머니와 하나였고 탄생의 정신적 충격과 합체(unity)의 죽음과 함께 삶이 시작되었다. 친밀성은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태어날 때를 기억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오지도 않으므로 있는 존재로서 겪는 가장 특별한 친밀, 즉 다른 인간 존재와의 합체를 위해 애쓰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서 겪는 가장 특별한 두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완전히 신뢰하면서 그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느낌과 그 사람과 경험과 감정을 나누는 행동은 이 두 사건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다. 얼마나 자주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다시 태어난 것 같아’ 혹은 사랑이 끝날 때 ‘내 안의 일부가 죽어버린 것만 같아’라고 하는 듣게 되는가.
순수하게 백퍼센트의 친밀의 가능성은 양성 모두와의 관계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열어놓았을 때 가능하다. 친밀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최소 친밀, 한정된 친밀, 완전한 친밀이다. 모든 인간은 친밀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느낄 심리적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환경적, 신경적, 혹은 양쪽 모두의 영향으로 다른 사람과 전혀 친밀함을 느낄 능력이 없을 때가 최소 친밀의 단계이다. 한정친밀단계는 최소친밀보다는 나아가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함에 있어 완전한 신뢰가 없을 때의 단계이다. 이 단계를 넘으면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느낌과 감정과 경험을 완전히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친밀함의 상황은 셀 수 없이 다르다. 그러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성적 친밀과 감정적 친밀이다. 성적 친밀은 물리적인 충족, 성적 만족이다. 갓난 아기 때 겪을 수 있었던 그 가까움을 성적 성인으로서 다시 한번 맛보는 것이다. 성적 친밀에 대한 필요와 욕구는 강력하고 대체로 이른 시기부터 노년기까지 성취되어 진다. 가장 심한 벌이 친밀함을 제거해 고립시키는 것이다. 독방감금은 사형 다음으로 심한 벌이다. 감정적 친밀은 ‘인간’이라 불리는 사회적 동물에게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성적 친밀과 감정적 친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접촉을 통한 가까움이다. 접촉은 반드시 성적일 필요는 없다. 사랑과 신뢰의 느낌은 태어나던 그 순간 접촉을 통해 전달되고 이 시기의 접촉은 성행위동안을 빼면 생의 어떤 순간의 그것보다 완전한 접촉이다.
이성애 혐오 혹은 동성애 혐오는 감정적 친밀의 상태에서 성적 친밀에 대해 갖는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이다. 감정적 친밀도 몸의 접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성을 멀찌감치 놓아두려고 우리는 종종 감정적 친밀도 피한다. 친족관계, 스포츠, 재난이나 슬픔에 차 있을 때 두 남자가 껴안거나 심지어 키스를 하는 등의 접촉이 크게 성적 의미를 부여받지 않는 것은 그것이 유아기 때의 원초적인 ‘전성적인(presexual)' 포옹과 닮아있거나 같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접촉을 동반한 친밀함같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부정하고 조건이 되었을 때도 그런 욕구를 돌 볼 생각을 애써 버려왔던 사람들은 결국 신경증적 증세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는 얼마나 강력하고 철저히 그것을 회피해 왔는가에 달려있다. 이들은 결국 순수한 백퍼센트 친밀을 부정하게 된다.
건강한 양성애자가 건강한 것은 그 풍부한 감정적 역량 때문이다. 건강한 양성애자, 이성애자, 동성애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성적 취향과 행위 밖에 없다. 감정적으로는 세 집단 모두 ‘양성애적’ 수준에서 움직인다. 즉, 어느 쪽 성과의 감정적 친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호작용의 방식은 어떤 유형의 친밀감을 갖느냐에 영향을 미치는데 남녀는 문화적으로 다른 상호작용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건 두 사람 사이에 가능한 상호작용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대칭적(symmetrical) 소통이고, 다른 하나는 보완적(complementary) 소통이다. 대칭적 소통을 하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다. 서로 동등하고 경쟁적인 위치에서 서로간의 차이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소통한다. 보완적 소통을 하는 이들은 서로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다소 주종적인 관계를 통해 상호만족을 느낀다.
남남, 여여의 친구사이에서 친밀은 대칭적이다. 보완적 상호작용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완적 상호작용은 대체로 한 쌍의 관계를 함의하고, 한 쌍은 성적 친밀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대칭적 유형과 보완적 유형 사이의 균형은 관계 속의 두 사람 각각의 화학작용에 달려 있다. 경쟁은 성적인 의미를 거의 가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친구들 사이에서 경쟁을 통해 친밀을 유지한다. 그러나 양성애적 친밀은 양쪽 모두가 가능하게 둔다. 그리고 양쪽 유형의 관계 모두에서 백퍼센트 감정적 친밀 고유의 탁월한 가까움이 획득된다.
6. Amanda Udis-Kessler: [킨제이 척도와 다른 섹슈얼리티 측정에 대한 소고(Notes on the Kinsey Scale and Other Measures of Sexuality)](1992)
우디스-케슬러는 세 가지의 섹슈얼리티 ‘측정’ 척도의 장단점에 대해 조사했다. 그녀는 척도자체가 양성애에 대한 이해에 어떤 역할을 하고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이는 어떻게 측정하는가에 따라 해당 인원수가 달라지고 개념화하는 방법이 다름을 반영한다. 이같은 문제는 정체성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게 한다.
우디스-케슬러의 글은 킨제이의 척도가 단차적(one-dimensional)이라 본다. 단차적인 수치는 양성애 혹은 양성애의 정도가 하나의 축 위의 고정된 위치(들)에 놓여서 ‘순수한’ 동성애와 ‘순수한’ 이성애와이 거리를 가질 뿐임을 보여준다. 킨제이의 원래 그래프는 양성애 정도를 이성애와 동성애의 다양한 비율의 혼합으로 보여준다. 이 두 서로 다른 킨제이 척도가 가진 문제는 양성애가 이성애와 동성애의 조합(combination)으로 이해되어야 할 지 아니면 둘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지 해결할 수 없고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이들 심지어 때로 같은 이들에게서 다른 대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양성애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들(남/여, 남성성/여성성,이성애/동성애)과 함께 그것들의 조합인지 그것들 사이에 있는 것인지 두 불안정한 모델은 양성애 논쟁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주제이다.
킨제이 척도와 함께 Michael Storms, Fritz Klein의 척도도 잘 알려져 있다. 킨제이는 1940년대에 인디아나대학의 동물학자였는데 우연히 인간섹슈얼리티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때 인간섹슈얼리티에 대한 최근 연구결과가 없음을 깨닫고 직접 만여명의 사람들을 설문조사하고 면접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발행된 책은 잘 팔렸는데 성에 대해 판단적이지 않은 접근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편히 와닿았던 것 같다. 조사 남성 중 3분의 1이 성인기에 동성적 만남을 통해 오르가즘을 느낀 적이 있고, 46퍼센트가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아님이 발견되었다. 성적인 범위는 놀라웠고 이를 이해가능하게 전달하기 위해 킨제이는 척도를 그려 보여준 것이다.
킨제이는 섹슈얼리티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척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구 중 10퍼센트가 이반(gay)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되어 왔다. 이런 인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거의 정확하지 않은 것이고 킨제이의 데이터가 전 국가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킨제이의 모델은 1970년대까지 누구도 문제삼지 못했으나 두 번째 섹슈얼리티 척도로 이어진 성별역할(gender role)에 관심을 가진 심리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 대상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성별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라 이름붙여질 만한 특성 혹은 성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었다. 그같은 특성은 한 끝에 남성성이 있고 반대 끝에 여성성이 있는 하나의 양극 척도(single bipolar scale)에서 측정되었다. 이 척도는 섹슈얼리티 척도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양극단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적이거나 전적으로 여성적이고 척도의 중간지점은 잘 정의되지 않았다. 중간이 남성의 특성과 여성의 특성을 모두 가진다는 것인지 남성의 특성도 거의 안가지고 여성의 특성도 거의 가지지 않는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성별역할연구자들이 이 전통적인 척도가 성별특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인지 문제제기 하기 시작했다. 몇몇 심리학자들이 남성성 척도 따로, 여성성 척도를 따로 두고 측정해 남성성이 높게 나오고 동시에 여성성이 높게 나올 수 있도록 했고 이로써 문제는 상당히 해결되었다.
킨제이의 섹슈얼리티 척도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분명히 연속성을 통해 양성애의 정도를 보여주려 했지만, 처음의 성별척도처럼 섹슈얼리티 척도에서도 중간이 동성애이자 이성애임을 말하는지 동성애도 아니고 이성애도 아닌 것을 말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스톰스 섹슈얼리티 축(The Storms sexuality axis)>p.52
켄자스대학의 심리학자 Michael Storms는 섹슈얼리티와 성적 상상(fantasy)을 연구했는데 그에 따르면 양성애자의 이성애적 상상은 이성애자만큼 강하고 동성애적 상상은 동성애자만큼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근거로 그는 양성애가 완전히 이성애적이고 동시에 완전히 동성애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킨제이척도에서처럼 둘 사이에 있다기 보다는 말이다. 1980년 스톰스는 두 개의 분리된 연속선이 아니라 X-Y축으로 된 새로운 섹슈얼리티 척도를 제안했다.
정신분석학자 프리츠 클레인(1985)은 클레인 성적 지향판(Klein Sexaul Orientation Grid)을 개발해서 복잡한 인간의 성적 태도, 감정, 태도 등을 식별하고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클레인은 기존의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가 지나치게 불분명하고 일관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킨제이의 척도가 정도를 측정하기에는 유용하지만 매력, 성적 상상, 행위 등의 성적 정체성을 이루는 각각 다른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하고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보았다. 클레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SOG를 만들었고, ‘플레이보이’지의 아류인 ‘포럼’ 독자들을 통해 그 유용성을 시험했다.
클레인의 모델은 성교육자들이나 양성애자 일반에서 많은 호응을 얻어왔다. 이 모델은 다각적으로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킨제이나 스톰스가 가졌던 개념상의 불분명함을 상당히 극복한 것이다. 그러나 스톰스가 지적할지도 모르는 비성애(asexual)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섹슈얼리티 측정이 많은 이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성주의 사회과학자들과 연구방법론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은 섹슈얼리티같이 한 사람의 어떤 한 면을 추상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그 자체 내에서만 유용한 데이터로 한정해서 봐야 한다고 보았다. 더욱이 설문, 질문지, 보고서 작성방법은 그저 어떤 사람 개인의 자기인식을 말해 줄 뿐이지 행위, 동기, 혹은 무의식의 영향 등까지 반드시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연구방법은 어떤 철학적 관점 안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몇몇 여성주의자들은 그것이 남성의 특성을 문제의식없이 당연한 규범으로 삼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거
현재(최근 몇 년)
이상적인 미래 목표
성적 매력
성적 행동
성적 상상
감정적 선호
사회적 선호
자기 규정
생활 양태(lifestyle)
성적 매력: 누가 당신을 흥분시키나? 누가 실제의 혹은 잠재적 파트너로서 매력적이라고 보나?
성적 행동: 누가 당신의 성적 상대인가?(파트너인가?)
성적 상상: 당신의 성적 상상 속에서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는 것을 좋아하나?
감정적 선호: 누구와 함께 깊은 감정적 유대를 쌓는 것을 더 좋아하나?
사회적 선호: 어떤 성의 대상과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나, 어떤 성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한가?
<클레인 성적지향판>
또 하나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이 윤리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섹슈얼리티 척도가 성을 기술화하는(techonologizing sex) 유행의 일부라고 비판하는 이들이다.
1990년대에 새로운 척도가 Berkey와 그 동료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클레인과 스톰스를 고려하면서 개발된 이 척도는 양성애자들을 여섯 개의 범주 안에 넣고 있다. 예를 들어,
(1) 전적으로 이성애자였다가 전적으로 동성애자로 변한 이들
(2) 전적으로 동성애자였다가 전적으로 이성애자로 변한 이들
(3) 기본적으로 한 성에만 끌리고 항상 한 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주 가끔 그와 다른 성의 사람을 욕망하거나 성적 접촉이 있는 이들
(4) 기본적으로 한 성에만 끌리나 아주 가끔 그와 다른 성의 사람을 욕망하거나 성적 접촉이 있는 이들
(5) 양쪽 성에 동등하게 끌리지만 항상 한 번에 한 성에만 초점을 두는 이들
(6) 양쪽 성에 동등하게 끌리지만 항 양성 모두에게 끌리고 이들 모두와 활동성을 가지는 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