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4일 월요일

엘렌느 식수(Helene Cixous)

언어의 수호자 - 엘렌느 식수와의 인터뷰
Guardian of Language : An Interview with Helene Cixous
캐슬린 오그레이디 Kathleen O'Grady
(영역 : 에릭 프리노위츠Eric Prenowitz)

엘렌느 식수를 소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일생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들이 매우 다방면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이다.<각주 1>

먼저 "초기의 식수"는 제임스 조이스 문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 파리 제8대학의 영문학 교수라는 특별한 자리를 맡아 활동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식수는 문학비평과 철학 분야에 걸쳐 매우 방대한 양의 저작과 논문을 집필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 보다는, 그녀가 창조적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른바 "소설적 자서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여 작가들과 철학자들과 문학비평가들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는 "극작가로서의 식수"이다. 희곡과 시나리오, 심지어 오페라 대본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쓴 작품들은 대중적인 흥행은 물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식수"일 것이다. 1974년 그녀는 파리 제8대학에 여성학 센터Centre d'Etudes Feminies을 개설한 바 있으며, 이곳에서 유럽최초로 여성학 박사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식수는 에크리튀르 페민느(ecriture femine: 직역하면 "여성 문학"이란 뜻 - 역자 주)이론을 주창하기도 하였는데, 이 이론은 말하자면, 하나의 음성적 기입으로서의 여성의 신체와 그것에 담긴 파동의 흐름을 통해 타자의 차이를 드러내어 이를 껴안을 수 있도록 하는 (여성들만이 접근 가능한) 미학적 글쓰기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비평가, 철학자, 극작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식수는 물경 40여편에 달하는 저작들과 100여편에 달하는 논문들을 저술했다. 이는 한 사람의 생애가 낳은 성과라기보다는 여러가지 인격적 삶이 합쳐진 최고의 성과로서, 이들 각각을 결합하고 융화시킨 것은 고독한 시인의 목소리였다. 식수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시인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발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각주 2> ---- 이하는 인터뷰 내용(< >안은 오그레이디의 질문, - 표시는 식수 의 대답) ----- (1970년대에 당신은 이론 및 창작 양방향에 있어서 데리다에게서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에크뤼튀르 페민느라는 개념을 구성한 바 있다. "까트린느 클레망과 더불어 다시 태어난 여성The Newly Born Woman with Catherine Clement(1975)"나 "메두사의 웃음The Laugh of the Medusa(1976)"과 같은 텍스트를 통해 당신은 여성에 관한 리비도 경제 학the libidnal economy of the feminin을 개창하고 양성애에 대한 재검토를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뒤이어 "극도의 충실Extreme Fidelity(1988)" 에 있어서는, 성적 차이를 문화적 영역 내부에 위치시킴으로서 그 개념을 확장하고 명료화한 바 있다. 이 이론이 당신의 철학적-시적 텍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미학적 차원을 넘어선 어떤 윤리적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가?) - 나에게 있어서 이론은 영감 이전의 것이라거나 그것에 선행한다던가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론은 나의 텍스트에 있어서 철학적-시적 기원에 속하는 결과물이자 긴급한 절충적 요구에서 나온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 내가 "이론적인"(강조부호를 쓰는 이유는 나의 이론적 저작들이 시적인 운율을 지닌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텍스트를 쓸 때는 언제나 현재의 문화적 사건들에 존재하는 긴장이라는 계기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문화적 사건들에 있어서 담론(학술적, 저널리즘적 정치적 담론 등등)을 둘러싼 상황으로 인해 나는 사물들 뒤로 물러서서, 지적 여행을 멈추고 다시 한번 강조의 기회를 가지면서 나에게 있어서 시적 운동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사고의 운동을 설명적 방식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작업이 실제로 화제에 올려질 때에는 잘못 이해되거나 망각되거나 억압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따라서, 나의 저작에 있어서 "이론적인 것"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은 사실, 나의 작품들에 포함된 내용과 나의 소설 작품들에서 독해해 낼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윤곽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고 운동의 일시적인 정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이 나의 시적 텍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바는 없다. 나의 시적 텍스트들은 이따금씩 까페의 벤치(이것은 지금 이 순간, 행위의 과정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보다 명료하면서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되기 위해서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 안식처 같은 것이다. 따라서, 당신 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론은 부가적인 윤리적 정치적 구조를 제공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시인이 교육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낸 절충안일 뿐이다. (당신이 많은 저작들을 통해 콜레뜨(Kamilla Collete: 노르웨이 태생의 소설가, 여성운동가)와 뒤라스, 조이스와 쥬네(Jean Genet: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극작가이자 소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칭송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신의 소설 저작들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것은 클라리스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브라질 태생의 실존주의 소설가-이상 역자 주) 의 목소리일 것이다. "

오랑제적인 삶To Live the Orange(1979)", "극도의 충실(1988)", "클라리스 리스펙토르 읽기Reading with Clarice Lispector(1990)", "글쓰기라는 사다리에 오르는 세가지 방법Three Steps on the Ladder of Writing(1993)" 등의 저작들의 경우 리스펙토르의 저작들에 대한 명목상의 동일시 혹은 치환이랄 만한 것을 구성하고 있다. 당신의 글쓰기 작업에 녹아들어 있는 신화적 특질들에 그녀의 언어가 미친 영향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가? 당신의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강조부호는 역자의 것)라는 측면에 있어서 리스펙토르가 모티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 먼저, 나의 저작 전체영역에 있어서 리스펙토르가 차지하는 지위가 극도로 예외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녀를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어떤 인물과도 말이다. 그와 비견할만큼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을 들라면 자끄 데리다를 들 수 있을 텐데, 어떤 면에서 (단순화시키자면) 이들 각각은 나의 글쓰기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적인 차이를 놓고 보자면, 데리다는 여성성을 아우르는 남성성이라는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리 스펙토르는 남성성을 아우르는 여성성이라는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그녀와의 관계를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저작을 1977년에 처음 접했는데 이는 말 그대로 그녀의 작품에 대한 입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녀를 진정으로 알아가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그녀의 작품에 대해 화답 할 수 있게 된 것은 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 에서 그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2년 간의 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책을 펴내기 시작한 1967년에서부터 197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는 이미 20-30권 정도의 소설 작품과 4-5권의 평론집을 펴냈으며 이는 "다시 태어난 여성"과 "인간의 이름Prenom de personne", 그리고 몇 몇 희곡들과 같은 대표 저작들로 이어졌다. 따라서 클라리스 리스펙토르를 만날 때 나는 이미 기나긴 문학적 시적 정치적 경험들을 거치고 난 이후였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의 동료이자 동시대의 여성으로서 그녀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행운이었다(즉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 - 역자 주). 나의 저작들에 있어서 당신이 "신화적 특질"이라고 표현했던 부분이나, 그 밖에 신에 대한 암시와 같은 체계적 기술과 같은 것은 나만의 고유의 것이다. 1967년 나는 단편소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의 이름이 바로 "신의 이름Prenom de Dieu"였다.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신과 함께 "놀았다"(강조부호는 역자의 것). 언제나 말해왔지만, 나에게 있어서 신이라는 시니피앙은 우리를 초월하는 그 무엇과 동의어이자 미래와 무한성을 향해 투사된 우리 자신과 동의어이다. 스스로의 작품에서 "신이라는 말the word Dieu"과 "말로서의 신Dieu the word"(이상 강조부호는 역자의 것)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작가들이 그러하듯, 나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자이지만 문학적으로는 이신론자 理神論者이다. 그것이 전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신의 도움없이 는 그 누구도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이란 무엇인가? 글쓰기의 도움이 없다면 그것은 기표로서의 신God-as-Writing일 뿐이다. (저명한 소설가이자 이론가라는 칭호 이외에도 당신은 극작가로서도 성공했다.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에 관한 끔찍하고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The Terrible But Unfinished Story of Norodom Sianouk King of Cambodia(1985)"와 "그들이 꿈꾸는 인디아 또는 인디아다Indiada or the India Of Their Dreams(1987)"와 같은 작품은 프랑스에서 대단한 흥행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당신의 희곡을 보면 글쓰기에 있어서 내면적인 시적 심상으로부터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관찰로의 일정한 이동을 감지할 수 있다. 당신의 에세이 "범죄의 현장, 용서의 현장The Place of Crime, The Place of Forgiveness(1987)"에서 당신은 이러한 이동을 하나의 윤리적인 문제라고 쓴 바 있다. 운문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연극 공연에서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주관적 힘이란 어떤 것이 있는가? 당신의 초기 개념에서 그러한 주관적 힘이 증폭되었다면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가?)

앙가쥬망과 관계된 그 어떤 경우에서도, 글쓰기의 책임성이라는 명령에 따라야한다는 점에서는 연극과 소설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에서는 불가능하면서도 연극에 서는 가능한 그 무엇일진대, 이는 말하자면 관객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당연히 그것의 강도强度가 크다는 점, 즉 밀도 있는 정치적 도덕적 메시지를 보다 넓은 범위에서 즉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연극과 소설 작품이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 차이를 가진다면 그것은 연극이 보다 즉각적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각색과 상연, 그리고 미장센mise en scene이 바로 차이 그 자체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몇가지 동어반복 또는 진부한 표현 들에 관한 것이다. 최근 롭세르바퇴르지l'Observateurs誌는 자끄 데리다와의 인터뷰 기사를 여러 페이지에 걸쳐 게재하면서 "그렇소, 나의 글들은 정치적이요"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이러한 저널리즘적 태도 혹은 표피적인 독해방식은 그로 하여금 너무나 명배한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그의 철학적 글쓰기는 언제나 정치적인 글쓰기이며 다시 말해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양자는 동일한 말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어떤 독자가 "정치적"이라는 말을 "역사적-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문헌을 대상으로 하거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어떤 것"(강조부호는 역자의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그러한 사건들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역사책이나 신문지상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 이것 역시 진부한 표현으로서 이 글에서조차 이런 말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 은 단순히 정치적 영역 혹은 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정치적 사건들에서만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은 분명 그 혹은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발언의 주체 담론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이는 쉽게 말해 정치적 영역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 -- 권력관계라든가, 억압, 종속, 착취의 관계 등과 같은 -- 은 나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나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 학정과 독재, 전제정치, 자본주의 등등 우리에게 있어서 가시적인 정치 공간들을 형성하는 모든 것들은, "타자와 공존하면서 반발하는 자아the Self-with-against-the-other"(강조부호는 역자의 것)의 가시적이면서 연극적이면서 또한 포착가능한photographable 투사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영어에 "공존하면서 반발하는withagainst"이라는 어휘를 추가할 것을 제안한다. 프랑스어에 있어서는 "꽁트르contre"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독자들로 하여금 특정의 독해방식을 강요하자는 건 아니지만) 내가 소설 작품을 쓸 때나, 주체일반 혹은 특정의 인간주체에 대한 정의定意에 관한 문제의식을 다룬 소설작품들에 있어서나, 혹은 가족의 영역 혹은 유배의 문제를 은유적 시적 내러티브 -- 이러한 내러티브 가운데 최초의 것은 "드당(Dedans, '내적으로'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 전치사: 역자 주)"이란 제목을 지닌 것으로, 알제리 에 있어서 4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대가 가진 의식적 무의식적 상황에 관한 간접적인 비평을 실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 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적용된다. 그것을 관통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 고려와 앙가주망이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나 카프카가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형식만 다를 뿐 근본적 시야라는 점에서는 이와 동일하다. 이는 정확히 동일한 차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운명을 내재적인 것과 외재적인 것으로 나누고, 전자를 비정치적인 것으로 후자를 정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한 그리스 비극의 경우를 생각해보더라도 이는 하나의 넌센스인 것이다. 하나의 인간주체는 그것이 인간존재로서의 하나의 시민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단일한 숙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나의 소설작품들 가운데 세계사라는 메아리와 공명하지 않는 것은 단 한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정치적으로 태어났고, 따라서 정치적 비극에 화답하는 시를 쓰기 시작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리적-정치적 문제의 식의 기입 혹은 표현이라는 문제 뿐만 아니라 행동의 문제 또한 존재한 다는 것을 역설해왔다. 이 점에 있어서 행동 -- 즉 일반적으로 운위되는 행동 -- 이란 투쟁의 장이나 정치영역의 장, 혹은 정책적 논의의 장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여기서 유감스럽게도 문학적 행동이란 것이 변화의 힘과 정치적 확신의 힘, 그리고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던 혁명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듯하다. 알제리 유배와 유배된 알제리의 지식인들,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었으면서도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바로 그들이 그 증거이다. 학살과 암살에 있어서 최초의 대상은 펜을 통해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이들 가운데에는 우리같은 사람들과의 텍스트적 관계 혹은 소통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그들 자신이 하나의 텍스트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다. 마지막 증거로는 프랑스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문학 텍스트 혹은 작가와 일반여론과의 상호관련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소설가, 철학자 등등은 언제나 자신의 집필행위가 하나의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해왔으며 또한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겨 왔다. 에밀 졸라가 창작행위를 접어두고 드레퓌스를 위한 투쟁에 참여한 것은 겨우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영역에 있 어서 나의 행동을 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사실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정확히 글쓰기에 있어서만 해당되는 독특한 사항으로서, 내 생각으로는(언제나 사용해온 말이지만 "내 생각"이란 표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의식있는 작가는 국가와 공적인 가치의 수호자이기도 하지만 이는 그들의 작업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중요한 것 -- 즉 그들의 역할 혹은 임무 -- 은 그들이 언어의 수호자, 즉 언어의 풍요성과 자유와 낯설음strangeness과 낯선 의식 strangerness의 수호자라는 사실이다. 언어를 하나의 국가country라고 할 때, 언어라는 국가 내부에서는 실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현재의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경을 개방할 것이냐 폐쇄할 것이냐라는 문제 영역을 두고 언어학적 시적 유파들 사이에(말하자면, 유럽 연합을 앞두고 벌어지는 국경개방 논쟁과-- 역자 주) 동일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즉, 프랑스 민족주의와 민족성의 발호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르고도" 적절한 프랑스말을 살려써야 한다는 논의가 있는 반면, 프랑스어를 탈문법화 혹은 비문법화 하고 그 구문법syntax에 있어서 프랑스어가 보다 개방적, 수용적, 확장적, 관용적, 지적 언어가 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체를 통해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시학에 있어서 대단히 혁명적인 전통 -- 이러한 관점에서 나 자신은 랭보를 시원으로 하는 계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 이자, 한계에 대항한 도전이자, 언어에 대한 하나의 찬미이자, 시니피앙에 관한 작업이자, 무엇보다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바른 프랑스어"를 사용함으로써 학계와 언론계에서 지배적 권위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더이상 사상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 아닌가. (1974년, 당신은 제8대학에 여성학 센터를 창립한 바 있다. 최근 프랑스 정부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여성학 박사과정을 개설하고 여성학 관련 자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이곳에 대해 폐쇄 위협을 가하고 있다(이 인터뷰가 있었던 96년 당시는 우파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역자 주). 70년대에 이 프로그램을 열게 된 배경은 어떤 것이며, 90년대에 있어서 이러한 위협이 초래한 결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1974년, 내가 여성학 센터를 열게 된 이유로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근본적인 이유로서 내가 영문학 교수였기 때문에, 내가 학계에 몸담게 된 이래로 문학적 유산들을 민족적인 차원에서 정의 내리려는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려왔었다는 점이다. 나는 문학을 국경이란 것으로 감금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한가지 이유다. 문학은 국경없는 국가transnational country이다. 우리가 읽는 문학작품의 작가는 언제나 또다른 세계의 시민이었고, 국경을 넘나드는(좋은 의미에 서의-역자 주) 무법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우리 언어를 새롭게 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문학이 -- 다른 모든 담론 들에서도 그러하듯 -- 남성지배적 영역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영어로 쓰여진 남성중심적 문학이라는 제한된 분야를 열정을 다해 가르치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나는 배타적이지 않은 영역에서 일을 할 때 행복 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단일한 성, 단일한 언어라는 제약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으며, 프랑스에 있어서의 대학체제와 학위체계, 그리고 그것이 요구하는 바를 재조직하여 프랑스학French research 분야에 있어서 새로운 박사과정을 개설하고 프랑스에 있어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박사과정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여성학 과정이다. 그리고 74년, 그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이 학문은 간학제적間學制interdisciplinary이며 따라서 당연히 간문화적intercultural 간언어적 interlinguistic 과정으로서, 문학과 철학, 언어와 언어 사이에 놓은 비합리적인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으며 또다른 측면에서 그것은 처음부터 문학적인 담론들에만 제한을 두지 않고 여타의 담론들을 기꺼이 수용하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역사학의 목소리와 사회학의 목소리, 정신 분석학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통해 나는 나와 친숙했던 테마, 즉 성적 차이라는 테마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매우 신속하게 행동하여 하나의 일반적 주제학문 즉 성차의 시학The poetics of sexual difference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러한 학문은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탄압의 위협이 존재했고 최근에 있어서 되살아난 위협 역시 당시와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발라뒤르 행정부 출범 이후 새로이 들어선 교육당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프랑스에 여성학이라는 학문이 있어야하는 이유가 뭔가? 남성학도 없는 판국에..."(인용부호는 역자의 것) 이게 전부다. 너무나 간단한 일인 것이다!!! 이는 프랑스가 이념적으로 퇴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프랑스는 여성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모든 지표에서 유럽 내 15위를 점하고 있으며, 이는 또한 사회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평등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와 동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마지막 질문으로,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 더블린 태생의 영국 작가이자 비평가)은 최근, "철학자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언제나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과 함께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내가 당신이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내가 생각할 때 존재하는 나란 과연 무엇인가Que sont-je quand je sonje?"라는 질문이 지닌 이면裏面 혹은 행간의 의미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Que sont-je quand je sonje?"를 제대로 번역했는지는 나 자신도 의문 이지만, 영어로 표현하자면 "What am I when I think?" 정도가 된다. 이는 물론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빗댄 것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어로 읽어 보면 식수의 시적인 재치를 엿볼수 있다-"끄 송쥬 깡 쥬 송쥬". 이러한 시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식수는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쓰이는 "penser" 동사를 쓰지 않고 "songer" 동사를 사용한 것이다 - 역자 주) - 말하자면 나는, 내가 두려워하지 않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보다 명확히 말해서, 그리고 정숙하고도 겸손한 표현 방식을 쓰자면, 나는 다른 모든 인간존재들이 그러하듯 내가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이 대단한 두려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자 삶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것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다. 삶 -- 우리가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두려움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그 나머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분노일 것이다. 나는 개인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배신의 유령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각주) 1. 식수의 작품을 검토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훌륭한 문헌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 The Helene Cixous Reader. Susan Sellers, ed. (London: Routledge, 1994) and Helene Cixous: Authorship, Autobiography and Love by Susan Sellers (Oxford: Polity Press,1996). 2. "Extreme Fidelity," in Susan Sellers (ed.), Writing Differences: Readings from the Seminar of Helene Cixous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8).

* 번역 : 강현석
* 이상은 여성학술지 "데 팜므(des Femmes)"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 출처 : http://dalara.jinbo.net/home/jarou_elan.html
- 출처 게시된 출처: http://cafe.daum.net/bookwomanlife

2009년 4월 1일 수요일

"메스티자적 자의식과 양성애"

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5강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V 글로리아 안잘두아: [메스티자적 자의식 (La Conciencia de la Mesiza)]과 양성애

멕시코 철학자 Jose Vasconcelos는 메스티자(mestiza)를 마음에 그리면서 그것을 세상의 주요 네 인종을 껴안는 다섯 번째 인종, 우주적 인종이라 불렀다. 미국에서 흔한 순수 아리안족이라는 호명이나 인종순수정책같은 것을 편다거나 하는 것에 반대해 그의 이론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 유전자의 강이 합류하고 염색체가 지속적으로 “넘나들면서” 혼종의 자손... 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그리고 생물학적 상호수분(cross-pollinization)으로부터 “이방인” 자의식은 지금 새로운 메스티자 자의식을 만들고 있다.
경계들의 투쟁
왜냐하면, 나, 메스티자
계속해서 한 문화의 밖으로 걸어나와
다른 문화의 속으로
왜냐하면 나는 모든 문화 속에 동시에 있으니까
목소리들의 부딪힘으로부터 양가성은 정신과 감정의 뒤얽힌 상태를 야기한다. 내부의 충돌은 불안과 불확정성을 야기한다. 메스티자의 이중적 혹은 다중적 인성(/격)은 정신적으로 쉴 수가 없어 괴로움을 겪는다.
... 아즈텍(Aztec)말로 길들 사이에서 찢어졌다는 뜻인 메스티자는 한 집단의 문화적, 영적 가치를 다른 집단으로 옮긴 결과물이다. 삼문화적(tricultural)이거나 하나의 언어만 쓰거나 두 개의 언어를 쓰거나 혹은 다언어를 쓰거나 방언을 쓰거나 하며 영원한 변화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메스티자는 혼종 번식의 궁지에 처한다: 어두운 피부의 어머니의 딸은 어느 집단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한 문화에서 길러지고 두 문화 사이에 끼어서 세 개의 이 모든 문화와 각각의 가치체계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메스티자는 육신의 투쟁, 경계의 투쟁, 내전을 겪는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는 우리의 문화가 소통하는 현실 세계를 인지한다. 하나의 문화 이상에서 살거나 그것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들처럼 우리는 다중적인 가끔은 서로 대립되는 의미들을 갖게 된다. 두 개의 자기 모순되지 않는 그러나 습관적으로 나란히 갈 수 없는 참조틀이 함께 간다는 것은 문화적 충돌을 야기한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치카나(chicana)의 문화 안에서 흔히 가지고 있는 백인 문화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흔히 가진 멕시코 문화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고, 이 각각의 문화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흔히 가진 선주민 문화에 대한 믿음을 공격한다. 잠재의식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믿음에 대한 공격을 위협으로 보고 그에 맞서기 위해 반대위치를 취한다.
그러나 반대편 강둑 위에 서서 큰 소리를 질러 묻고, 가부장제, 백인관습에 도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반대위치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결투 안에 우리를 가둔다; 경찰과 범죄자처럼 사투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둘 다 폭력의 공통분모로 전락하게 된다. 반대위치는 지배문화의 관점과 믿음을 반박하고 이로 인해 자랑스럽게 반항적이다. 모든 반동행위는 그것이 맞서는 바로 그것에 의해 한정지어지고 그렇게 그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반대위치는 권위-내/외부 마찬가지로-와의 문제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지배로부터의 자유로 한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방식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새로운 자의식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반대편의 강둑을 떠나야만 할 것이다, 죽음을 무릎쓴 두 전사들 사이의 분열이 극복되게 되면 우리는 이쪽 강가에 한 번, 저쪽에 한번 양쪽 강가에 있고 뱀과 독수리의 눈을 통해서 보게 될 것이다. 혹은 아마 우리는 지배 문화에 가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 치부해버리고 경계를 건너 완전히 새롭고 동떨어진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다른 길로 들어설 지도 모른다. 일단 우리가 반동(react)하지 않고 동(act)하려고 결심만 하면 가능한 것들이야 널려있다.
양가성에 대한 관용
이렇게 널려있는 가능성들은 메스티자를 이름모를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한다. 대립되는 정보와 관점을 인지함에 있어 그녀는 자신의 심리적 경계의 늪에 의해 좌우지된다. 그녀는 자신이 개념이나 생각을 엄격한 경계 안에서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치않는 생각을 쳐내기 위한 경계와 벽은 행동 습관과 경향을 공고히 한다; 이 습관과 경향은 내부의 적이다. 엄격함은 죽음을 뜻한다. 오직 유연함을 유지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정신을 수평으로도 수직으로도 뻗칠 수 있는 것이다. 메스티자는 꾸준히 습관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에서부터 떠나와야만 한다; 한 곳으로 집중되는 생각으로부터, 이성을 이용해 어떤 하나의 목적지(서구적 양식)를 향해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는 분석적 추리로부터, 이미 세워진 모양과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고 배제하기보다는 포함하는 그런 온전한 시각을 향하는 운동으로서 특징지어지는 서로 다른 생각들로 이동해야만 한다.
새로운 메스티자는 모순을 위한 관용, 양가성을 위한 관용을 개발함으로써 헤쳐나갈 수 있다. 그녀는 멕시코 문화 안에서 인디언이 되는 것을 배우고, 앵글로(Anglo)의 관점에서 멕시코인이 되는 것을 배운다. 그녀는 문화들을 놓았다 잡았다 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녀는 다수의 인격을 가지고 있고, 다원적 양식-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못생긴 것이든 아무것도 밀쳐내지지 않는, 거부되지 않는, 버려지지 않는-안에서 행동한다. 그녀는 모순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양가성을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녀는 그 양가성을 뒤집거나 융해하려는 격렬하고 종종 고통스럽고, 감정에 북받치는 사건들로 인해 흔들릴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그리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일은 땅 밑에서-잠재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영혼이 수행하는 일이다. 메스티자가 서있는 곳을 잇는 초점 혹은 받침점은 현상들이 충돌하는 곳이다. 분리되어 있는 모든 것을 결합할 가능성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 조합은 끊어져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조각들이 단순히 모인 곳이 아니다. 대립하는 권력들을 균형잡는 곳도 아니다. 합성체를 만들기 위해 자아는 잘려져 있는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세 번째 요소를 더한다. 이 세 번째 요소는 새로운 자의식-메스티자 자의식-이고 그것이 극심한 고통의 원인이라 해도 그것의 힘은 각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단일함을 계속해서 부수는 창조적인 몸짓이 지속됨으로써 생겨난다.
En unas pocas centruria, 미래는 메스티자에게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는 패러다임을 부수는 것에 달려있고, 두 개의 혹은 더 많은 문화들에 다리를 걸치고 있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화적 가치관(mythos)-현실을 인지하는 방식,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을 만들어냄으로써 메스티자는 새로운 자의식을 만들어 낸다.
메스티자 자의식이 할 일은 자신을 수용범(prisoner)으로 두는 주체-대상 이원론을 부수는 것이고 그녀의 그런 작업에서 살(flesh) 안에서 형상(image)을 통해 어떻게 이원론이 초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백인종과 유색인종 사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리 자신, 우리의 문화, 우리의 언어, 우리의 생각의 바로 그 밑바탕에서부터 시작된 분열에 대한 치료에 있다. 개인과 집단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이원론적 사고를 통째로 뿌리뽑는 것은 긴 투쟁의 시작이지만, 바라건대, 그것이 우리에게 강간과 폭력과 전쟁의 끝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La excrucijada / 사거리 (the corssroads)
닭 한 마리가 희생되고 있다
사거리, 단순한 흙무덤
Eshu의 흙으로된 사당,
Yoruba, 불확정의 신
그녀가 택한 길을 축복해주는
그녀는 길을 떠난다
Su cuerpo es una bocacalle. 메스티자는 희생양이다가 다시 사거리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여신부가 된다.
메스티자로서 나는 나라가 없다, 내 고향땅은 나를 쳐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나의 나라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여자들의 자매이고 잠재적인 연인이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으로서 나는 인종도 없고, 내 민족은 나를 부인한다; 그러나 나는 모든 인종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종 안에 내 안의 퀴어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문화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주의자로서, 나는 인도-히스페닉과 앵글로들의 남성중심적인 집단 문화와 종교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문화로 휩싸여있다 왜냐하면 나는 다시 또 다른 문화, 세상과 우리가 그것에 참여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에 참여하고 있고, 우리를 서로에게 이어주고 이 행성에 이어주는 형상들과 상징들로 이뤄진 새로운 가치계체의 창조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Soy un amasamiento, 나는 하나의 반죽하는 행동이고, 통합하는 행동이고, 어둠의 창조물과 빛의 창조물을 만들어낸 것뿐만 아니라 빛과 어둠의 정의를 질문하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창조물을 결합하는 행동이다.
...옥수수같은 선주민들, 옥수수같이, 메스티자는 다양한 조건에서도 보존될 수 있도록 구상된 교차번식(crossbreeding)의 산물이다. 옥수수의 귀-암씨(female seed)를 배는 기관-처럼 메스티자는 고집스러워서 그녀의 문화의 껍질 안에 단단히 싸여있다. 옥수수 심에 착 들러붙어있는 옥수수알처럼; 두꺼운 줄기와 튼튼한 버팀뿌리를 가지고, 그녀는 땅 위에 단단하게 서있다-그녀는 사거리들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Lavando y remojando el maíz en agua de cal, despojando el pellejo. Moliendo, mixteando, amasando, haciendo tortillas de masa. 그녀는 라임에 옥수수를 적신다, 그것은 부풀어 올라 부드러워진다. metate 위의 돌굴림대를 가지고 그녀는 옥수수를 갈고 또 간다. 그녀는 반죽하고 모양을 만들어 tortillas 속으로 동그란 공모양의 반죽을 두드려 넣는다.
우리는 돌 metate 안의 통기성 바위이다
땅바닥 위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는 밀방망이다, el maíz agua,
la masa harina. Somos el amasijo.
Somos lo molido en el metate.
우리는 지글지글 뜨거운 코말(comal)이다.
우리는 거친 바위다.
우리는 가는 몸짓이다,
섞어놓은 마약, somos el malcajete.
우리는 막자다, the comino, ajo, pimienta,
우리는 칠레 콜로라도다,
바위를 깨는 초록의 새싹이다.
우리는 머무를 것이다.
El camino de la mestiza / 메스티자 방식
... 그녀의 첫 번째 걸음은 목록을 가지는 것이다. Despojando, desgranando, quitando paja.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던 것만? 그녀 등에 지어진 무게-인디언 어머니로부터 받은 짐, 스페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짐, 앵글로부터 받은 짐?
Pero es difícil은 lo heredado, lo adquirido, lo impuesto 사이를 구분하는. 그녀는 역사를 체로 거른다, 거짓말을 까불어 골라낸다, 우리를 하나의 인종으로서, 여성으로서 하나의 부분이 되었던 힘들을 쳐다본다. Luego bota lo que no vale, los desmientos, los desencuentos, el embrutecimiento. Aguarda el juicio, hondo y enraízado, de la gente antigua. 이 걸음은 모든 문화와 종교의 모든 억압적인 전통에 대한 의식적인 파열이다. 그녀는 이 파열과 소통하고 그 싸움을 기록한다. 그녀는 새로운 상징을 사용해 역사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신화를 모양짓는다. 그녀는 어두운 피부를 가진 이들과 여자들과 퀴어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택한다. 그녀는 양가성에 대한 자신의 관용(그리고 관용못함)을 강화한다. 그녀는 나누고자 하며, 자신을 보고 듣는 낯선 방식들에 보호없이 그대로 열어두려고 한다. 그녀는 모든 안전이란 관념, 익숙함이란 관념을 포기한다. 해체하고 구성한다. 그녀는 나무, 코요테, 다른 사람으로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는 nahual이 된다. 그녀는 작은 “나”를 총체적인 자신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배운다. Se hace moldeadora de su alma. Según la concepcíon que tiene de si misma, así será.
Que no se nos olvide los hombres
"Tú no sirves pa' nada-
너는 아무짝에도 쓸 모가 없다.
Eres pura vieja"
“너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다”라는 말의 뜻은 당신이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그것의 반대는 마쵸(macho)인 것이다. “machismo”의 현대적 개념과 의미는 사실 앵글로적 발명품이다. 내 아버지같은 남자들에게, “마쵸”는 내 어머니와 우리를 보호하고 부양할 수 있을 만큼 강하고, 그러면서도 사랑을 보여준다는 뜻이었다. 오늘날의 마쵸는 가족을 먹여살리고 보호하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게 한다. 그의 “machismo"는 억압과 빈곤, 빈약한 자신감에 적응한 것이다. 그것은 위계적 남성 지배의 결과물이다. 앵글로는 부당하고 열등하고 무력한 자신에 대한 느낌을 바꿔서 치카노들을 희롱하면서 그 감정들을 이들에게 이전시켰다. 그링고(Gringo) 세계에서는 치카노가 과도한 비하와 자기소실, 자기수치와 자기비하로 고통받는다. 라티노들 주위에서는 이들은 언어의 부적절함과 그로 인한 불편함으로 고통받고; 미국 선주민들과 함께 할 때는 우리의 공통된 피를 간과하는 인종적 기억상실과 그에게 남아있는 스패인의 일부로 인해 스패인이 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억압했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받는다. 다른 편에서 온 멕시칸들 주위에 있을 때 그는 과도한 보상심리적 오만을 부린다. 그것은 깊은 인종적 수치심을 덧씌운다.
마쵸안의 이 존엄감과 존중감의 상실은 잘못된 마치스모를 낳아 여자를 경멸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잔인하도록 만든다. 이같은 성차별적인 태도와 함께 있는 것이 모든 것보다 우월한 위치를 갖는 어머니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다. 헌신적 아들, 마쵸 돼지. 그의 행동에서, 그의 존재 자체에서 수치심을 씻어내버리기 위해, 거울 속의 금수를 다스리기 위해 그는 병나발을 불고, 코카인을 하고, 마약주사를 맞고, 쌈박질을 한다.
.... 여성이 함부로 대해지면 질 수록 우리 안의 인디언과 흑인도 함부로 대해진다. 메스티자의 투쟁은 무엇보다도 여성주의적인 것이다. ... 우리는 이미 중간정도 와있다-우리는 어머니의 사랑, 좋은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 이제 내딛을 첫걸음은 puta/virgen 이분법을 잊는(unlearn) 것이다...
부드러움, 연약함의 기호인 이것은 (그렇게 될까)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여자들에 대한 언어적 폭력에서 쏟아지는 것이다. 남자들은, 오히려 여자들보다 더, 성별 역할에 속박되어 있다. 여자들은 적어도 그 속박을 부숴버릴 용기가 있다. 오직 게이남성들만이 그들안의 여성성을 드러내고 현재의 남성성에 도전할 용기를 갖고 있다. 여기저기 드물게 상냥한 일반 남자들이 외롭게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고, 뿌리뽑아내버리지 못한 성차별적 행위에 빠져있다. 우리는 새로운 남성성이 필요하고 새로운 남자들은 운동이 필요하다.
.... 동성애자들은 백인 퀴어들, 흑인, 아시아인, 미국선주민, 라티노, 이태리, 오스트렐리아, 이 행성 나머지 곳들의 퀴어들과 강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색, 계급, 인종, 시기들로부터 왔다.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을 서로서로 잇는 것이다-흑인인과 유대인들과 인디언과 아시아인과 백인과 치외법권의 모든 이들과. ...
메스티죠와 퀴어는 이 시점에서 목적을 가진 진화적 연속태 위에 존재한다. 우리는 모든 피가 복잡하게 섞여있고 우리가 비슷한 영혼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혼합체이다.
너의 진정한 얼굴을 보고 우리는 너를 알 것이다
... 공통의 문화 외에 우리는 우리를 함께 묶어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보다 더 넓은 공통의 바탕이 필요하다. ....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각성은 내부의 변화 이전에, 사회에서 그 변화가 일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 우리 머릿속의 형상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차이들에 관하여"

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4강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IV 차이들

20. HÉLÈN CIXOUS: [메두사의 웃음(The Laugh of the Medusa)] (1975)

식수는 차이가 양성애를 이해하는 중심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성적 차이말이다. 정신분석학적 전통에서(특히 프로이드와 라깡을 이어) 이성애와 동성애의 차이보다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 말이다. 식수의 주장은(Sellers 1994)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측면에서 양성애에 대한 정신분석한적 설명이 성적 차이를 사실상 흐리게 하고 중성화하는데 이는 그 설명이 남성성을 여성성보다 우위에 두고 여성성을 남성성과의 관계에서만 규정하거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은 다시 말해 여성성은 남성성의 반대 혹은 그것의 부정으로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차이를 부정적인 개념으로서 재현하는 이러한 ‘중성의(neuter)’ 양성애에 반대하여 식수는 ‘다른 양성애(other bisexuality)’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긍정적으로 서로 다른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양성애를 말하고 따라서 여성성은 남성성과의 관계 하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식수에 따르면 이 ‘다른 양성애’는 “여성적 글쓰기(Feminine Writing)", 즉 남성저자가 쓰건 여성저자가 쓰건 상관없이(식수는 실례로 James Joyce의 ”율리씨즈(Ulysses)(1992[1922])" 듬) 성적 차이를 차이로서 긍정함을 통해 표현된다. 이런 면에서 양성애는 정체된 것도 아니고 중성적인 것도 아닌 역동적이고 과정 중에 있으며 활기넘치게 살아있는 것이다.
다른 주체들이 서로서로를 알고 다시금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의 경계를 살아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신을 다른 이 속으로 들여보내고 다른 이 사이로 들여보내는 수 만번의 만남과 변화를 겪어 자신의 형태를 갖추는 여성들처럼. 양성애: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의 현재의 위치-각 개인에 따라,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혹은 두 성 모두, 둘 중 어떤 다름도 배제하거나 두 성 중 어느 성도 배제하지 않고, 이 ‘자기허용’, 욕망의 기입의 효과의 증식, 내 몸의 그리고 다른 몸의 모든 부분에 온통 드러나고 두드러지는.
‘여성은 양성애자다’; 남성은 그 남근중심적 사고로 인해 그저 기괴한 모양으로 프로이드와 그 후학들이 말한것처럼 ‘자신이 여자일까 싶은 두려움’으로 소비되는 단성애적 존재일 뿐.
어두운 대륙은 어둡지도 탐험못할 곳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어졌고 우리가 그렇게 믿었을 뿐. 그들은 우리를 두 가지 무시무시한 신화 사이, 메두사와 지옥 사이에 단단히 못박았다. 남근중심이성주의의 부인(sublation)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그것은 투쟁적이고, 오래된 모습을 재생산하며 거세의 교리 안에 정박되어 있다. 그들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았고, 그들의 욕망을 현실로서 이론화시켰다.
참 안 좋겠다 만약 그들이 여성들이 남성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면 혹은 어머니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다면. 그러나 이 두려움은 그들에게 편리한 것은 아닌가? 사실, 여성이 거세되지 않았다면 더 나쁘지 않았을까, 그들이 사이렌들의 노래 듣기를 멈추기만 했더라면 (사이렌들은 남자였으므로) 역사는 그 의미를 바꾸지 않았겠는가? 이제 메두사,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치명적이지 않다. 그녀는 아름답고 소리내며 웃는다.

21. Clare Hemmings: [양성애 정체성 위치짓기: 양성애 담론과 여성주의 이론(Locating Bisexual Identities: Discourses of Bisexuality and Contemporary Feminist Theory)] (1995)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와 차이의 실례로서의 양성애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 Hemmings는 여성주의와 퀴이이론과 정치학에서 차이 개념의 중요성을 반추하면서 이 분야에서의 정체성과 차이의 긴장은 이 분야 고유의 질병과 같다고 결론짓는다, 즉, 차이를 논하는 어떤 이론이건 역시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 정체성의 이론이고 정체성/차이 이항은(Ault가 19장에서 언급했던 다른 이항들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헤밍스는 이것을 문제로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양성애 이론가들이 이 모순되 보이는 것을 성적 주체성과 권력관계, 그리고 ‘위치의 정치학’의 시발점으로 활용해야한다고 제안한다. 헤밍스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이항구조를 구체화하는 데 있어 그리고 스스로를 급진적 주체들 혹은 ‘차이’의 살아있는 체현으로서 스스로를 재현하는 양성애자들 자신의 개인적이고 수사적(rhetorical)인 투자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검토를 포함한다.
양성애 담론들
차이의 이론들
여성들간의 차이에 대한 여성주의 이론은 자아의 분열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만약 초기 여성주의가 단일의미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남성성 모델을 재생산했다는 비난을 받는다면 최근의 ‘후기구조주의 학파’의 여성주의 이론에는 붙여질 수 없는 딱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에 대한 근래의 초점은 ‘양성애적 집’에도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일까? 여기 ‘퀴어 이론’도 관계가 있다. 퀴어이론은 여성주의 운동보다는 좀 더 자주 레즈비언과 게이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퀴어는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 내부에서의 분열과 차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같은 발전은 여성주의자들, 특히 레즈비언 여성주의자들의 모습 속에서 무엇이 정체성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여성주의적 관념의 진보와 섞여 짜여져 있다. 양성애 여성주의자로서 ‘집’은 아마도 이 이론들 중 하나 혹은 모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Teresa de Lauretis같은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자들/퀴어이론가들은 권력을 억압으로 보는 관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우리의 정체성은 권력의 네트웤과의 협상을 통해 그리고 그 협상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권력에 반대해서 혹은 권력의 바깥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Butler 1990, 1993; de Lauretis 1991). 이같은 접근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이 얘기되어야 하지만 최소한을 얘기한다면 그것이 이성애주의에 반하면서도 단일체이거나 정적이지도 않은 ‘비고착된’ 일탈적 정체성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포스트모던 이론이 정체성의 고정관념을 받쳐주고 있는 동일함(sameness)/차이(difference)의 대립을 문제삼을 수 있는가 아닌가이다. 레즈비언 여성주의 담론 안에서 양성애를 구성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에 의해 긍정적인 관념으로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위반(transgression)이라는 개념을 보면 전적으로 차이에 초점을 둔 몇 가지 문제가 떠오른다. 위반은 전체주의자들과 좌파 투사들이 공통적으로 썼던 변이가능한 규념이다(Wilson 1993). 그것의 주된 기능은 그러나 기존의 경계를 건너는, 현 위치의 고의적인 역전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반은 정말 지배적 담론에 도전할 수 있을까? 엘리자벳 윌슨은 위반을 다시금 위반할 필요가 생기는 새로운 경계를 설정하는 ‘더 나아가기’로서 규정한 미셸 푸코의 말을 바꾸어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지게 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적어도 영구히 계속되는 위반하는 나선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위반은 어떤 최종적 목적도 규정하지 않고 어떤 최종적 지배력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받아들여지는 행위의 경계, 예를 들어 성적으로 명백한 재현의 측면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경계, 바로 그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경계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Wilson 1993:110)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경계는 새로운 영역 혹은 새로운 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 위치의 위반은 사실 지배적 담론의 토대를 침식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합한다. 지배담론은 무엇이 지배적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규정하는 ‘타자’의 존재에 의존해 있다. 성정치(Queer,SM, etc.) 안에서 차이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초점이 후기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를 거부하는 차이와 맞먹는 따라서 동일/차이라는 양극이 여전히 유지되는 어떤 대안적인 반대를 그저 설정하지는 않는다. 차이는 차이자체를 특권화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위반이 실제로 담론을 떠받쳐주는 형식(forms)을 붕괴하지 않는다면 그 시도는 이항적 대립의 끝없는 나선운동의 또 다른 동반자가 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양성애가 퀴어와 후기구조주의이론 안에서 언급되나 결코 심각한 이론적 방식으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어 보인다. 예를 들어 테레사 드 로뤠티스는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에 단순히 하나 더해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그리고 질문하는 이들’ 식으로 되는 분류의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de Lauretis 1991:vi). 그러나 로뤠티스는 결코 실제로 레즈비언, 게이 연구에서 양성애를 포함시키는 것의 함의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사실상 그것을 다시금 언급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퀴어정치학에서 양성애는 주변화되어 있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많은 경우 회의가 양성애자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 않은 레즈비언과 게이 센터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Cherry Smyth는 "퀴어 관념에 대한 레즈비언들의 이야기(Lesbians Talk Queer Notions)(1992)“에서 여성주의와 퀴어정치학을 연결시키려는 용감한 시도를 하였다. 그녀는 ‘레즈비언’을 재발명하려고 하면서 현 퀴어정치학에서 양성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로뤠티스처럼 스미스도 양성애를 충분히 깊이있게 논쟁하지는 않았다.
양성애, 혹은 한 몸에서의 동성적 욕망과 이성적 욕망이 현존하는 것은 한시적이고 이동적인 위치로서의 정체성의 전형이라고 얘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즈비언이라는 단일체적 정체성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오직 레즈비언과 게이의 분류: 다시 말해 동일함의 위치로부터의 차이를 고정된 것으로 놓을 때나 가능한 것이 된다.
이항적 대립은 여성주의 안에서의 정체성의 정치학과 차이의 정치학을 구조화한다. 질문되는 ‘타자’는 달라질런지 모르나 그 범주는 달라지지 않는다. 타자화는 근본적으로 복잡한 고정이다. 그것을 위해서 당신은 받아들일 수 없는 바로 그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는 바로 이것이 여성주의 안에서 ‘위기’를 구성하는 규념(terms)논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비관적으로 봤을 때 차이의 이론은 그저 오래된 논쟁의 새롭고 변이가능한 형식일 뿐으로 보인다(더 많은 것들이 변할 수록 더 많은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양성애의 위치잡기
기존의 여성주의 구조를 통해서 양성애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여성주의적 모델과의 관계에서 양성애를 분석하는 것은 양성애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 어려움을 강조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양성애는 어디에 위치할 수 있는가? 어떤 입장에서 양성애 여성주의 이론은 검토될 수 있을까?
외부자 지위를 요구하면서
‘진짜 문제’인 동성애혐오증을 간과하게 한다고 비난하는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의 비난에서 양성애를 비호하기 위해 종종 양성애 정체성을 레즈비언과 게이 정체성을 넘어선 그 위의 것으로 둘 때도 있다.
양성애(나의 양성애)를 정체성 이론 안에서 동일과 차이의 이항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서 사용하는 것은 외부자 지위를 특권화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외부자 위치에서의 나의 (특권적인)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이 이항을 특히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으로서’ 재생산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그 ‘지독한 이항’이 ‘바깥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적은 거의 없다. 그 이항은 다른 것들만큼이나 나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주고 그것을 생산해낸다. 나 스스로와 나눈 대화, 내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이항, 세상을 보는 나의 방식, 이 모든 것이 내가 해체하겠다고 주장하는 것들을 재구성한다.
엘리자벳 윌슨은 양성애가 동성애와 같던지 아니면 더 약하던지 그와 다르던지, 그 어떤 경우이건간에 이성애적 영역에 드리어져 있을 수 밖에 없다(Wilson 1993)고 보았다. 이 틀에서 본다면 왜 양성애가 ‘외부자’ 지위의 관념을 껴안게 되었는지 혹은 배타적인 명예을 위한 경쟁으로 들어가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정체성의 정치학은 창문을 넘어가서 위반과 성별놀이라는 관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양성애를 또 하나의 비정치적 씹(fuck)으로 보는 윌슨과 달리 양성애를 배제하려는 시도는 거의 권력구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내부에서 비가시적이 되기보다는 외부에서 가시적인 것이 낫다. 그런 측면에서 다른 이들에 의한 그리고 스스로에 의한 양성애의 배제는 둘 다 굉장히 정치적인 것이다.
양성애적 이론화
양성애를 이론화하는 데에 있어서의 주요한 어려움은-또한 쾌락이기도 한 그것은- 참조할 토대적 분류의 부재이다. 레즈비언이나 게이남성의 욕망 구조에 대해서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치고 들어갈 전제와 정체성이 있다. 그래서 양성애 이론이 동일과 차이 분류를 비판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안적 구조는 충분히 이론화되지 못했다-등에 진 것 밖엔 돌아갈 집도 아직 없는 것이다. 양성애는 동일과 차이 안에서 생산되기도 하고 생산되지 않기도 한다. 그것을 통해서 의미를 얻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성애 주체가 위치할 만한 어떤 정체성도 그 안에서 가질 수 없다.
존재적 분류로서의 양성애자와 경험적 분류로서의 양성애 사이의 차이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동성애와 이성애 바깥에 위치하는 성적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또한 어떤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가정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한편 ‘정체성’ 관념을 거부하면 나는 양성애가 이론화될 수 있는 입장을 정연화하려는 욕망을 부정할 수 없어진다.
아마도 (1) 특정 양성애 정체성을 특권화하지도 않고 (2) 차이를 위한 차이를 특권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집과 방법론을 찾는 것은 특정 시간의 특정 위치들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레즈비언-양성애; 양성애-양성애 등등 무한히)
어떻게 개개인들은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가? 나는 주로 양성애‘프리섹스’ 남성보다는 레즈비언 여성주의자들과 가깝다가도 레즈비언, 게이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양성애혐오증에 대해서는 이 양성애 남자와 동맹하게 된다. 나는 동시적으로 계급, ‘인종’, 교육, 연령 등에 의해 위치지워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것을 ‘특수성(specificity)'이라는 규념으로 언급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못견딜만큼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어려움은 누가 한시적인 정체성와 동맹을 바탕으로 어떤 속함(belonging)이라는 느낌을 형성할 수 있는가이다. 참을 수 없는 질문은 어떻게 누가 또 다른 탈치(dislocation)된 주체들을 알아볼 수 있는 탈치된 주체가 어떻게 될 수 있는가이다. 탈치된 주체가 된다는 것은 두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양성애적인 것-을 현존하는 구조의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 안의, ’세상‘ 안의 모순을 읽는 것이다.

22. ANN KALOSKI: [양성애 싸이보그와 붙어나다: 정치학, 쾌락, 혼/난(Bisexuals Making Out with Cyborgs: Politics, Pleasure, Con/fusion)](1997)

이 글은 도나 헤러웨이(1990)의 ‘싸이보그’ 형상을 끌어와 쓰고 있다. 싸이보그는 인간의 살과 기계가 섞여있는 인간성의 변형체를 말한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싸이보그 주체는 인터넷 상의 상호역할게임을 하는 주체이다. 칼로스키는 도발적으로 이 게임을 하는 동안 이뤄지는 성적 상호작용은 인터넷에서뿐만 아니라 실재 생활에서도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재발명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칼로스키는 어떻게 이와 같이 비록 인터넷 싸이트 게임 참여자들이 (열개의 성별 선택 사항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성행위를 하게 될 경우 스스로 남자 혹은 여자 역할에 한정해서 역할선택을 하지만, 이같은 역할이 존재하는 방식, 참가자들이 성적으로 다른 참가자들과 참가자 스스로의 실제 자아를 뒤섞는 방식이 잠재적으로 (양)성애와 성적 차이의 의미에 의미심장한 효과를 가진다고 보고 있다. 칼로스키는 이 효과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에게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모양 바꾸기 이야기는 이미 실제 삶에서의 정체성과 욕망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감염이 어떤 식으로 퍼질지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성애의 미래는 여전히 예측되지 못하는 것이다.
가상 양성애
이 다음 부분에서는 나는 가상 싸이버 도시에서 발달하고 있는 특정 형태의 싸이보그에 눈을 돌렸다. 이 글 전체에서 나는 (i) 가상성(virtuality)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서, (ii) 좀 더 광범위한 관객들에게 새로운 용어(terminology)를 소개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몇 잘 알려진 가상세계 규념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1991년의 ‘잔디깎는 남자’같은 영화에서처럼) 그림과 도형(graphic)의 가상적 현실과 달리 이 가상현실은 글자를 통해 생성된다. 그 말은 즉, 모든 상호작용이 화면을 따라 내려오는 글자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몸들, 성별들, 성행위들(sex acts), 섹슈얼리티들은 언어를 통해 재형성될 수 있다. 둘, 셋, 넷, 그 이상의 컴퓨터 사용자들이 가상적 몸을 취해 거기에 성격과 개성을 불어넣고 서로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을 바로 그 시간에 동시에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몸이 없는 환경에서는 성행위(sex)가 가장 마지막에 생각되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성행위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첫째로 사람들이 다중대상가상세계(Multi-Objects-Oriented, MOOs)에서 서로 소통하는 방법이다. 거기엔 성행위를 위한 많은 공적, 사적 방들이 있고 대화는 항상 ‘안녕... 예쁜이, 엉덩이에 한 번 씹해줄까...’는 식으로 거칠진 않지만, 가끔은 그렇게도 진행된다. 사람들이 여기서 자신의 특징 (10가지 중 선택 가능한) 성별을 선택하고 원한다면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 하나의 성별 이상과 성행위를 한다는 생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성/성별이 변이되는 공간에서 양성애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당신의 여자 애인이 실제 삶에서는 남자라면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상세계는 양성애의 천국인가?
나의 관심은 글자를 바탕으로 한 가상현실이 양성애 싸이보그 주체가 실험되어질 수 있는 공간-심지어 실험실-으로서 읽혀질 수 있는 방법에 있다. 나는 싸이버공간(cyberspace)에서 이뤄지는 언설(narratives)이 섹슈얼리티, 성별, 육체성(corporeality)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위해 가상세계를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고 본다. 정체성을 내세우고 동시에 그것이 무너지는 바로 그 사이의 연결지점이 양성애 싸이보그를 예리하고 정치적인 형상으로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재조합된 양성애 (The recombinant bisexual)
가상세계에 대해 비관적인 전문가들 중 하나인, Arthur Kroker는 Michael Weinstein과 함께 쓴 글에서 ‘재조합된 몸(the recombinant body)’이라는 규념을 만들어 내었다 (Kroker and Weinstein, 1994).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싸이보그와는 다른 은유적 그리고 전자적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다: 싸이보그가 몸과 기계(인공두뇌적 유기체)의 융합(fusion)인 반면, 재조합된 몸은 몸과 정보로 구성이 되어 실제세계에서가 아닌 싸이버공간 어디쯤에서만 존재하거나 혹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글에서 재조합된 몸을 별개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싸이보그의 한 유형으로서 위치시키려 한다.
Julie M. Albright(연대미상)의 ‘글자 바탕 가상세계 속의 양성애 정체성의 등장’이라는 글에서 줄리는 온라인 여성 양성애 모임에서 양성애 정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에 관심을 두었다.
어떤 면에서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싸이보그인가? 한편에서 이들은 양성애 정체성을 발달시키기 위해 몸과 기술(technology)을 조합하고 있고, 이것이 이들을 싸이보그 양성애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또 한편에서 이 온라인 이메일 리스트는 스스로 양성애 여성이라고 정체화한 이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섹슈얼리티와 성별 분류 둘 다 가상세계 밖에서 확립된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참가자들이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자신의 정체성을 ‘재활용’하기 때문에 (Turkle, 1995) (싸이보그는 인간에 가까운 로봇과 똑같이 형태지워지지 않아도 되므로) 이 성적, 성별적 정체성들은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전에 이들이 어떻게 정체화되었던 상관없이 이 가상토론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양)성애정체성은 몸, 기계, 정보로 인해 양성된 것이 되었다.
올브라이트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하는 언설을 통해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을 사용하고 있다. 그녀는 양성애 여성 (bi-wimmin)이 새로운 형태의 양성애 정체성의 언설을 가상세계 참여자들을 통해 경험하고; 그것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각들을 생성하는 양성애 여성들이 함께 모여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싸이버공간의 참가자들이 특정한 효과를 생산하는 그런 곳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이곳은 가상세계의 상대적인 익명성이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열어놓을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이 가상적 공간은 현실세계에서는 금기인 비-일대일 관계에 대한 생각들을 즉각즉각 가능하게 한다. 셋째, 가상세계에서는 글자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양성애 정체성에 대한 어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양성애의 언어적 가시성을 위한 노력이 진행된다. 그리고 넷째, 이것이 올브라이트가 싸이보그 혼/란(con/fusion)의 방식으로서 상당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인데 직접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싸이버 공간의 반-구조(anti-structure)는 ... 이상적 낙원(utpoia)에서부터 프로그램까지 대안적 삶의 모델의 다수성(plurality)을 생성하고 저장할 수 있고, 이것은 주류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역할에서 .... 급진적 변화의 방향으로 이들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Albright, 1996(?)).
‘양성애 여성(Bi-Wimmin)’의 참가자들은 그것이 어떻게 협상가능하든 간에 어떤 종류의 정체성을 가정하고 있다. (대부분) 자신의 진짜 이름을 쓰고, 리스트의 목적은 어떤 면에서는 ‘진짜’ 성적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다. 다중대상가상세계에 로그온한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환상(예, 동물 형상물을 창조하는 것 같은)이나 관심(예, 포스트모더니즘)같은 공통의 관심사라는 연결지점을 가진다. 그러나 대체로 참가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지 않고 자신의 수행을 혼란스럽게 하고 뒤섞으려고 한다.
성과 성별로 되돌아가서
양성애 싸이보그는 가상세계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 가상세계와 양성애에 공통된 두 가지 관심은 성과 성별이다.
이쯤에서 가상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데 뭐가 컴퓨터 성행위냐?’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의 대답은 글자만이 모든 것이고, 성행위는 당신이 쓰는 말만큼 안정되거나 난폭할 수 있는 세계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대답은: 컴퓨터 성행위는 몸의 한 부분으로 (대체로 한 손의 손가락들) 자판기로 화면에 글자가 뜰 수 있도록 하고, 당신의 몸 다른 부분들에 성적인 쾌락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넷 위에서 자위하기’라는 말로도 잘 알려져 있다 (Butterworth, 1996).
자위로의 이탈 (A digression into masturbation)
교감하는 가상 성행위에서 자위는 어떻게 재규정되는가? 현실세계에서의 상호 자위적 행위와 다르게 가상세계에서는 하나의 몸과 둘 혹은 그 이상의 성적 파트너들이 있다. 당신 자신의 피부가 당신 자신의 피부를 만지지만 당신 손가락들 끝의 욕망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선으로 연결된 자위는 싸이보그 친밀의 시작이다. 무슨 새로운 (양)성애적 행위를 기술(technology)이 생성하는 것인가?
성별과 양성애의 관계는 가장 복잡한 지점이고 사실 어쩌면 혼/란의 지점이다. 양성애자들 사이에서는 성별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 ‘성별은 무관하다’ 혹은 사람들 사이의 그 같은 무의미한 차이는 무시해도 된다. 이 입장을 취하는 양성애자들은 ‘사람을 사랑한다’. 둘째, 양성애자들은 정확하게 -양성애적-이지 양성별적이지 않고, 양쪽의 성에게 끌릴 뿐이지 비슷한 성별적 특성에게는 끌리지 않는다. 클레어 헤밍스가 최근 영국의 대화프로그램 킬로이(Kilroy)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번 둘러보러 나갈 때 어떤 성(sex)이든 나는 가죽 재킷에 부치 태도를 가진 사람을 찾는다’. 셋째, 성별은 변이가능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특정한 차이를 인지하고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짐! 성별이었어. 그런데, 우리가 알던 그런 식으로가 아니야
람다(Lambda)에는 열 가지의 ‘포장되어 나오는’ 성별이 완전한 대명사로 제공된다. (현실 세계와 같은) 남자, 여자; (성별이 모호한) 스피박; 중성;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그것’인) 스플랫; 왕/완전; 제멋; 두 번째; 그리고 복수(plural) 등이다. 이 중 가장 인기있는 것이 프로그램 책을 쓴 마이클 스피박(1990)을 따라 지은 성별 ‘스피박’이다. 이것은 탈성별(post-gender)의 장소; 성별 딱지들에 압도되어서 인지가능하고 성별의 정의가 무의미해지는 환경인가? 한 번 보자....
(람다에서는 손님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공적인 성행위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한다. 여기서 10개의 성별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지 어떤 성별도 선택안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람다에서 어울리기 위해서는 스피박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다. 남자이거나 여자여야 하는 것이다.) Anne Balsamo에 따르면:
싸이버 공간은 백인 남자에게 그들의 문화적 부담감에서 잠시 유혹적인 휴식을 제공한다. 싸이버공간의 허구의 이야기는 진부한 살덩어리로서의 몸을 떨궈내는 환상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허구는 몸에 기반한 차이와 지배의 체계를 근절하지는 않는다.
(Balsamo, 1995)
나는 간단하게 양성애의 의미에 영향을 주는 가상세계의 싸이보그 성별에 대한 세 가지 측면을 규정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성별을 선택할 가능성은 열려져 있다. Sherry Turkle이 가상세계 정체성에 대해 한 연구는 성별 놀이 경험의 기간에 주목한다 (Turkle, 1995).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성별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동시에 변이적인 것이다: 이 말은 가상적 드랙(drag)은 주체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다중대상성행위가 흔한 것이 되면 많은 가상세계 속의 일반(straight) 참가자들은 가상의 동성 성행위를 갖기 위해 성별을 바꾼다. 이것은 양성애에 대한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기계 속의 성행위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고무시키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둘째, 다른 참가자들의 현실세계 성별을 만드는 참가자들 사이의 중요성. ‘너 남자니 여자니?’ 혹은 ‘너 정말 여자니?’라는 것은 말을 처음 걸 때 하는 익숙한 질문이다. 이렇게 분류에 집착하는 것은 오직 단순반응인 것일까? 그것은 또한 성별의 다른 의미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세계에서의 ‘진정한’ 표현과는 모순되고 대조되는 가상세계에서의 정체성 표현으로서의 성별말이다. 성별을 고착화하려는 시도의 행위자체가 결국 성별이 변이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 번째 지점은 다중대상 가상세계에서 상투적 성별의 유행과 관련되어 있다. (파멜라 앤더슨이 실베스타 스텔론을 만나다와 같은) 상투성의 극단은 현실세계 성별의 가상세계로의 이동이 아니라 게이 여왕, 부취-펨 레즈비언의 형태 속에서 새로운 성별의 연결점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두 성 모두와 씹하고 싶다/욕망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레이텍스(laytex)와 폰섹스와 싸이버섹스가 성적 차이를 대체하고 있고 새로운 성감대를 생산하고 있는 때에 양성애는 무엇을 의미할 있는가?
로그오프를 하면서...
.... 그러나 람다에 와서 나를 만나서, 내게 말을 걸고 myx에게 메시지를 남겨보라.

"양성애적 인식론"

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III부 양성애적 인식론 (Bisexual epistemology)

16. Yasmin Prabhudas: [양성애자와 혼혈(/종)인: 변화의 중재자들 (Bisexuals and People of Mixed Race: Arbiters of Change)] (1996)

이 글은 양성애 정체성과 ‘혼혈’ 정체성 사이의 유사함에 대한 논쟁을 펼치고 있다. 프라부다스가 이런 관점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Tracy Charette Fehr(1995)도 ‘이중적 성질(dual nature)’에서 비슷한 관점을 표현했고, 준 조던도 ‘유사함은 인종간 혹은 다인종간의 정체성이다. 나는 양성애의 유사함이 다문화적, 다민족적, 다인종적 세계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92b:193)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라마기오레도 지적했듯, ‘인종’과 섹슈얼리티의 상호 역동성은 양성애 사상에서 중요한 요소이고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은 특히 많다. 애디는 이것을 ‘이종족간 결혼’과 ‘혼종성’으로 형상화했고, 미국 사회에서 인종분류를 할 때의 기준인 ‘한 방울의 피’에 대한 클레인의 호소 등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른 저자들은 유대인이 기독교도로 ‘통과되기(passing)’하거나 양성애자가 일반이나 이반으로 ‘통과되기’하는 것과 같은 ‘실재의’ 자신보다는 다른 어떤 것으로서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통과되기’되는 것에 주목한다 (Tucker, 1996). 이같은 비유의 사용은 상호연관됨의 중요성과 구분 흐리기를 강조하는 인식론적 관점을 만든다.
양성애적이 된다는 것은 게이이면서 동시에 일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동시에 양 성의 사람들과 충만한 관계를 맺으면서 혜택을 입는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사회에서) 혼혈이 된다는 것은 (대개는) 흑인이자 동시에 백인인 것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두 문화의 풍부함에서 동시에 혜택을 입는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양성애자와 혼혈인들은 자주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둘은 모두 이반/일반으로 구분된 집단에서 혹은 흑인/백인으로 구분된 집단에서 동시에 소외될 수도 있고 ‘사이인’으로서 종종 비웃음을 사면서 쫒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도 긍정적인 효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양성애와 혼혈인은 두 영역에서 이 영역들이 하나의 세상에서 얽혀 짜여져 있는 실타래라는 경험을 통해 종종 서로 아주 멀리 있는 이 영역들을 가깝게 한다.

17. Elisabeth D. Däumer: [퀴어 윤리학: 혹은, 레즈비언 윤리학에 대한 양성애의 도전(Queer Ethics: or, the Challenge of Bisexuality to Lesbian Ethics)] (1992)

다우머는 양성애의 유용함과 한계를 첫째는 정체성으로서 둘째는 인식론적 관점으로서 동시에 고려한다. 그녀의 논쟁은 양성애의 이 두 영역이 서로 너무나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일 양성애적 인식론적 관점이 주는 통찰력을 받아들이려면 양성애를 정체성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체성은 상대적이라 할지라도 항상 어떤 면에서 고정되고 안정된 것일 수 밖에 없지만 양성애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급진적 인식론은 바로 그것이 가진 모호성과 자기 모순에서 오는 것이다. ‘양성애적 관점’이라는 관념은 클레어 헤밍스(1997)같은 다른 이론가들도 취하고 있다. 다우머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와 가버가 보여준 ‘Tiresias’ 신화에서처럼 ‘레즈비언 남자’의 형상을 Cloe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가 레즈비언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모니끄 위티그의 말처럼 레즈비언은 ‘성(여성과 남성) 분류의 바깥에 있다. 왜냐하면 해당 주체(레즈비언)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Wittig 1981:53). 만약 기존의 성정체성과 성별정체성을 거부하는 여자와 남자가 있고 이들이 관계를 가진다면 이것이 레즈비언 관계일 수 있는가? 아니면 이런 사고가 오히려 레즈비언을 보다 새롭고 위험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인가? 어떤 여자나 남자가 자신들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정의내리고자 할 것인가? 이런 관계의 개념은 어떻게 기존의 이성애적 특권이 이 관계 속에 여전히 잔존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게 하는가?
만약 클로에Cloe가 스스로를 더 이상 이성애자로도 레즈비언으로도 그리고 양성애자로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녀가 갖는 여자 혹은 남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클로에는 성적인 자신, 성별적인 자신으로서 가지는 많은 가능성, 그것이 성적이든 성감적(erotic)이든 지적이든 상관없이 이뤄지는 정열과 끌림, 환상과 관계의 많은 가능성, 현재 우리에게 가능한 섹슈얼리티 담론 안에서는 짜증나도록 숨죽여져있고, 말해지지 않는 그 가능성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클로에를 양성애라고 부르는 것은 주저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두 개의 대립된 성적 지향이라는 이항적 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으로든(Bi Any Other Name)”이라는 글은 양성애가 가시화될 때 그것은 성적 취향의 불변성과 성적 취향을 통해 구분된 사회적 구분을 문제제기함으로써 ‘단성애적 틀(monosexual framework)'을 붕괴시킨다는 것을 한 번 더 보여주고 있다(Hutchins and Kaahumanu 1991:3).
양성애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작동을 통합한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양성애는 이항적인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틀 때문에 생겨난 동성애혐오증과 성차별주의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주의자로서 그리고 레즈비언여성주의자로서인 우리 안에도 뿌리깊이 박혀있는 이항적인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틀을 검토하고 해체할 수 있는 인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유리한 위치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양성애를 하나의 관점으로서 받아들였을 때 가질 수 있는 혜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양성애는 정체성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모든 정체성의 모순과 틈, 즉 정체성 내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2) 양성애는 그 안에서 각각 서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정치화된 성적 정체성의 독특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3) 상호배탁적인 성적 문화 사이에 모호하게 위치해 있기 때문에 양성애는 우리로 하여금 강제적 이성애 제도와 이성애 관계를 갖고 있든 그렇지 않든 이성애주의에 저항하는 개별 여성과 남성의 노력 사이의 차이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성애를 문제삼도록 할 것이다.
4) 양성애적 관점은 모순된 성적 그리고 정치적 정체성들의 전쟁을 그 내부에서 행하기 때문에 정체성과 공동체 사이의 다리가 되 줄 수도 있고 우리 안의 공통점에 주목하기 위해 인종, 성별, 섹슈얼리티의 불가피해보이는 차이를 한시적으로 ‘잊을’ 능력을 강화해 줄 수 있다.

18. Gilbert H. Herdt: [양성애의 유동성과 문화적 특징에 관한 논평(A Comment on Cultural Attributes and Fluidity of Bisexuality)](1984)

양성애적 인식론에 대한 많은 공식들이 ‘유동성’ 개념을 양성애가 가진 내재성으로 간주한다. 이 글은 바로 이 ‘유동성’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양성애의 ‘유동성’은 (사실은) 많은 서로 다른 면들을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주장한다.
유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유동성과 그것이 참조하는 것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유동성은 흐를 수 있는 역량 혹은 쉽게 변하거나 혹은 고정되 있거나 고체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양성애 정체성에서는 무엇이 변할 수 있는가: 성별 역할, 성적 정체성, 대상 선택, 성적 접촉에 쓰이는 성감적 기술(예, 구강성교 대 항문성교), 성적 접촉의 배타성, 혹은 접촉인지 관계인지를 특징지어주는 친밀함의 정도 등일 것이다.
Weeks(1977)는 중요한 정황적 특수요소가 성적 정체성과 성문화 사이를 중재한다고 보았다. 한 개인의 수 많은 요소들이 일생동안 변하는데 어째서 성적 정체성은 평생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성적인 일부일처제(혹은 단일 대상 파트너쉽)와 배타성이 그것의 근저가 아니라면 말이다.
성적 정체성과 유동성의 상호연관된 측면이 네 가지 있다. 첫째는 문화적으로 구성된 생애주기가 상대적으로 유연한 양성애적 책임과 선택을 허락하는 것으로 변천한다. 사회는 성적 규제와 허용에 따라 다양하다. 그 같은 요소들은 한 사회의 노동분업(D'Andrade 1966)과 성적 계층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멀레니시아인들(Melanesian)은 특정 시기에는 남성 간의 성적 접촉만을 허용한다. 미국 사회의 경우 사춘기 청소녀/년들은 동성과의 관계가 더욱 긴밀하고 종종 성적 접촉으로까지 진전되기도 한다. 영국의 기숙학교 그리고 유럽의 대학진학 전 학교에서도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 이 같은 경우는 혼전 성관계와 혼외 성관계에 대한 금기가 강함에 따라 나타난다. Paul(1983/1984)은 순차적인 양성애와 동시적 양성애의 대비를 잘 보여준다.
유동성의 두 번째 측면은 양성애적 성감적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에서 대조적 특색으로 쓰이는 성적 기호와 상징의 문화적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 현상학적으로 이러한 성감적 가능성들은 실제 무한정하다. 성별 차이를 세 가지 영역에서 성감적 특징으로 분류한 프로이드([1953]1925)의 유명한 에세이는 이것을 신체적 구조(성적 기호), 정신적 특성(남성적 혹은 여성적 상징), 그리고 대상물(내부에서 다른 이에 대한 흥분이 자극되는 기호와 상징)로 분류했다. 세 가지 영역에서 양극성(polarity)의 정도가 문화 속으로 구조화된 정도에 따라 성적 규제의 정도가 결정된다. 누가 누구와 상호작용할 것인지, 어떤 성적 행동이 허용되고 어떤 조건이 선호되고 받아들여지는지 등의 질문과 그것이 말해주는 사회적 압력은 궁극적으로 성정 정체성의 선택을 한정하는 것이다. 남/여 사이, 서로 다른 인종 사이 등 잠재적인 성적 대상과의 관계가 규제되고 억압되면 될수록 성적 긴장감은 커지기도 할 것이다. Stoller(1979)는 이러한 성감적 지형을 재기넘치게 조사했다. 맹목적 숭배(fetishization)의 개념은 성감적 요소들의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내적작용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더욱 깊이 있게 해준다(Herdt 1982).
세 번째 측면은 서구 문화에서 일부일처제에 대한 압력이 강한 가운데 양성애에 대해 보이는 부정적 반응과 관련되어 있다. 서구 이반(gay)들은 이반적 삶의 제도화를 위한 노력에서 양성애가 어려운 문제라고 보며 이성애적 가족 성원들은 양성애자들이 이성애적 선택을 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선택의 문제가 핵심이다. 경계를 흐리거나 대립되는 둘을 무시하거나 하는 것은 양성애가 이성애 혹은 동성애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압력을 가할 때는 무관한 것이다.
멀레니시안 사회에서는 이성애나 동성애의 양분된 분류에 따라 사람들이 분류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그들이고 그냥 존재할 뿐이며 생애주기 동안 동성이나 이성 누구와도 성적 접촉을 할 수 있고 그럼에도 매우 규제적인 성적 체계(code)를 가지고 있다. 삼바(Sambian)남성은 동성과 이성과의 관계를 두루 겪어보고 이를 비교 평가하여 서로서로 그 경험에 대해 나눈다. 양성애에 대한 낙인은 없다.
유동성의 마지막 측면은 개인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갖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성적 상호작용 사이의 상관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동성사회적 행위와 동성애적 행위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동성사회성(homosociality)는 배타적으로 동성끼리 사회적 접촉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성별 역할이 양극화되면 될수록, 성적 코드가 규제적이면 일수록, 동성사회성의 발현정도는 높다. 동성사회성과 동성애는 상호의존적 요소이지만 범문화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동성사회성이 동성애로 불가피하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Messenger 1969). 문화적으로 특수한 개념 혹은 상황이 동성사회적 관계에서 어떤 특정한 유형의 성감적 반응의 발달을 허용하는 것일수도 있다. Doi(1981:118)의 아매amae개념은 일본 문화에서 동성적 감정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친밀한 남성들 사이에서의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사랑에 대한 욕망이 ‘동성애적 감정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19. Amber Ault: [모호하지 않은 성/성별 구조 안에서의 모호한 정체성: 양성애 여성의 예(Ambiguous Identity in an Unambiguous Sex/Gender Structure: The Case of Bisexual Women)] (1996)

이 글은 양성애 여성들이 매일매일의 현실에서 취하는 인식론적 전략을 살피고 있다. 가버와 다우머와 같이 Ault는 양성애를 정체성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양성애의 잠재적인 변형능력이라는 인식론적 힘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질문지 연구를 통해 올트는 양성애 여성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과 여성주의, 레즈비언 혹은 양성애자들의 정치적 논쟁에서 가지는 위치에 대해 가지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어떻게 겪어내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응답자들이 불안정성, 반이항성(anti-binarism), 유동성으로서의 양성애가 가지는 변형적 잠재력을 믿는 한편, 스스로의 양성애적 자아를 설명함에 있어서는 성별과 섹슈얼리티라는 이항적 틀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어 양성애의 잠재력을 잘라버리고 있었다. 이로써 올트는 양성애 정체성과 양성애 정치학은 서로 맞서고 있는 형국이라고 보았다.
올트는 담론, 구조, 정체성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모호한 정체성 분류에 의해 표식된 주체의 담론적 협상을 추적했다. 정체성을 담론적 산물로 취급하는 것은 구조적 맥락에 의해 의미있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문화적으로 모호한 ‘양성애적’ 정체성 분류를 택한 여성이 지배적 성별 구조의 측면에서 위치지워지는지, 어떻게 이들이 이성애자들과 레즈비언들의 사회적 비난에 대응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구조와 주체성에 대한 최근의 연구작업들은 담론, 지배, 정체성 구성이 가지는 관계를 조사해 왔다. 백인인종주의, 남성우월주의, 기독교적 반유대주의, 식민적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연구는 어떤 지배적 집단들이 자신들이 배제하고자 하는, 속박하고자 하는, 통제하고자 하는 집단에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적 구조와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강화하는지를 통해 담론적 실천에 대해 살피고 있다(Corroto, 1996; Ezekiel, 1995; Frankenberg, 1993; Said, 1978; Taylor, 1994). 탈식민연구, 문화연구, 퀴어이론, 사회운동분석 등은 어떻게 낙인화와 지배가 일탈적 정체성 형성의 바탕으로서, 주변화된 주체들의 정치화를 위해, 반대되는 의식의 등장을 위해, 성적,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의 정치적 동원을 위해 복무하는지를 보여준다 (Butler, 1990; Fanon, 1969; Sedgwick, 1990; Taylor and Whitter, 1992; Terry, 1990,1991). ‘병리적인 것’이라는 분류가 ‘규범적인 것’을 안정화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개념화했던 에밀 두르케임([1893]1964, [1895]1964)처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주변과 중앙, 하위주체와 식민주체가 상호 거리두기와 상호부정의 과정을 통해 서로서로 지속적인 협상을 한다고 주장한다. 두르케임과 달리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Smart 1993)은 중앙이 주변을 생산하는 코드를 확립하는 상징체계를 중앙이 틀어쥐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상징체계로부터의 탈출 불가능성도 용인하기를 바란다.
지배적 체계의 이항적 구조를 벗어나는 어려움은 모호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회적 분류에 대한 연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포리아, 양가성, 비결정성, 담론 종결이라는 질문, 행위자성에 대한 위협, 고의성의 상태, 개념을 전체화(totalizing)하려는 것에 대한 도전을 살피는 최근의 이론적 고무에도 불구하고’ (Bhabha, 1994; Visweswaran, 1994), 사회학자들은 종종 비결정적 주체를 분류의 양가성이 주는 쾌락과 위험을 중심으로 조사하기 보다는 다른 지배적 분류의 하위집단으로서 분석한다. 양성애 여성은 레즈비언 공동체가 그들을 거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 공동체와 연결되어져 왔다 (Ault [1996b], 1994; Blumstein and Schwartz, 1974; Clausen, 1990; Rust, 1993). 주변화된 집단들의 일탈에 대한 그와 같은 연구들은 담론, 정체성, 지배의 헤게모니적 체계(Gramsci, 1971) 연구에 큰 공헌을 했고, 어떻게 주변화된 집단이 지배적 담론을 자신들 고유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효율적으로 활용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성애 여성에 대한 레즈비언들의 낙인을 레즈비언의 이성애적 구성의 되풀이로 보는 것은 이것을 지배적 위치에서 읽는 것이고, 억압의 역동성을 일반화시키는 것이고, 각각의 사회적 지점을 하나의 보다 큰 이항체계 형상의 반복으로 읽는 것이다.
양성애를 이성애/동성애 구분 속에서 개념화하는 것은 지배적인 이성애 집단과 모호한 양성애 분류와의 직접적 관계를 생략해 버리게 하면서 모호한 주체들이 이미 지배화된 집단(여기서는 레즈비언)에 의해 가장 명백하게 ‘억압받는’ 존재라는 인상을 남게 한다. 이항적 논리의 승인은 모호한 분류를 주변과 중앙의 사이로서 봐야할지 그 이상의 것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다중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반되는 분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봐야할지 어렵게 만든다.
지배적 담론 체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체계의 측면은 항상 그것의 전복가능성을 전제하고, 이항적 대립은 궁극적으로 재조합을 통한 분류의 위반 가능성을 예시한다. 담론은 구조에 의해 모양지어지지만, 구조를 불안정화하는 재귀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정도까지 물적, 사회적 불평등이 정체성체계의 협상에 의해 바뀌어질 수 있을까? 지배와 자유의 지점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점점더 조직되고 있는 사회에서 ‘분배’를 넘은 ‘인정(recognition)’을 위해 경쟁하는 운동에서 (Fraser, 1995; Epstein, 1987; Taylor, 1994; Hennessey[1993]), 사회이론가들은 구조, 담론, 정체성, 주체성, 정치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 양성애 여성은 특별히 흥미로운 예를 제공한다. 양성애라는 명칭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별을 조직하는 이항적 체계를 참조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많은 정치적인 양성애 여성의 사안은 서구 문화의 이원론, 특히 이항적 성/성별/섹슈얼리티 체계를 명시하는 것을 철저히 맹공격하고 (Rubin 1975), 양성애 정체성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온 구조로서 여성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이론화해온 이원적 사회체계에 도전한다고 본다(Ault, 1994; Firestein, 1994). 양성애라는 분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담론적 행위자들은 지배적 범주를 붕괴하거나 뛰어넘거나 안정화시키는데 복무하는가? 지배적 구조는 어떻게 양성애 정체성과 양성애 기호 아래 나타날 수 있는 어떤 행위자들의 담론적 생산물도 억제하는가? 양성애 주체성의 어려움은 특정한 때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정체성이 생산될 때 구조와 담론의 관계성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가? 그리고 지배적 범주를 붕괴시키고자하는 이들에게 이 질문들의 해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푸코는 ‘담론이 권력을 전달하고 생산한다: 담론은 그것을 강화한다, 그러나 그것을 폭로하고 그것의 토대를 침식하기도 하고, 그것을 약화시키기도 하고, 훼방놓기도 한다’고 보았다 (1980:100-101).
이 글에서 저자는 양성애 정체성을 성/성별 구조 속에 모호하게 위치해 있는 담론적 대상(Lorber, 1994; Rubin, 1975)으로 검토하면서 성적 정체성의 형성에서 구조와 권력의 의의를 생산하고 억제하는, ‘침식하고 폭로하는’, 저항하고 보강하는 담론의 역량에 대해 양성애 정체성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양성애 틀잡기
왼쪽에 레즈비언을, 오른쪽에 근본주의자들을
19-20세기에 등장한 다른 많은 성적 정체성들과 마찬가지로 (Terry 1990,1991) 양성애 분류도 섹슈얼리티에 대한 의료담론에서 모양이 지워졌다. 먼저 성과학자들의 글에서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프로이드의 작업에서 다시 나타났으며 (Evans 1993) 에이즈에 대한 의료적 담론과 대중담론에서 병리화된 몸으로서 나타나면서 제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Ault 1995; Crimp 1992). 의료적, 대중적 담론에서 병리화된 양성애의 몸은 남성의 몸이었으나 1990년대에 나타난 정치화된 양성애는 주로 여성이었다 (Weise 1992a).
양성애는 우파 기독교집단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집단 양쪽에서 낙인찍혀왔다. 1992년, 우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콜로라도에서 ‘양성애 지향’을 합법적으로 차별화할 수 있는 퇴행적 법안을 지지했다. 캘리포니아의 전통가치연합(Traditional Values Coalition)은 양성애자들을 ‘진정한 변태’라 불렀다.
모순되게도 비슷한 모습은 남성 이반이나 성(별)전환인, 혹은 양성애의 문제가 남성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많은 좌파 여성주의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양성애는 이반으로 커밍아웃하기 전의 상태일 뿐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설사 존재한다고 생각한다하더라도 양성애가 레즈비언 정치학이나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보았다 (Ault 1994).
이런 정황 속에서 양성애자로서 스스로를 위치시켰던 여성들은 두 가지 경쟁적인 목적을 위해 조직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사회적 인정을 증대시킴으로써 ‘양성애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항적 정체성 범주를 뒤엎는 것이었다.
양성애적 행위자성 그리고 이항적 성구조 안에서의 정체성
두갈래로 나뉜 주체성
이원주의를 박살내겠다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양성애 여성들은 지배적인 이성애/동성애 분류체계를 자신의 양성애 주체성에 대한 설명에서 재접합, 재강화하고 있었다. 양성애를 이성애, 레즈비언, 게이를 통일된 주체로서 이행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반반’으로 그려냄으로써 양성애 여성들은 양성애 주체성을 관습적 줄을 따라 갈라져 있는 것으로서 구성한다. 이는 ‘반(half)동성애’, ‘반(half)이성애’(Rust 1992)로 말해지기도 하고, ‘양성애 쪽’, ‘레즈비언 쪽’으로 말해지기도 하고, 양쪽 성별에 모두 끌리는 것, 자신의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을 모두 드러내는 것‘ 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누구쪽? 비가시성의 정치학
통일된 양성애 주체성의 형성에 반하는 구조적 압력의 결과로 양성애 여성은 종종 구조적으로 양분된 정체성의 어떤 특징을 선택해서 상반되는 분류를 따라 구조화된 사회 세계를 부정할 것인지 강조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놀랄 것도 없이 양성애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양성애 여성이 ‘앙갚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합법성이나 유효함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수치심 등으로 인해 스스로를 양성애로 표하지 못하도록 한다.
퀴어은폐기제
양성애여성들이 현재의 성구조에서 취하는 위치 중 또 하나는 성분류체계를 새롭게 재배치하는 것이다. ‘레즈비언’, ‘다이크’, ‘이반’ 등이 양성애 여성에게 여성공동체로 통합될 가능성을 제공하는 한편, ‘퀴어’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으로의 통합을 허용하고 성적 이항체계를 재배치하게도 한다. ‘게이’ 혹은 ‘레즈비언’의 오래된 별칭이었던 ‘퀴어’는 1990년대에 재생과정을 거쳤다. 1970, 80년대에 여성을 비하하는 수많은 별칭들을 재활용했던 여성주의 운동가들을 따라 급진적 여성주의자들과 게이 운동가들은 1990년대에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 안에서의 개념을 격려하기 위해 퀴어나라를 조직하면서 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Gamson 1995; Whittier 1995).
최근 퀴어운동가와 퀴어이론가들에 의해 활용되면서 게이, 레즈비언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이든 자신의 기질, 행위, 혹은 지배적인 성/성별/성적 정체성 체제를 비판하는 데에 공감하면 ‘퀴어’를 뜻하게 되었다 (de Lauretis 1991; Gamson 1995; Seidman 1993; Stein and Plummer 1994; Warner 1993). 이를 따라 이성애주의적 체제를 붕괴시키고자 하는 상당수의 양성애 여성들은 스스로를 퀴어로서 명명한다. 퀴어는 보다 대항적이고, 보다 비판적으로 비이성애스러운 느낌이 들게 한다고 많은 양성애여성들은 말한다. 양성애 여성에게 퀴어는 성적 다중성과 퀴어와 비퀴어의 이항적 세상의 구성에서 차이를 생략할 수 있는 역량을 주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퀴어/비퀴어 이항이 이성애/동성애 이항을 대신하면서 양성애는 또 다시 비가시화되고 경계는 새롭게 구성된다.
‘쾌락 두 배, 재미도 두 배?’ 양성 중심성과 단성애의 한계
양성애여성들이 말하는 대안적 이항체계는 양성애를 이성애자들보다는 게이와 레즈비언과 보다 가깝게 표하는 퀴어동화전략과는 다르다. 양성애의 본질화와 일반화는 양성애를 다른 성적 타자-단성애-에 반하여 특권화한다. 이 담론은 양성애자를 주변으로부터 중앙으로 이동시켜 양성애와 양성애 정체성이 규범적이 되고 이반과 이성애 남성과 여성이 상대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게 한다. 이 모델은 게이, 레즈비언, 이성애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반성애적(semisexual)'이라 보고 오직 하나의 성(sex)하고만 친밀함을 추구하는 병리적인 섹슈얼리티라고 위치시킨다. (그러나) 양성애를 지배적인 분류로 두는 것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는 분류를 부정하는 것이고 ’누구나‘ 성적 혹은 개인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위치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담론을 다시금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세상은 다시 양성애와 단성애로 양극화된다. 이 집단은 성적 이원주의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성적 대상은 하나 혹은 다른 하나다. 대안적 ‘저항’담론은 단성애를 하나의 주변화된 타자로 생산한다. 이성애자들과 레즈비언 담론이 양성애를 타자로 만드는 한편 이성애/동성애 이항에 비판적인 양성애담론은 양성애적 몸을 ‘이성애’와 ‘레즈비언’ 사이에 틀어박고 양성애를 새롭게 구성되고 이제 낙인찍히게 된 집단적 타자인 단성애에 반한 합법적이고, 규범적이고, 중앙인 것으로 확립시키면서 이 분류를 공통된 주변으로 이동시킨다.
양성애자들 진실된 그리고 최신의
일단 성체계(sexual system)가 양성애/단성애 구분으로 재정비되고 나면 양성애 여성이 양성애의 정당성을 확립할 책임을 안게 된다. 양성애 여성에 대한 우파 종교의 반대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공동체의 공통된 반대를 봤을 때, 양성애의 정당화를 위한 기준이 이성애여성의 정당화와 레즈비언의 정당화를 명시하는 것과 닮은 것은 놀랄 것이 없다. 진실됨, 정조, 책임감, 합일체에 대한 헌신성,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적 대상, 심지어 소위 전통적 보수 가치도 진실, 합당, 진정 실재하는 양성애의 구성적 특징으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이 담론은 ‘문란하고’, 비정치적이고, 혹은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향한 사회의 비난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않은 양성애자들은 교정의 대상으로 두게 된다.

"양성애적 인식론"

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III부 양성애적 인식론 (Bisexual epistemology)

13. Jo Eadie: [양성애의 활성화: 양/성적 정치학을 위해(Activating Bisexuality: Towards a Bi/Sexual Politics)] (1993)
미국, 영국 등지에서 양성애와 양성애자는 레즈비언, 게이 담론과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왔는데 이것은 우연이기보다 좀 더 깊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비롯된 증상이다. 이 증상은 동성애건 이성애건 서로를 서로에게서 분리하는 차이를 양성애가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애디는 이 불안정은 오히려 환영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양성애 혹은 양성애자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성애/동성애 쌍의 붕괴가 궁극적으로는 섹슈얼리티가 영위되고 조직되는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양성애는 성적 다양성에 대한 사고에서 ‘혼성(hybrid)'의 위치를 갖는다.
양성애식 소개
성적 대상이 남녀 둘 다인 양성애는 이중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양성애와 게이, 레즈비언과의 강등은 비일관된 규정 때문이다. 성적 정체성의 불안정성은 전장이 되었다.
양성애는 성정치적 현상의 범위 속에서 얘기될 수 있다. 이 범위 안에는 스스로를 양성애자라 규정하는 사람들, 적극적으로 레즈비언, 게이, 일반(straight)이라 규정하는 이들 중 동성, 이성에 대한 욕망과 행위를 하는 이들, 양성애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법을 벗어난 (outlawed) 양성애적 감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 남,여 모두를 욕망하지만 ‘양성애’라는 규념이 문화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위협과 안전에 관한 것이다. 양성애자들이 배제되어온 이유와 (양성애자들로부터)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세 가지 이유에서 제기되어 왔다. 첫째, 권력집단의 탄압적 행위로부터 자유로운 안전한 공간이 필요한데 양성애자들은 ‘이성애적 특권’을 갖고 있고, 이성애적으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둘째, 양성애자들은 다른 경험세계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해당 집단(게이, 레즈비언 집단)이 공통된 경험을 나누거나 그에 기반한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셋째,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서 다시금 억압집단에 속한 성원의 존재로 인해 불편하기 싫기 때문이다.
양성애집단의 작업은 주로 어떤 안정된 경계가 없는 협동체(collectives)를 만드는데 관심을 가져왔다. 양성애 정치학은 이성애/동성애 양자관계에 제3의 규념을 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양자관계를 유지하는 총체적인 장치를 분해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분해는 성적 지향들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의 근거를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성애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매우 모순적인 것이도록 만드는 지점일 것이다.
(영국의) 노팅햄 양성애 모임에 온 많은 이들은 양성애 정체성이 사전에 완성되어져 있어 그냥 택하기만 하면 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 중에 있는 것이고, 이 논쟁에 참여해 스스로의 성적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할 가능성을 두고 있다. 이로써 현재 작동하고 있는 정체성 범주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성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전략은 버틀러의 말처럼 통일체(unity)라는 목표나 전제없이 일시적인 통일체가 정체성의 접합과는 다른 목적들을 가진 구체적인 행동들의 맥락 속에서 솟아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동성 간 욕망을 지칭하는 언어와 기회가 증가해 온 정치적 상황에서 양성애의 가시화도 부추겨 졌지만, 양성애에 대한 적대심은 양성애를 몰아세웠다. 욕망의 상품화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증가하면서 섹슈얼리티에 시장논리가 개입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우파들이 ‘가족 가치’를 강화시켰지만 성적 쾌락은 더욱더 구매가능한 것이 되고 있다. 신우파(the New Right)와 에이즈 위기는 레즈비언과 게이 공동체가 행동에 나서게끔 했고, 증가하고 있는 동성애 혐오에 맞선 게이프라이드의 강화와 퀴어나라(Queer Nation)의 경계에 대한 강화는 양성애에 대한 낙인을 늘렸고, 따라서 양성애 공간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성적 욕망, 관행, 관계, 정체성이 비규정적임을 밝힘으로써 양성애 집단은 그들이 모이게 된 토대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어떤 양성애자들이 시작한 단체는 양성애가 아니라 좀 더 광범위한 성적 다양성을 중심으로 모이기도 했다. 이러한 접근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그 중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양성애 공동체 전반에 ‘충분히’ 양성애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불안감은 ‘올바른 방식’의 양성애가 될 수 있을 어떤 규범적 정체성이 부재하기 때문에 생성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의 부재, 그 부재함이 평가를 받으면 성적 주체들이 서로서로 짜맞추어지는 공동체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조건에서 정체성의 부재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나, 어떻게 게이, 레즈비언 성적 인식론이 양성애를 배제하고 이성애/동성애 양극 구도를 굳힘으로써 그러한 가치평가를 차단해 왔는가? 그런 것을 구조화하는 데 어떤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지금 현재의 이러한 광범위한 성인식론을 문제삼고 오래된 확신을 버리고 부조리함(비일관됨)의 혜택을 받을 때가 왔다.
양성애적 삶(Bisexual lives)
‘1990년대 게이, 레즈비언 연구의 지침’을 마련했다고 얘기되어져온 Plummer(1992)의 [동성애(homosexuality)]에서 양성애는 게이, 레즈비언의 파편화된 경험으로서만 언급되었고, 색인에도 올려지지 않았다. 이 책의 5가지 문제는 이렇다. 첫째, (이미) 문서화되어있는 변화들을(도) 간과했고, 둘째, 동성애 행동에 관한 언어, 모든 동성애적 행동을 동성애로, 이성애적 행동을 이성애로 간주해 버림으로써 양성애가 존재할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셋째, 구분의 붕괴, 주체들을 전적으로 레즈비언 혹은 게이로 규정함으로써 이렇게 주어진 틀 안에서 결국 양성애가 가시화될 수 없게끔 만들었고, 넷째, 불특정한 불안정성, ‘동성애’, ‘게이’, ‘레즈비언’ 이름붙이기가 어려울 때가 있고 따라서 그 개념을 가지고서는 한계가 많은 때에도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양성애를 하나의 주체로 명명하지는 않았으며, 다섯째, 레즈비언, 게이로 정체화된 이들이 이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근대 섹슈얼리티(Modern Sexuality)]는 양성애를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Elisabeth D. Däumer에게 양성애는 레즈비언, 게이, 일반(straight)의 정체성을 괴롭히고 뒤흔드는 체제붕괴의 가능성 자체이다. ‘만약 실수로 자신이 잡고 있는 손이 남자의 혹은 여자의 것인지를 잊어버린다면?’라고 그녀는 묻는다. 다우머의 바램은 양성애가 레즈비언, 게이, 일반 사이의 분리를 무너뜨려 이들 사이의 연결점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양성애는 레즈비어니즘 혹은 게이니즘과 완전히 달라서 어떠한 연관성도 동맹성도 가능하지 않아 보이거나 아니면 너무 비슷해서 기존의 사고에 전혀 문제의식을 던져주지 않는 것 사이에 빠져 있어 보인다.
레즈비언, 게이 공동체 안에서 일반(straight)을 보는 시각-이성애적 특권, 다름의 에로틱화, 나이듦, 고지식하고 촌스런 옷차림, 성별 역할 순응, 춤 못춤, 성별바꾸기(cross-gender)욕망, 못생김, 번식 등 애가 있고, SM을 하고, 성별 역할을 즐기고, 이성과 관계하는 ‘일반’ 레즈비언과 ‘일반’ 게이는 숙청당하고-은 이 모든 것들이 퀴어 세상 안에 들어와 있는 일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쉽게 하기 위해서 몸의 정치학은 그것을 쉽지 않게 하는 주체들, 관행, 쾌락, 태도들을 제거한다. 규범화의 담론은 손상된 정체성(spoiled identities)을 생산한다. 억압에 반대하는 실천에서 ‘쉬운 정치학(politics of ease)’은 권력과 편견이 추방당한 ‘안전한 공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종종 전제된 규념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이 추방된 공간이다.
영국 맨체스터의 한 나이트클럽 ‘Flesh'에서는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입구에서 레즈비언인지 게이인지 질문을 했고, 양성애자들, 당시 동성과의 관계에 있던 양성애자들도 입장을 거부당했다.
위험한 정치학
만약 양성애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장애가 이성애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레즈비언과 게이’의 구성이라면 양성애 정치학의 이론화를 위한 핵심사안은 그 경계들을 해소하는 것이다. Mary Douglas(1966, Purity and Danger)는 순수(purity)를 위협하는 더러움(dirt)을 ‘밖으로 나와 있는 물질’로 규정하면서 ‘더러움은 체계적인 서열화와 분류화의 부가물이다’라고 보았다(p.35). 오염(pollution)이라는 것은 엄격한 분류화가 있는 곳에서만 환경을 체계화하려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존재한다 (:2). 더글라스는 오염을 사회변화의 과정으로서 옹호하면서 순수는 변화의 적이고 모호함과 타협의 적이라고 보았다 (:162). 그녀는 순수와 낙인찍힌 더러움의 기능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고, 분리(separation)와 경계설정(demarcation)이 특정 사회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을 분석해 냈다.
양성애에 관한 불안감도 상징체계, 즉 이성애/동성애 이자관계의 붕괴에 대한 현실적인 두려움의 표현으로서 읽혀질 수 있다. 더글라스는 권력구조의 틈새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나은 지위를 가진 이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지는 편집증적 사회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위험하고 통제불능의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고, 이로써 이들을 억압해도 된다는 구실이 주어진다(더글라스 1966:104). 양성애도 이런 식이다. 이들과 만나면 양성애자로 변할 것이라거나 이들은 항상 너와 다른 성의 파트너를 찾아 떠날 것이라거나 게이 정치학의 원동력을 갉아먹는다거나 에이즈 위험군이라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영화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에서 보여준 양성애 여성 살인마, 영화 Crush, 1983년 미국 게이만화에 등장한 ‘양성애 보험’등에서 볼 수 있다.
다음은 영역과 위험에 관한 것이다. 이성애주의로부터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유지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이성애와 이성애주의를 등치시키는 것은 정치적 동맹을 훼방놓은 게토식 사고방식을 부추길 뿐이고 그것은 섹슈얼리티 외에는 별달리 억압받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동맹같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이들의 사치이다.
이성애주의적 폭력이 우리 모두에게 현실적인 위험이기는 하지만 터무니없이 많은 에너지가 ‘내부의 적’에게 쏟아지고 있다.
더글라스는 구분을 위반하는 존재에 대해 이뤄져 온 세 가지 접근방법을 보여주는데 첫째, 또 다른 구분을 할당한다. 이것은 양성애는 진정한 게이다 혹은 일반이다는 식의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그들은 위험하고 따라서 피하거나 통제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상담전화에서 전화응답을 회피하거나 클럽입장을 거부하거나 관계맺기를 거부하거나 하는 등이 그 예이다. 셋째,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기존의 한정된 틀을 깨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선택사항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차이를 삼켜버리지 않는 관계형성이 필요하다. Donna Haraway의 글에서 이종족간 결혼(백인-흑인 결혼 등)이 검토되었다. 고정된 이항법을 돌려놓고, 급진적인 차이(radical difference)를 보존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한 은유로서 헤러웨이는 이종족간 결혼의 불가피함을 주장하면서 그것에 부여된 공포의 억압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양성애는 이종결혼의 위치에 있다. 한편에서는 이성에 대한 성적 욕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퀴어성정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양성애 자체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성적 지향들의 어려운 섞임의 장소인 것이다.
Homi K. Bhabha는 ‘혼종성’을 어떤 문화적 역사의 특정한 물질적, 상징적, 정신적 겹쳐짐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했다. 바바는 문화적 차이가 적극적인 문화적 차별화의 산물이라고 본다 (1985:99). 메리 더글라스가 밑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듯 분리화와 조직화라는 체계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정말이지 우리 같지 않다’는 식이다. 바바에 따르면 ‘혼종성’은 어떤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 고유의 권리와 특권을 가진 권력기능으로서 작동하는 기존의 문화적 자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기존의 담론의 다른 의미들을 모아낸다. 그것은 지배적인 규념(terms)을 보충하고,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함으로써 기존의 것이 가진 한계를 알려준다. 그 보충물이 지배적 의미 속으로 넌지시 섞여드는 것(insinuation)은 차별화 과정이 멈짓 서면서 이전과 같은 것을 더 이상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혼종은 ‘권위의 존재와 그것의 형상을 교란시키는 질문들’과 같은 효과를 낳는 것이다.
혼종은 첫째, 과거의 현존을 과거와 완전히 똑같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과거의 권위가 그대로 영원히 지속될 수 없게 한다.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자긍의 날’이라는 제목이 그 한 예이다.
혼종성은 과거와 급진적으로 단절하지는 않는다. 혼종성은 과거가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을 성립하는 데 한 역할을 인정하고 지배문화가 자기재생산을 통해 만들어내는 영속성 안에서 스스로를 안치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지배문화를 보충하고 그로써 미래를 다시 씀으로써 막아낸다.
또 하나는 공식적인 역사와 현재 문화의 형식을 다시 쓰는 것이다. 어떤 규범적 문화든 엄청나게 복수적인(plural) 근대적 공간을 지속적으로 추방하는 것을 법제화한다. 게이문화에서 사용되는 ‘분홍삼각형’등도 그 예이다. 그 같은 역사의 변화에 이해관계는 엄청 강하다.
바바는 분열적인 잠재력을 부정하지 않는 다름(otherness)을 통합시키는 모델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언설(narrative), 정체성, 공간은 다른 역사, 자아, 공간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은 우리를 매우 다른 사람들로 만든다. 성정치도 그런 것으로 만들어 가야한다.

14. Marjorie Garber: [역으로도 마찬가지로: 양성애와 일상의 에로티시즘(성애)(Vice Versa: Bisexuality and the Eroticism of Everyday Life)](1995)

가버는 ‘양성애’ 개념을 고찰하며 그것이 남/여, 남성성/여성성, 이성애/동성애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답하고자 하는 것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양성애’의 다중적이고 이동하는 의미 자체가 핵심이라고 본다. 양성애는 파악할 수 없음(elusiveness)와 유동성(flux)을 의미하고, 그로써 성애(eroticism)의 본질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양성애는 이성애/동성애, 남성성/여성성 사이의 구분을 문제삼거나 해체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분자체가 결국 불가피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양성애는 진정 보다 광범위한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 올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양성애는 확실성을 다시 흐트려 놓는다. 그것은 정체성이지만 정체성이 아니고 모호함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기호이고, 구분을 문제삼고 무화시키는 구분이다.
어떻게 2등급 시민이라는 생각을 심어놓지 않고서 차이들을 추구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무차별적 ‘인본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첫째, 양성애 혐오는 동성애 혐오에 기반해 있다. 동성애 혐오가 끝장나면 양성애 혐오도 쉽게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저 ‘자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분리와 배제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레즈비언들에게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분리를 통해서 얻어질 필요는 없다. 셋째, 양성애정치학은 어떤 면에서는 ‘성적’ 인 것도 정치학인 것도 아닌 성애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성애는 불평등, 권력, 부정, 요구, 욕망 등이 어떻게 이야기되어지냐에 따라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uncorrect) 것이었다. 사랑도 성욕도 인간의 선택을 규제하는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인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면 예측되지도 통제될 수도 없다. 양성애를 긍정한다는 것의 긍정적이고 정치화된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June Jordan).
양성애 정치학은 정치적 행위와 성적 욕망 사이의 겹침을 이해할 수 있는 모델이다. 양성애는 그 존재함 자체로서 우선함(priority), 단일성(singularity), 진실함(truthfulnss), 정체성 등에 대한 생각들을 흐트려 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성별과 섹슈얼리티에 빠져있을(preoccupied) 때 인간의 자유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하는 중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바꾸기(Shifting)는 양성애에서 핵심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인간 욕망의 특질 중 핵심이기 때문이다. 성애는 구분(분류)을 부숴 뜨리고, 규칙을 가로지르며 탈주하고, 경계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명서나 기록물, 실험실 실험 혹은 선언 등으로 그 의미를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양성애는 정확히 저항 그 자체이다. ‘하나로 한정되는 것에 대한 거부’이다. 그 ‘하나’가 ‘양(bi)'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해도 말이다. 양성애는 그것의 특징으로 인해 다중적 욕망과 그것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함의한다.
양성애의 참조대상은 자기 자신인 주체인가 아니면 상대방인 대상인가? 아마 이 질문은 섹슈얼리티 자체가 주체와 대상 어느 쪽을 참조준거로 잡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자신의 구성된 성적 정체성을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의 쾌락에 대해 알고 받아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결국은 이성애적 관계를 목적으로 두는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기질의 측면에서 양성애를 개념화하는 것은 프로이드에게 양성애는 하나의 정신 내부에 두 가지 이성애적 욕망이 우발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다 (버틀러 1990:60-61). 이렇게 ‘기질’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국 여성성과 남성성, '이성애적 욕망의 태(matrix)'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일 러빈이 지적했듯이 규범적 이성애의 관념은 성과 성별의 사회적 조직의 일부이다. 퀴어 욕망의 존재에 대한 진실을 환영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동성애 혐오증처럼 양성애를 이성애적으로 형상화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성애적 욕망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15. Maria Pramaggiore: [담장의 인식론 (Epistemologies of the Fence)] (1996)

프라마기오레는 이 글에서 1990년대 양성애 연구 영역이 어떻게 발달했는지를 ‘담장의 인식론’으로 형상화하면서 조망해주고 있다. ‘담의 인식론’은 ‘벽장’이 동성애자들과 동성애적 욕망을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비가시화했다고 보고 이에 대해 조사했던 Eve Kosofsky Sedgwick(1990)의 ‘벽장의 인식론(Epistemology of the Closet)'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시작했다. 프라마기오레는 담의 형상이 양성애의 문화적 의미를 이해하는 잠재적인 은유라고 본다.
1995년 7월 17일 뉴스위크지에는 ‘양성애: 게이도 아니고 일반도 아닌. 새로운 성정체성의 등장’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유명한 옛날 양성애자들 게리 그랜트, 빌리 홀러데이, 제임스 딘같은 사람들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러니 무엇이 양성애에 대한 ‘새로운’ 것이라는 말인가? 뉴스위크같은 잡지에 의한 공식적인 인정 외에 말이다. 어떤 위치에서 이 ‘새로운’ 성적 정체성이 ‘떠올랐다’는 말인가?
어떤 섹슈얼리티가 혹은 어떤 문화적 현상이 새롭다는 수식을 하는 것은 미국 소비문화의 수사법이다. 더욱이 그것들은 대개 성적 정체성이라고 불리기 뭣한 경우가 많다. 그것이 양성애의 역설이듯이 말이다.
‘결국 그것은 불을 끈 후 단순히 따스한 인간의 몸 사이의 신비스러운 당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저자는 글을 맺는다. 그러나 저자는 왜 지금 그 시기에 양성애가 ‘새로운’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검토하는 것을 간과했다. 양성애적 인식론은 서구 사회의 섹슈얼리티 정치학을 모양지으면서 유행보다 빨리 진행되는가?
여기에서의 관심은 담장, 양성애를 수식하는 위치는 단순히 최근의 성적 위치들 그 이상의 것이다. 담장 위는 전혀 새로운 위치가 아니다.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담장은 문화적 지형에 점을 찍는다.
[벽장의 인식론]에서 세즈윜은 벽장의 관계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구분,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에 달려 있고, 발화행위의 권력으로 점철된 성질과 발화행위로서 고려되는 것들 사이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이가로 보았다 (Sedgwick 1990:3). 그녀는 21세기의 동성애 억압의 특정한 핵심은 지식에 관한 질문과 근대 서구문화에서 알아가는 과정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그것이 벽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간격은 벽을 담장으로 다시 쓴다. 세즈윜의 벽장은 규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해소하고 또 재생산한다.
담장은 사이 안에 있는 장소이고 그리고 비결정의 장소이다. 담장 위에 앉는다는 것은 한시적으로 기반한 하나의 성적 파트너쉽의 우위를 가정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별칭으로서 이것은 성별을 이항분류에 따라 규정하는 제한적 도식을 거부하고, 하나의 성별 혹은 단일 성별화된 대상을 선택하는 하나의 섹슈얼리티와 연결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성적 행동을 성적 정체성과 등치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양성애적 인식론은 성행위와 정체성 간의 일대일 대응, 성감적 대상과 섹슈얼리티와의 일대일 대응, 정체성과 욕망의 일대일 대응을 거부하고 유동적 욕망과 욕망 주체의 욕망이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버는 ‘성애와 욕망이 항상 어느 정도는 위반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나 성애와 욕망은 개인적 수준에서 그리고 문화적 수준에서 구조화되고 경찰된다’고 본다. 문화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속박하고 경계짓는다. 그 욕망을 작동시키는 것이 제도적이고 심리적인 구조를 생산하고 이 구조는 ‘다른’ 양식의 섹슈얼리티가 감지되고 수행될 수 있는 골에 의해 구멍이 생기게 된다. 침투해 퍼지는 구조로서의 담장은 배제적인 ‘아니면/혹은’ 보다는 상호포괄적인 ‘양쪽 모두/그리고’에 가장 가깝다.
세즈윜이 지적하듯이, ‘성별개념이 없다면 간단히 말해 동성애 혹은 이성애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여러 성적 선택의 측면들은 이같이 성별과 결정적인 관련성을 갖지 않고 인종 혹은 계급의 유사성이나 차이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세즈윜 1990:31).
양성애에 대한 작업에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양성애를 위한 공간을 위해 담장을 치다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 공간은 퀴어이론과 여성주의 이론과 겹치고 근접해 있고, 인종이론과 계급이론을 흡수하고 그것을 고취시킨다.
담장은 그것을 동사형태로 볼 때 따로 떼어놓기, 발뺌하기, 단수의 반대자 받아넘기기 등을 함의한다. 그러나 담장치기는 무술처럼 혹은 춤처럼 상대방이 곧 파트너이다. 양성애의 이론적 지점에서 접촉과 갈등은 상호성을 위한 지점으로 변한다. 좋은 담장은 좋은 친구를 만든다. 우리는 양성애의 이론화과 운동이 이미 담장치기 경쟁에 돌입했다고 본다. 양성애 이론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새로운 퀴어운동의 환경에서 성숙기를 맞고 있으며 그 맥락 바깥에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양성애 이론이 생산적이고 때로 고통스러운 소통을 통해서 발전시켜온 영역 중 하나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담론 정치학 안에 있고 이것은 특히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서 여성이 양성애적 욕망과 가지는 관계라는 문제, 섹슈얼리티의 쾌락과 위험에 주목하는 레즈비언과 여성주의 정치학의 이론 때문에 생긴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94년 11월 ‘퀴어의/이론/행위 안에서(In Queery/Theory/Deed)'라는 제목의 학회에서 발표된 여러 발표문들은 양성애로 스스로를 드러낸 레즈비언들의 경험, 양성애 정체성의 구성과 레즈비언 정체성의 구성 사이의 차이, 그리고 양성애 여성들과 레즈비언들의 다분히 정치적인 동맹에 초점을 맞추었다.
1990년대에 출간된 양성애로 커밍아웃한 이들의 이야기들은 스스로의 성별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이성애적 차이에 기반해 규정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해 양성애를 이론화하고 활성화하는 데에 성별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게 한다. 이 출간물들은 어떻게 성별의 차이가 양성애 이론과 행위에 중요하거나 중요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양성애 정체성 위치짓기’에서 클레어 헤밍스는 1970년대 이래로 여성주의 안에서의 여성주의 이론과 양성애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양성애의 이론화가 ‘정체성의 이론들과 차이(들) 사이에 일어난 난국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양성애에 관한 남성들의 작업은 주로 성(별)전환, 자웅동체, 다항적 도착에 관심을 두고 여성들과 여성주의자들의 작업은 양성애가 그것이 가진 이항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성별화된 권력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유용한 규념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새로운 섹슈얼리티 정치학’에서 시인이자 수필가이자 활동가인 June Jordan(1990)은 양성애정치학을 ‘중간지대(middle ground)'로 보면서 이것이 예상가능하지도 않고 통제가능하지도 않고 정체성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지도 않는 자유로운 개인의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고 본다.
우리는 유동성과 상호 포함성을 강조하는데 양성애 인식론은 특별한 관점이나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인 사안은 아래의 것을 포함하되 이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즉, 첫째, 양성애가 프로이드의 모델에서 볼 수 있는 정체성의 단성적 모델을 분열시키고 치환하는 방법; 둘째, 일시성(temporality)과 섹슈얼리티의 관계; 셋째, 성별 내부와 성별을 교차하는 욕망의 삼각 구조; 넷째, 비가시성의 관념과 게이와 레즈비언의 벽장과 본질화된 인종적 차이에 의해 놓여진 것들과는 다른 식의 통과되기(passing)의 관념; 다섯째, 동일시와 욕망 사이(between/among)를 구분하는 것의 어려움; 여섯째, 성적인, 성별적인, 인종적인 모호함의 관념들 사이의 동조; 일곱째, 엄격하게 섹슈얼리티를 성별의 관점에서 체계화하지 않는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 찾기; 여덟째, 게이정치학과 연구, 레즈비언, 퀴어, 성전환인, 성별전환인, 양성애 연구와 정치학 사이의 긴장과 갈등 등이다.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2008 여이연 봄강좌: <양성애(bisexuality): 퀴어 메스티자>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여성주의 안에서 그리고 레즈비언/게이 이론 안에서 양성애에 관한 이해는 그다지 되어 오지 못한 가운데 양성애는 '박쥐'같은 존재로, 정체성의 경계를 흐리고 정체성의 정치학을 흔들어 아직도 열악한 상황에 있는 동성애 진영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는 존재로, 그리고 때로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성적 경계 (Constructive Boundary) 혹은 완충지대 (Buffer Zone)로 인식되는 등 혼란 속에 있어왔다. 본 강좌는 [양성애: 비판적 읽기 (Bisexuality: a ciritical reader)] (멀 스토 Merl Storr, 1999)의 중심 내용을 번역해 읽고 이것을 통해 서구 퀴어여성주의 안에서의 양성애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고 한국사회에서 이것이 제시하는 의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강좌의 구체적인 흐름은 아래와 같다.

I강: 양성애 개념의 계보 (Genealogy of the concept of bisexuality)
1. 헨리 헤블록 엘리스:성심리 연구 1권(1987)과 2권(1915): 성도착 (Henry Havelock Ellis: Studies in the Psychology of Sex, Volume I: Sexual Inversion과 Volume II: Sexual Inversion)
2. 지그문트 프로이드:섹슈얼리티에 관한 세가지 에세이 (Sigmund Freud: Three Essays on the Theory of Sexuality: 1. The Sexual Aberrations)
3. 윌헬름 스테켈: 양-성애적 사랑 (1920) (Welhelm Stekel: Bi-Sexual Love)
4. 알프레드 킨제이, 워델 폼로이, 클라이드 마틴: 남성의 성적 행위(1948) (Alfred C. Kinsey, Wardell B. Pomeroy and Clyde E. Martin: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Male)
5. 프리츠 클레인: 양성애적 선택: 백퍼센트 친밀함이라는 개념 (1978) (Fritz Klein: The Bisexual Option: A Concept of One Hundred Percent Intimacy)
6. 아만다 우디스-케슬러: 킨제이 공식과 섹슈얼리티의 측정에 관한 기록 (1992) (Amanda Udis-Kessler: Notes on the Kinsey Scale and Other Measures of Sexuality)

II강: 양성애 정체성 그리고 양성애적 행위 (Bisexual identity and bisexual behaviour)
7. 필립 블럼스테인, 페퍼 슈와츠: 양성애: 사회심리학적 사안 (1977) Philip W. Blumstein and Pepper Schwartz: Bisexuality: Some Social Psychological Issues)
8. 제이 엠 케리어: 멕시코 남성 양성애 (1985) (J.M. Carrier: Mexican Male Bisexuality)
9. 와이어싯 시티라이, 팀 브라운, 씨라폰 버룰락: 태국의 양성애 유형 (1991) (Wiresit Sittitrai, Tim Brown and Sirapone Virulrak: Patterns of Bisexuality in Thailand)
10. 수 조지: 여성 그리고 양성애 (1993) (Sue George: Women and Bisexuality)
11. 잔 클로센: 내가 처한 흥미로운 상황 (1990) (Jan Clausen: My Interesting Condition)
12. 마리아나 발버드: 성, 권력 그리고 쾌락 (1985) (Mariana Valverde: Sex, Power and Pleasure)

III강 양성애적 인식론 (Bisexual epistemologies)
13. 조 이에디: 양성애 활성화하기: 양/성애 정치학을 향해 (1993) (Jo Eadie: Activating Bisexuality: Towards a Bi/Sexual Politics)
14. 마조리에 가버: 역으로: 양성애와 일상의 에로티시즘 (1995) Marjorie Garber: Vice Versa: Bisexuality and the Eroticism of Everyday Life)
15. 마리아 프라마지오레: 울타리의 인식론 (1996) (Maria Pramaggiore: Epistemologies of the Fence)
16. 야스민 프라부다스: 양성애인과 혼혈인: 변화의 중재인 (1996) (Yasmin Prabhudas: Bisexual and People of Mixed-Race: Arbiters of Change)
17. 엘리자벳 다우머: 퀴어윤리학 혹은 레즈비언 윤리학에 대한 양성애의 도전 (1992) Elisabeth D. Daumer: Queer Ethics: or, the Challenge of Bisexuality to Lesbian Ethics)
18. 길버트 허디트: 양성애의 문화적 속성과 유동성에 대한 논평 (1984) (Gilbert H. Herdt: A Comment on Cultural Attributes and Fludity of Bisexuality)
19. 앰버 올트: 모호하지 않은 성/젠더 구조 안에서의 모호한 정체성: 양성애 여성 (1996) Amber Ault: Ambiguous Identity in an Unambiguous Sex/Gender Structure: The Case of Bisexuality Women)

IV강 차이 (Differences)
20. 헬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1975) (Helene Cixous: The Laugh of the Medusa)
21. 클레어 헤밍스: 양성애 정체성 위치잡기: 양성애 담론과 현대 여성주의이론 (1995) Clare Hemmings: Locating Bisexual Identities: Discourses of Bisexuality and Contemporary Feminist Theory)
22. 앤 칼로스키: 싸이보그와 만나는 양성애: 정치, 쾌락, 혼/란 (1997) (Ann Kaloski: Bisexuals Making Out with Cyborgs: Politics, Pleasure, Con/fusion)
V강 양성애: 퀴어 메스티자 (Bisexuality: Queer Mestiza)
- 글로리아 안잘두아: 경계지대: 새로운 메스티자 (1987) (Gloria E. Anzaldúa Borderlands/La Frontera: The New Mestiza)

- 총토론: 양성애: 퀴어 메스티자 (Bisexuality: Queer Mestiza)
Merl Storr는 이 책의 의도를 양성애 개념들, 양성애의 의미와 양성애 개념 사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주요 논쟁 영역들에 대한 소개라고 두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지점들은 첫째, 양성애 개념에 대한 재질문, 둘째, 각 개념이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현재 논쟁에 (여전히) 관계되는지, 셋째,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거나 지금까지의 개념들이 이것을 선폐할 가능성과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의 발견이다.

책의 모든 장들을 아우르고 있는 질문은 ‘무엇이 양성애인가?’ 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두 부분의 질문: (1) 양성애는 무엇으로 구성되나?; (2) 이것이 가지는 두(양)요소들-남자/여자(maleness/femaleness),남성성/여성성(masculinity/femininity),이성애/동성애(heterosexuality/homosexuality)의 관계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로 이어진다.
(1) 양성애는 무엇으로 구성되나? 즉, ‘양’의 양은 무엇, 무엇이 더해진 양인가?라는 질문에는 세 가지 대답이 가능(Bowie, 1992)하다.
첫째, 양성애는 생물학적 혹은 해부학적 측면에서의 남자와 여자로 구성. 따라서 남성의 유두, 여성의 얼굴털 등을 양성애의 신체적 특징으로 봤음. 의학, 성과학 등에서 19-20세기 초에 사용. 예) 헤블록 엘리스
둘째, 양성애는 심리학적 측면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성됨 (예, 프로이드
셋째, 양성애는 이성애와 동성애로 구성됨.
둘째, 셋째의 정의가 첫째보다는 더 넓고 오래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오늘날은 특히 셋째의 정의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음. 이런 정의의 전환은 1970년대 일어난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1960,70년대의 동성애 해방운동과 1973년 미국의 심리학전문가들 지침서 “정신장애진단과 통계편람”의 ‘공식적인’ 성적 병리 목록에서 동성애가 제외되는 것에서 큰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여진다.
부적당하게 성별화된 욕망-남자가 남자를 원하는 욕망(feminen desire), 여자가 여자를 원하는 욕망을 갖는-으로 고려되었던 것이 수정된 것. 남자를 욕망하는 욕망은 언제나 여성적이고(femininity), 여자를 욕망하는 욕망은 남성적(masculinity)이라는 것이 도전받기 시작 (Butler, 1990, 1993; Weeks 1977). 이제는 이 도식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음. 대신 이성애, 동성애 구도로 정의가 이동. 그러나 1970년대 이후의 이 전환이 완벽이 이뤄진 것은 아님. 여전히 성소주자 담론 밖에서는 뒷덜미를 잡고 있는 지점.
*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지점
남자 -> 여자를 욕망 남자(femininity) -> 남자를 욕망
남자 (masculinity) -> 남자욕망 masculinity적 욕망 / femininity적 욕망
masculinity 가 masculinity를 욕망
여자 -> 남자를 욕망 여자 -> 여자를 욕망 여자 -> 여자 욕망
femininity 적 masculinity적 욕망 femininity가 femininity 욕망

(2) 무엇이 양성애인가의 두 번째 질문은 양성애에서 ‘양’요소들간의 관계에 대한 것. 즉, maleness/femalenes, masculinity/femininity, heterosexuality/homosexuality 사이의 관계이다. 양성애는 이 두요소들간의 조합(combination)인가? 이 두 혼합의 정도는 측정될 수 있는 혹은 없는 것들인가? 아니면 양 요소 중 각각이 한 선상의 양극단 지점에 있고, 양성애는 이 선의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인가? 양성애는 이성애와 동성애를 분리하며 이들의 경계를 표해주는가? 아니면 되려 이 둘을 통합하는가?
2부에서는 양성애 정체성과 양성애적 습성에 대한 내용이 ‘양성애적’이란 개념이 개인들, 집단들, 습성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것에 주목하는 글들이 실렸다. 이 글들은 주로 경험적 연구에 기반해 있고, 상례적으로 정체성과 습성을 구분하고 있다. 정체성과 습성적 행위를 구분하는 것, 즉, 양성애적 욕망을 가진 적이 있거나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할지라고 스스로를 양성애자라는 정체성으로 정체화하지는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이 구분은 너무 양분법적인 인식이라 간주될 수 있고, 무차별적으로 사용될 경우 인간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협소하게 여기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정체성과 습성이 인간 섹슈얼리티의 모든 측면도 아니다. 환상(fantasy), 정서적 유대 등의 요소도 섹슈얼리티 안에 있기 때문이다.
Klein Sexual Orientation Grid(KSOG, 클레인 성적 지향측정판)에서는 환상, 정서적 유대감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성감대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어떤지의 여부, 즉, 자신의 성적 혹은 관능적 이미지, 자신의 상대방 파트너를 형성하는 중요한 지점들이 여기에서도 간과되었다.
많은 경험적 연구들이 성감적(erotic)인 지점을 성욕적(혹은 성관계적)인 것과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있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개념화할 수 있는 좀 더 상상력있는 가능성들, 방법들을 선폐해 버린다.
양성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촉발했던 사건이 1980년대 후반 AIDS의 발견, 전염병학자들, 보건전문가들은 에이즈 확산에 남성 양성애자, 특히, ‘드러내지 않은(closeted)' 이들이 에이즈확산에 큰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급연구활동. 에이즈와 관련해 더 안전한 성행위, 보건홍보물 등을 위한 연구가 양성애적 정체성과 행위(섭성)에 대한 연구에 주를 이룸. 이로 인해 양성애 관한 연구는 전부 남성 양성애에 관한 것.
여성 양성애에 관한 연구는 연구기금도 거의 없다. 따라서 연구수위도 낮다. 때문에 비교연구나 국제연구결과가 드물다.
남성양성애가 HIV 관련 연구 응답자의 주를 이룬 반면, 주로 여성양성애가 양성애 정치학과 양성애 이론에 관해 연구자거나 응답자가 되어왔다. 여성주의 운동과 여성학 덕분에 양성애 인식론은 공공연한 여성주의자들이거나 여성주의 이론에 고무받은 것이었다.
추상적인 인식론이 최근의 양성애 연구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인식론에 대한 요구는 양성애자들 자신이 ‘잘못 맞추어졌고’ 혹은 ‘외부자’라는 느낌을 갖으며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이성애/동성애 구분에 깔끔하게 들어갈 수 없다는 불편함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양성애학자들은 이성애/동성애 분류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적대감을 가졌고, 또 어떤 학자들은 분류와 분류화 자체를 의심했다. 이 책의 양성애 인식론에 실린 글들은 바로 이 분류화와 그것에 대한 불만(discontents)을 주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분류화의 일반적 원칙에 주의하며, 그것이 양성애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거나(하고) 양성애 자체가 이미 분류화 자체를 특이 이성애/동성애의 분류화에 본질적인 위협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양성애나 양성애자가 ‘타자’ 혹은 정체성들과 공동체들의 테두리를 정하는 표식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Rust(1995)는 미국에서의 연구에서 양성애 학자들이 분류화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지점은 분류화, 특히 이성애/동성애 분류 속에서 양성애자들이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어떤 다른 존재로서 배제된다는 것에 있다. 배제는 양성애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사람들이 많이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성애적 행위(습성)를 영위하지만 양성애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지 않는 이들은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에 대해 어떻게 느낄 것인가? 이는 어떤 인식론적 지평을 여는 것인가?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은 여전히 중요할 것이고, 그 구분이 쾌락의 한 원천일 수도 있고, 성애적(erotic) 삶에서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양성애로서 혹은 양성애가 아닌 것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은 차이에 대한 문제이다. ‘차이’라는 개념은 특히 여성주의 안에서의 논쟁의 핵심에 있어왔다. 차이, 다양성, 다중적 관점에 대한 인정은 차이(들)을 교정되거나 위계적인 사회적 구분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상호교차(intersecting)하며, 지속적인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게 한다.
레즈비언들이 때로 양성애와 양성애자들을 향해 보이는 크고 작은 적대감은 ‘양성애’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레즈비언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양성애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다른 성적 범주들의 구성적 경계(constitutive boundary)의 개념으로 보는 관점은 이 책 3부의 핵심 관점이다.
양성애 인식론은 대체로 분류화에, 특히, 양분법적 분리와 이원적 사고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몇몇 학자는 현혹적이라거 고정된 분류화만 아니라면, 어떤 맥락에서는 분류가 필요하거나 유용할 때도 있기 때문에, 특정 맥락에서는 양성애자들이 분류를 원칙적으로 거부하기 보다는 가능한 분류들을 확대함으로써 포함될 수도 있도록 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Colker(1996)는 분류를 사용하지 않고서 양성애자들이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평등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싸울 방법은 현 법체계 안에서는 없다고 주장한다. 몇몇 학자들은 양성애가 근본적으로 분류화를 불편하게 방해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양성애 개념은 다른 분류들이 사라지게 하기 보다는 다른 종류의 분류들 사이에서 ‘완충지대(buffer zone)'가 되줌으로써 그것들이 서로 다른 분류들 속으로 희석되버리지 않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해준다고보기도 한다. 그러나 반분류화적 양성애 인식론이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인식론적 개념으로서의 양성애의 잠재적인 전환적 효과는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했거나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라는 공식 속에서 파괴되고 있다. 정체성으로서의 양성애와 양성애적 인식론 사이의 갈등은 이 논쟁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I부 양성애 개념의 계보

1. 헨리 헤블록 엘리스(Henry Havelock Ellis): [성심리연구: 성도착1권(1987), 2권(1915)]
헨리 헤블록 엘리스는 양성애에 대한 선조격 개념을 만든 사람이고, [성심리 연구:성도착](1987)에서 양성애에 대한 언급. 양성성(bisexuality)을 ‘성심리적 자웅동체’로 본 크래프트-어빙(독일인)의 분류를 따름. 한 생물학적 종에서 두 생물학적 성(sexes)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양성성을 사용. 한 몸에서 드러나는 남자/여자의 특성이 둘 다 있다는 것을 의미.
[성심리연구 II] (1915)에서 양성애 개념 변화. ‘성심리적 자웅동체’를 버리고 성적(sexual) 이형성과 남성/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아우르는 의미로 ‘양성애’를 사용하기 시작. 이어 이 의미로서의 개념은 20세기 초, 영국에서 통용되던 개념으로 자리잡았음.
엘리스는 이성애/동성애/양성애 분류가 실제 삶에서 딱 떨어지게 나눠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매우 힘들고, 따라서 이것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거의 무의미하다고 피력.
[성심리 연구 I: 성도착] (1897)
남성의 성도착
어린 아이에게서 최초의 성본능이 나타날 때는 이후에 그렇게 되듯이 특별히 특화되는 것이 없다. 특정한 성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성적 대상도 분명하지 않다. .... 성본능이 점점 강해지면서 그리고 가족이나 친족바깥의 세계에서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울리면서 사춘기를 지나는 대다수 남자아이들의 성본능이 자리잡는 경로인 보통의 경로로 향한다. 이것이 진정한 성적 도착자라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몇몇은 대체로 다소 덜 발달된 성본능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다. ... 나는 단순한 도착과 첫째 등급은 동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개인들로, 둘째는 양성 모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이들로 대체로 불려지듯이 성심리적 자웅동체 사이의 임상적 구분 이상의 복잡한 분류화를 제안하지는 않는다.
성심리적 자웅동체
이것은 양쪽 성에 모두에게 끌리는 ‘성적 도착’에 붙여진 다소 이상한 이름이다. 이 형태는 단순한 도착보다는 분명히 덜 나타난다. 이들은 성적 쾌락과 만족을 남자와 여자 둘 다와 가지는 이들인데 어떤 경우에는 동성애적 본능이 이성애적 본능보다 훨씬 더 강한데, 이 경우는 단순한 도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도착자들이 이성에게 가짜로 끌리게 하는 많은 자극들과 동기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애적 본능이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동성애적 본능이 분명히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여성의 성도착
남자아이들처럼 여자아이들에게도 사춘기 전개 과정에 있는 학교에서 동성애가 처음 나타난다. 이는 지엽적으로 혹은 중심적으로 시작된다. 이는 두 아이가 한 침대에서 가까이 누워 서로를 만지거나 입맞추면서 길러진다. 이것은 가짜 동성애의 일종인데, 이것은 거의 보통의 본능에서 비롯된 조숙한 놀이에 불과하며, 진정한 성도착과는 어떤 관련도 없다. 생래적으로, 동성애적 경향이 있는 여아들에게서는 이것이 지속적으로 발달한다. 대다수는 이런 경향에 대해서 보통의 성적 사랑의 대상이 나타날 때 수치감을 느끼면서 가능한한 잊혀질 것이다.
성도착 이론
성의 발달과 각 성에서 잠재적인 자연스러운(organic) 양성애의 발달을 되짚어 보면 비정상성의 특성을 보다 잘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성발달 초기에는 서로간의 구분이 잘 되지 않고 삶 전반에서 초기 성집단(community of sex)의 흔적이 남는다. ... 성적으로 도착된 사람은 이성과의 이러한 집단성원으로서의 과도한 표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착된 사람들은 이성과의 보다 미미한 육체적/정신적 접촉을 한다. 이 문제를 순전히 추리적으로 다룬다면 잉태될 때는 50퍼센트의 남성발아와 50퍼센트의 여성발아를 가지고 있고, 발달하면서 다른 성의 발아를 죽이고 성숙한 개체로 발달했을 때는 이성의 발아가 조금 남게 된다. 동성애적 사람들과 성심리적 자웅동체 사람들에게서는 원래의 남성 혹은 여성 발아의 몇몇 특징 측면에서 이 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정상적 성충동 보다는 도착적 행위에 더 걸맞는 양태로 틀어지게 된 사람이 있게 되거나 정상적, 도착적 성충동을 모두 가지는 사람이 있게 된다.
성심리연구 II (1915)
성생활의 기본적 근간이 양성애적이라는 합당한 관점을 받아들이면-이후 이른 시기에 이것이 동성애 혹은 이성애로 굳어지게 되겠지만-동성애자들에 대해 어떤 확정성을 가지고 말하기란 힘들다. 구분은 이성애적 대상을 두고도 별 감흥이 없을 만큼 강한 동성애와 이성애적 대상이 있을 때는 이것에 의해 사라지는 약한 동성애 사이의 구분일 것이다. 이는 강한 동성애(spurious homosexuality)와 유사 동성애(pseudohomosexuality)의 구분으로 둘 수 있다. 이들 중 오직 이성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게 아니면서도 오직 동성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이들과 이성과 동성 양쪽 모두에게 끌리는 이들은 구분된다. 전자는 동성애자이고 후자는 크래프트-어빙의 개념에 따르면 심리적 자웅동체인 양성애자이다. 따라서 성적으로 기능하는 사람들을 넓고 단순하게 세 집단으로 나누자면 이성애자, 양성애자, 동성애자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분명히 이성애자라고 간주되는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과 분명히 동성애자라는 표시가 결정적으로 나는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이성에게 끌린 경험이 있거나 이성과 관계를 가진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성인양성애자들 중의 다수는 동성애적 경향을 이성애적 경향보다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손잡이 중에 원래는 왼손잡이였거나 왼손을 주로 쓰는 사람이 많은 경우와 흡사하다 하겠다. 따라서 동성애/양성애/이성애 구분은 이만큼이나 과학적이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2.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성이론에 관한 세 가지 에세이: 1. 성적 도착)] (1905)
프로이드는 ‘세 가지 에세이’에 대한 수정작업을 계속했다. 따라서 그의 개념들도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했다. 양성애에 대한 논의에서 이 점은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양성애 개념은 프로이드 사상의 주춧돌격이었으나 한 번도 그 위치로서 유형화되지는 않았다 (Bowie, 1992). 프로이드는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Wilhelm Fliess와 양성애 개념을 누가 먼저 유형화했냐에 대해 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플리스가 자신의 개념이라는 인용을 프로이드가 하지 않았다고 몹시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Garber 1995; Masson 1985). 이후 프로이드는 그 자신의 양성애 개념 계보를 만들어 이를 반박했다.
그의 글에서 ‘양성애’ 개념은 모호하고 그것도 대부분 동성애(혹은 ‘성도착’)에 대한 논의의 부분에서 다뤄졌다. 양성애를 한 몸 안의 남/여 요소의 혼합이라고 보았던 성과학자들(Havelocl Eliss, Kraft-Ebing)과 달리 프로이드는 성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성애적 기질(bisexual predisposition)이 있다고 보았다. 후의 연구에서 그는 각주를 통해 모든 인간은 양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며 여기에서 동성애, 이성애가 이후 발달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마치 양성애가 진화기의 전반부에 위치한, 따라서 마치 이성애나 동성애보다 ‘원시적’인 인간의 기질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Russelt, 1989; Storr 1997). 프로이드는 여전히 양성애가 무엇이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세 가지 에세이’에서 양성애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합이라고 보았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혼합으로는 보고 있지 않다. 작업기간 내내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 자체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었다. 프로이드에게도 양성애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미스테리였다.
양성애
도착과 신체적 자웅동체는 서로 무관한 독립적 요소이다.
양성애 이론은 ‘남성적 몸 안의 여성적 뇌(feminine brain in a masculine body)'라고 남성도착자를 일컫는 말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여성적 미‘란 어떤 기질을 말하는 것인지, 성기능을 주관하는 뇌의 부분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느 것도 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보기란 힘들다.
성도착자의 성적 대상
심리적 자웅동체 이론은 성도착자의 성적 대상은 보통 사람의 성적 대상과 반대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도착 남성은 남자를 찾는 여자와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부분 실상과 다르다. 상당한 경우 남성도착자는 남성적이고 오히려 여성적 성향을 성적 대상에서 찾는다. 예로써, 고대 그리스 성인 남성들이 소년애를 한 것은 소년이 남성다워서가 아니라 소년이 여성적-수줍음, 얌전함, 이끌리기를 바라고 도움받기를 좋아하는-성향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성적 대상은 동성 자체가 아니라 동성적 요소와 이성적 요소, 즉, 양성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이였고 따라서 대상의 몸(예, 생식기)이 남성적이어야하는 한편 이것은 남자를 추구하는 마음과 여자를 추구하는 마음 사이의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성적 대상은 일종의 주체 자신의 양성애적 기질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여성의 경우는 덜 모호하다. 적극적 여성도착자는 신체적, 정신적 양 측면에서 남성적 성향을 드러내고 여성적인 성적 대상을 추구한다.
E. Gley는 1884년에 최초로 양성애를 도착에 대한 하나의 설명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도착을 발달 기간 겪은 방해의 결과로 본다. A Dr Arduin(1990)은 모든 인간은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고, 이성애자의 경우는 이 중 특정 성향이 비교안되게 훨씬 강하게 발달되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 글(프로이드)의 영문 번역자인 James Srachey에 따르면 양성애의 중요성에 대해 프로이드가 인식하게 된 것은 사실 Fliess 덕분이었으나 프로이드는 양성애가 억압의 설명을 제공한다는 Fliess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신분석연구는 동성애를 어떤 특정한 종류의 인간집단으로서 간주하고 이들을 나머지 집단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어떤 시도나 태도에도 반대한다. 성적 흥분(반응)(sexual excitation)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정신분석연구는 모든 인간이 동성을 성적 대상으로 취할 수 있고 무의식적으로는 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동성에 대한 성충동적 애착은 이성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한 개인의 정신적 삶에 큰 요소로서 작용하고 또 질병의 동인으로서 더 큰 역할을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선택 대상은 성에 상관없이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대상으로 삼으며- 아동기나 원시사회, 역사초기에 찾아볼 수 있듯이-이것은 어느 한 방향으로 제한되고 한정된 결과로서 정상이 되거나 도착으로 발달하거나가 그 기본인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여성에게만 성적 관심을 갖는 남자들도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화학반응적 끌림에 기반한 자명한 일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한 개인의 최종적인 성적 태도는 사춘기가 되기 전까지는 결정되지 않는데 그 결정은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여러 가지 요인들의 결과이다. 이 중 어떤 요인들은 구조(구성)적인 것이고, 어떤 요인들은 우연적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중 몇몇 요소들은 아주 비중있는 영향을 미치게 되어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Ferenczi(1914)는 많은 경우 그저 도착적이라는 공통성 때문에 많은 경우의 상황들이/조건들이 ‘동성애’(혹은 Ferenczi의 말을 따르면 동성에로티즘)로 치부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적어도 스스로 여자같이 느끼고 행동하는 ‘주체동성-에로틱(subject homo-erotic)'과 완전히 남성적이면서 단지 성적 대상을 여자에서 남자로 대체했을 뿐인 ’대상 동성-에로틱(object homo-erotic)'의 경우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둘 중 전자가 진정한 ‘성적 중간자’이고 후자는 강박적 신경증으로 묘사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존재외에도 어느 정도의 ‘주체 동성-에로티즘’과 어느 정도의 ‘대상 동성-에로티즘’이 함께 나타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3. Wilhelm Stekel: [양성적 사랑](1920)

윌헬름 스테켈(1920)의 [양성적 사랑]은 [자위와 동성애(masturbation and homosexuality)]로 출간된 원고가 1922년 영어로 번역되면서 알려졌다. 정신분석학자 스테켈은 스스로를 프로이드의 후계자 중 하나로 표방하면서 그의 작업이 프로이드의 생각들을 발전시킨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몇가지 점에서 그는 프로이드와 현격히 달랐다(Garber 1995). 프로이드가 어렴풋이 양성애를 불가해한 어떤 것으로 두면서 양성애 개념을 조심스럽게 다뤘던 반면 스테켈은 과감하게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양성애적이고 극단적 이성애 혹은 동성애같은 단성애(monosexuality)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 그가 양성애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혼합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의 혼합과 함께 어떤 복잡한 것으로 이해하려했던 프로이드의 도식화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묵적으로 이런 시각의 변화를 통해 스테켈은 양성애의 모호성을 해결하기 보다는 옆길로 샌 것이다. 단성애가 비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도 공평하게 되지 않았는데, 이성애와 동성애 둘 다 잠재적으로 신경즉적 비정상 상태이지만 동성애가 훨씬 더 신경증적이고 비정상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에 프로이드가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프로이드의 것이라고 알려진 모든 것이 프로이드 자신이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 중 상당부분은 그의 후계자들의 오해와 잘못된 해석에 따른 것이다. 이 글에서 스테켈은 프로이드의 사고가 다른 이들에 의해 어떻게 취해졌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본래’ 양성애적이거나 ‘양성애적’으로 태어난다는 광범위하게 알려진 관점을 정연화하고 있다.
‘양성애’가 동성애와 이성애의 혼합이거나 이 둘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될 때 정신분석학은 모든 동성애자들이 생애 초기에 이성애적 경향을 예외없이 보인다는 것을 증명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단성애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이성애적 기간은 사춘기까지 계속된다. 모든 인간은 양성애적이다. 동성애는 자신의 이성애 경향을 억압하고 이성애는 자신의 동성애 경향을 억압한다. 자연은 우리를 양성애적 존재로 창조했고 우리가 양성애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춘기까지 현저히 양성애적인 기간을 보인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적 성향을 억압하고 동성애에 대한 갈망을 친교, 민족주의, 사회활동, 모임 등을 통해 승화시킨다. 승화가 실패하면 신경증적이 된다. 동성애적 성향을 완전히 극복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누구나 신경증적이기 될 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억압이 심할 수록 신경증적 반응도 강해져서 극단적이 되면 편집증으로 발달할 수 있다.
보통의 이성애자들보다 보통의 동성애자들에게 승화과정은 더 힘들다. 이것이 왜 동성애자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결과가 전형적인 신경증적 반응을 밝혀주는 지의 이유이다. 억압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은 불안, 수치심, 혐오, 증오 혹은 경멸감 등이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를 혐오하고 동성애자 남성은 여자를 혐오한다. 그러나 혐오는 끌림의 반대편에 있는 같은 감정이다.
드러내놓고 양성애적으로 살았던 민족은 그리스인들이다. 그러나 왜 양성애적인 건강한 삶을 살았던 그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던 그리스인들의 삶이 근대에서는 추구되지 않는 것일까?

4. Alfred C. Kinsey, Wardell B. Pomeroy and Clyde E. Martin: [남성의 성행동] (1948)

킨제이는 1930년대에 인간의 성행위에 대한 연구를 면접을 통해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1948년에 방대한 양적 연구자료를 수집했고, [남성의 성행동]이라는 두 권의 책을 썼고, 1953년에는 [여성의 성행동]이라는 책도 이어 출간했다.
그의 연구방법이나 통계결과 등에 관한 질문이 계속 되어오고 있고, 성에 관한 태도나 인식은 간과하고, 성행위에만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개념 형성에 있어 그가 한 기여의 중요성은 지속되고 있으며,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지속되는 것, 즉, 유동적인 것으로서 유형화한 것은 성과학과 대중적 논의 둘 다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남자/여자, 남성성/여성성, 혹은 이성애/동성애 개념을 참고해서 이루어져 온 양성애 개념에 대한 논쟁은 1940년대 후반에도 성과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했다.
이성애-동성애 균형
성적 행위와 관련해 사고할 때 과학자든 평범한 사람이든 ‘이성애적’인 개인들, ‘양성애적’ 개인들이 있고, 성적 세계에서 이 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고, 다른 집단들 가운데 위치를 차지한 ‘양성애자들’이 미미하게 있을 뿐이라는 가정을 바탕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이 이성애자로 혹은 동성애자로 태어난다는 것을 함의하고 생 후에 이를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 경험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평생 오로지 이성애적으로 사는 이도 있고 또 경험으로나 심리로나 평생 오로지 동성애적으로 사는 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시못할 수의 인구가 개인사에서 경험이나 심리로 봤을 때 이성애적인 동시에 동성애적인 이들이 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이성애적 경험이 우세하고 어떤 이들은 동성애적 경험이 우세하다. 그리고 그 두 경험이 비교적 비슷한 이들도 있다. 성행위 유형이 계속 변하는 이들도 있는데 어떤 남성은 같은 시기(같은 해, 달, 주 혹은 날)에 이성애적 행위와 동성애적 행위를 하기도 한다. 양 성과 동시에 성관계를 갖는 이들도 그리 적은 편은 아니다.

<케인즈의 이성애-동성애 척도>p.33
0 1 2 3 4 5 6
0 절대적으로 이성애적이고 동성애적 경험이 전혀 없음
1 거의 절대적으로 이성애적이나 우발적인 동성애적 경험이 있음
2 거의 절대적으로 이성애적이나 우발이라고 하기에는 좀더 빈번한 동성애적 경험이 있음
3 이성애적 경험과 동성애적 경험이 동등하게 있음
4 거의 절대적으로 동성애적이나 우발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빈번한 이성애적 경험이 있음
5 거의 절대적으로 동성애적이나 우발적인 이성애적 경험이 있음
6 절대적으로 동성애적임
인구를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두 분리된 집단으로 나눌 수 없다. 자연은 완전히 분리된 분류가능한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 분류학의 기본이다. 오직 인간의 마음만이 분류를 만들고 있는 그대로의 것을 각각 분리된 정리함으로 강제로 넣기위해 애쓴다. 살아있는 세상은 모든 각각의 측면에서 하나의 연속태(continuum)에 존재한다.
다시 강조할 것은 현실에서는 이 각각의 분류들이 연속적인 연속체라는 것이다. 앞의 정황으로 봤을 때 누구도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동성애자들의 특성을 제3의 성(sex)이라고 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동성애자 혹은 이성애자의 수를 묻는 질문은 따라서 불가능하다. 단지 척도에서 어느 지점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가에 따른 사람의 수를 세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양성애
50퍼센트가 배타적 이성애자이고 4퍼센트가 배타적 동성애자라면 46퍼센트는 성인기동안 양 성 모두와 신체적 혹은 (그리고) 심리적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다. 양성애라는 개념은 한 번도 엄격하게 한계가 지어져 기술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개념이 척도범위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답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척도를 3개로 만들어 이성애,양성애,동성애로 둔다면 이들 사이에 있는 있는 그대로의 지속성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이 중간 척도들에 있는 집단의 사람들을 양성적(bisexual)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개념은 실재하는 특정 개인들, 즉, 사람을 일컫고, 그 어원과 대체로의 쓰임새는 이 사람들이 하나의 몸에 남성적 특질과 여성적 특질을 모두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성적, 동성적이라는 개념을 개인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명사로 쓰는 것에 반대해 왔다. ‘양성적’ 사람들이 마치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인 혹은 동시에 두 성일 수 있는 해부학적 혹은 내분비적 혹은 다른 종류의 신체적 혹은 심리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듯 말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양성적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에서 양 성의 기능이나 해부학적 구조를 포함하는 구조나 개인 혹은 개별 군체를 위해 쓰여왔다. 수정되지 않은 알에서 단성생식을 하는 모든 개체가 암컷인 단성류(unisexual species)가 있다. 반대로 암수 모두이면서 대체로 암컷이 낳은 알의 수정을 통해 개체생산을 하는 양성류(bisexual species)가 있다. 동식물 중에는 세대를 바꿔가며 한 세대엔 단성적, 그 다음 세대는 양성적으로 번갈아 하는 종들이 있다. 척추동물의 생식선으로 발달하는 배아구조에 양성적이란 말이 쓰일 때는 그 배아가 난소나 정낭 양쪽 어느 것으로든 발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렁이나 몇몇 달팽이, 드물게는 인간같이 자웅동체인 경우 양성적이란 말이 쓰일 수 있는데 이때는 하나의 몸에 난소와 정낭 양쪽이 다 있다는 말이다. 이상이 생물학에서 ‘양성적’이라는 개념의 쓰임새이다.
한편, 인간의 성적 행위에 대해서는 이 개념이 남자, 여자 모두와 성적 관계를 갖는 개인들을 가르킨다. 그런 성적 관계가 꼭 생물학적인 구조나 신체적 특질을 모두 가져야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이들을 양성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일반인들이나 성행위 연구생들이 이 개념을 즐겨쓰는데 양성적이라는 말은 동성(애)적, 이성(애)적이라는 말에 맞추어 만들어졌고, 대상의 성(sex)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뿐 당사자에 대한 어떤 것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5. Fritz Klein: [양성애적 선택: 백퍼센트 친밀함의 개념(The Bisexual Option: A Concept of One Hundred Percent Intimacy)](1978)

프리츠 클레인의 [양성애적 선택: 백퍼센트 친밀함의 개념]은 복잡한 시기에 출간된 책이다. 1970년대의 (서구) 게이해방운동이 성적 취향과 정체성을 정치적 사안으로 놓으며 ‘커밍아웃’을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것으로 강조했고, 이 와중에 특히 미국에서 상당수의 양성애적 집단이 등장했다 (Donaldson, 1995; Raymond and Highleyman, 1995; Udis-Kessler, 1995). 타임이나 뉴스위크같은 주요 시사잡지에서 양성애를 커버스토리로 다뤘고(Garber, 1995) 양성애는 신나는 혹은 ‘최신 유행’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양성애적 선택’은 마가렛 미드의 [양성애: 그것에 대한 모든 것](1975), 샬롯떼 울프Charlottee Wolf의 [양성애 연구](1977)와 함께 나온 주요 출판물 중 하나이다. 의료계, 정신분석학계, 상담계에서는 양성애가 성인의 한 성적 지향성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 중 몇몇은 양성애자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의 동성애를 부정하거나 드물게는 이성애를 부정하기 위해 그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Ruitenbeek(1973:204)은 양성애란 ‘신화’이고 그것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쓸데없고 해롭기까지 하며, 성적 선택을 어느 쪽으로든 내려서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클레인의 [양성애적 선택]은 양성애운동과 개념의 발달에 지침이 된 텍스트이다. 스테켈을 이어 클레인도 양성애를 이성애와 동성애의 조화 혹은 공존으로 다룬다. 킨제이처럼 그도 섹슈얼리티를 연속적인 것으로 봤고, 1990년대의 인식론적 논쟁을 예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양성애 인식론에 팽배해 있었다. Clare Hemmings(1993)에서는 ‘스파이’, ‘배신자’ 형상의 양성애가 계속 등장하고 성정치에서의 ‘이중 행위자(double agent)'로서의 형상, 인종분류와 같은 류의 분류로서 ’피 한방울 섞인‘ 등이 1990년대 특히 유색 양성애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퍼졌다 (Jordan, 1992a; Fehr,1995). 1993년 클레인은 HIV/AIDS와 관련한 내용을 덧붙여 개정판을 냈고, 킨제이의 연속태모델을 이어 클레인의 성적 취향표(Klein Sexaul Orientation Grid)를 개정판에 포함시켰다.
양성애를 감춰진 이성애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향. 시장, 정부, 종교계에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논리적. 개인의 자기 정체성 찾기에도 이런 관행이 발현됨.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에 집착했음. 비극이었음.
인간은 소속감을 필요로 한다. 사업에서 특이 두드러진다. 사고파는 것은 팔려는 사람이 그것을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때 가장 성공적이 된다. 양성애자는 주어진 것에 덜 충실할런지도 모른다. 차이(다름), 선택의 자유는 선사때부터 집단의 위협이었다.
오래된 낭만스런 질문 중 하나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이다. 내 대답은 그럴 수 있으면 그럴 수 있다이다.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으면 역시 그럴 수 있으면 그렇다이다. 이것이 충실함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관계에서 필요한 신뢰라는 부담을 지기 힘들다는 말일까? 아니면 (양성애자는) 이중역할을 하는 ‘스파이’인가? 전쟁 중 국제법에 의하면 스파이는 일단 잡히면 총살당한다. 반역죄를 지은 일반 시민은 더 가중한 처벌을 받는다. 공공연하게 심한 비난을 받고 종종 살해당하기도 한다. 간첩이나 배신자는 너무 혐오스러운 것이라 그들을 ‘없애는’ 데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양성애자는 스파이와 닮았다.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들 사이에서 성심리적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배신자와도 닮았다. 양쪽 진영의 비밀을 다 아는 위치에 있고 한 진영에서 다른 진영에 반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양성애자는 믿음을 줄 사람이 아니다. 소속된 부분에 충실하다는 것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실함이 없으면 인간의 성적 영역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되고 곧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위장은 속임수이다. 어떤 이가 평생 위장하며 살았다면 누구도 그를 신뢰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양성애는 동성애나 이성애의 위장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성적 표현인 것이다. 성적 상태(성향)가 어떻든 간에 그 사람은 죽는 그날까지는 연속선 속에 있다.
우리는 이름붙이기에서 위안을 받는다. 이름(호칭)은 서로서로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획득한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 우리의 특별함을 제한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현상은 바로 우리가 이름붙이기를 지속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름붙이기는 불확실함, 모호함, 두려움의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 중 시도된 적이 있는 진정한 방법이 이름붙이기이다. 위협은 제거가능한 것일 때 가장 잘 다뤄진다.
거의 모든 이성애자들과 동성애자들에게 양성애자는 자신들의 성적 양가성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이중적(dual) 섹슈얼리티적인 낮선 존재이다. 그들은 그들이 선호하는 것은 공통되게 선호하고 그들이 회피하는 것은 또 회피하지 않는 양성애자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분쟁을 피하고 싶은 것은 삶에서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마음의 평화건 오직 스스로를 아는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나 허락된 일일 것이다. 부정은 안정이라는 것이 유지되기 위한 전통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동성애라고 이름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한편 이성애 남성은 어떤 동성애 남성이 어떤 남성을 성적으로 매력적으로 본다는 것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남녀 양쪽 모두에게 끌리는 양성애적 남성이 어떤 남성을 매력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맘편히 무시해버리기엔 어떤 관계라도 있는 듯 여겨질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친밀함에 대한 두려움이 부분적으로는 이성애 혐오증이나 동성애혐오증 혹은 이성이나 동성 혹은 둘 다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두려움의 주된 이유와 이로 인한 혼란은 섹슈얼리티와 친밀함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같이 붙어 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섹슈얼리티와 친밀함은 상호보완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독립적인 감정이다. 이 둘의 공존은 각각의 상황과 사회적 압력에 달려있다.
친밀함이 단순히 아픈 친구를 병문안해 돌보는 것같은 순수하고 가벼운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될 때는 성관계의 가능성이 생겨날 때이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는 느낌을 나눌만한 친밀한 상황에서 서로 포옹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울 때 어떤 개인적 혹은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그런 감정을 부정한다면 그들은 그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반응에 자유롭게 반응하지 않으므로 백퍼센트 친밀하지 않은 것이다.
성적 지향도 친밀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성적 지향이든 그 지향 안에서 총체적인 친밀함이 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은 성적 지향의 어느 척도에 위치해 있느냐에 관계없이 소위 시랑이란 것을 필요로 한다. 처음에 우리는 어머니와 하나였고 탄생의 정신적 충격과 합체(unity)의 죽음과 함께 삶이 시작되었다. 친밀성은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태어날 때를 기억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오지도 않으므로 있는 존재로서 겪는 가장 특별한 친밀, 즉 다른 인간 존재와의 합체를 위해 애쓰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서 겪는 가장 특별한 두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완전히 신뢰하면서 그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느낌과 그 사람과 경험과 감정을 나누는 행동은 이 두 사건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다. 얼마나 자주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다시 태어난 것 같아’ 혹은 사랑이 끝날 때 ‘내 안의 일부가 죽어버린 것만 같아’라고 하는 듣게 되는가.
순수하게 백퍼센트의 친밀의 가능성은 양성 모두와의 관계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열어놓았을 때 가능하다. 친밀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최소 친밀, 한정된 친밀, 완전한 친밀이다. 모든 인간은 친밀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느낄 심리적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환경적, 신경적, 혹은 양쪽 모두의 영향으로 다른 사람과 전혀 친밀함을 느낄 능력이 없을 때가 최소 친밀의 단계이다. 한정친밀단계는 최소친밀보다는 나아가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함에 있어 완전한 신뢰가 없을 때의 단계이다. 이 단계를 넘으면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느낌과 감정과 경험을 완전히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친밀함의 상황은 셀 수 없이 다르다. 그러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성적 친밀과 감정적 친밀이다. 성적 친밀은 물리적인 충족, 성적 만족이다. 갓난 아기 때 겪을 수 있었던 그 가까움을 성적 성인으로서 다시 한번 맛보는 것이다. 성적 친밀에 대한 필요와 욕구는 강력하고 대체로 이른 시기부터 노년기까지 성취되어 진다. 가장 심한 벌이 친밀함을 제거해 고립시키는 것이다. 독방감금은 사형 다음으로 심한 벌이다. 감정적 친밀은 ‘인간’이라 불리는 사회적 동물에게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성적 친밀과 감정적 친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접촉을 통한 가까움이다. 접촉은 반드시 성적일 필요는 없다. 사랑과 신뢰의 느낌은 태어나던 그 순간 접촉을 통해 전달되고 이 시기의 접촉은 성행위동안을 빼면 생의 어떤 순간의 그것보다 완전한 접촉이다.
이성애 혐오 혹은 동성애 혐오는 감정적 친밀의 상태에서 성적 친밀에 대해 갖는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이다. 감정적 친밀도 몸의 접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성을 멀찌감치 놓아두려고 우리는 종종 감정적 친밀도 피한다. 친족관계, 스포츠, 재난이나 슬픔에 차 있을 때 두 남자가 껴안거나 심지어 키스를 하는 등의 접촉이 크게 성적 의미를 부여받지 않는 것은 그것이 유아기 때의 원초적인 ‘전성적인(presexual)' 포옹과 닮아있거나 같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접촉을 동반한 친밀함같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부정하고 조건이 되었을 때도 그런 욕구를 돌 볼 생각을 애써 버려왔던 사람들은 결국 신경증적 증세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는 얼마나 강력하고 철저히 그것을 회피해 왔는가에 달려있다. 이들은 결국 순수한 백퍼센트 친밀을 부정하게 된다.
건강한 양성애자가 건강한 것은 그 풍부한 감정적 역량 때문이다. 건강한 양성애자, 이성애자, 동성애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성적 취향과 행위 밖에 없다. 감정적으로는 세 집단 모두 ‘양성애적’ 수준에서 움직인다. 즉, 어느 쪽 성과의 감정적 친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호작용의 방식은 어떤 유형의 친밀감을 갖느냐에 영향을 미치는데 남녀는 문화적으로 다른 상호작용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건 두 사람 사이에 가능한 상호작용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대칭적(symmetrical) 소통이고, 다른 하나는 보완적(complementary) 소통이다. 대칭적 소통을 하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다. 서로 동등하고 경쟁적인 위치에서 서로간의 차이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소통한다. 보완적 소통을 하는 이들은 서로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다소 주종적인 관계를 통해 상호만족을 느낀다.
남남, 여여의 친구사이에서 친밀은 대칭적이다. 보완적 상호작용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완적 상호작용은 대체로 한 쌍의 관계를 함의하고, 한 쌍은 성적 친밀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대칭적 유형과 보완적 유형 사이의 균형은 관계 속의 두 사람 각각의 화학작용에 달려 있다. 경쟁은 성적인 의미를 거의 가지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친구들 사이에서 경쟁을 통해 친밀을 유지한다. 그러나 양성애적 친밀은 양쪽 모두가 가능하게 둔다. 그리고 양쪽 유형의 관계 모두에서 백퍼센트 감정적 친밀 고유의 탁월한 가까움이 획득된다.

6. Amanda Udis-Kessler: [킨제이 척도와 다른 섹슈얼리티 측정에 대한 소고(Notes on the Kinsey Scale and Other Measures of Sexuality)](1992)

우디스-케슬러는 세 가지의 섹슈얼리티 ‘측정’ 척도의 장단점에 대해 조사했다. 그녀는 척도자체가 양성애에 대한 이해에 어떤 역할을 하고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이는 어떻게 측정하는가에 따라 해당 인원수가 달라지고 개념화하는 방법이 다름을 반영한다. 이같은 문제는 정체성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게 한다.
우디스-케슬러의 글은 킨제이의 척도가 단차적(one-dimensional)이라 본다. 단차적인 수치는 양성애 혹은 양성애의 정도가 하나의 축 위의 고정된 위치(들)에 놓여서 ‘순수한’ 동성애와 ‘순수한’ 이성애와이 거리를 가질 뿐임을 보여준다. 킨제이의 원래 그래프는 양성애 정도를 이성애와 동성애의 다양한 비율의 혼합으로 보여준다. 이 두 서로 다른 킨제이 척도가 가진 문제는 양성애가 이성애와 동성애의 조합(combination)으로 이해되어야 할 지 아니면 둘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지 해결할 수 없고 각각 다른 시기에 다른 이들 심지어 때로 같은 이들에게서 다른 대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양성애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들(남/여, 남성성/여성성,이성애/동성애)과 함께 그것들의 조합인지 그것들 사이에 있는 것인지 두 불안정한 모델은 양성애 논쟁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주제이다.
킨제이 척도와 함께 Michael Storms, Fritz Klein의 척도도 잘 알려져 있다. 킨제이는 1940년대에 인디아나대학의 동물학자였는데 우연히 인간섹슈얼리티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때 인간섹슈얼리티에 대한 최근 연구결과가 없음을 깨닫고 직접 만여명의 사람들을 설문조사하고 면접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발행된 책은 잘 팔렸는데 성에 대해 판단적이지 않은 접근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 편히 와닿았던 것 같다. 조사 남성 중 3분의 1이 성인기에 동성적 만남을 통해 오르가즘을 느낀 적이 있고, 46퍼센트가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아님이 발견되었다. 성적인 범위는 놀라웠고 이를 이해가능하게 전달하기 위해 킨제이는 척도를 그려 보여준 것이다.
킨제이는 섹슈얼리티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척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구 중 10퍼센트가 이반(gay)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되어 왔다. 이런 인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거의 정확하지 않은 것이고 킨제이의 데이터가 전 국가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킨제이의 모델은 1970년대까지 누구도 문제삼지 못했으나 두 번째 섹슈얼리티 척도로 이어진 성별역할(gender role)에 관심을 가진 심리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 대상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성별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이라 이름붙여질 만한 특성 혹은 성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었다. 그같은 특성은 한 끝에 남성성이 있고 반대 끝에 여성성이 있는 하나의 양극 척도(single bipolar scale)에서 측정되었다. 이 척도는 섹슈얼리티 척도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양극단에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남성적이거나 전적으로 여성적이고 척도의 중간지점은 잘 정의되지 않았다. 중간이 남성의 특성과 여성의 특성을 모두 가진다는 것인지 남성의 특성도 거의 안가지고 여성의 특성도 거의 가지지 않는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성별역할연구자들이 이 전통적인 척도가 성별특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인지 문제제기 하기 시작했다. 몇몇 심리학자들이 남성성 척도 따로, 여성성 척도를 따로 두고 측정해 남성성이 높게 나오고 동시에 여성성이 높게 나올 수 있도록 했고 이로써 문제는 상당히 해결되었다.
킨제이의 섹슈얼리티 척도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분명히 연속성을 통해 양성애의 정도를 보여주려 했지만, 처음의 성별척도처럼 섹슈얼리티 척도에서도 중간이 동성애이자 이성애임을 말하는지 동성애도 아니고 이성애도 아닌 것을 말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스톰스 섹슈얼리티 축(The Storms sexuality axis)>p.52
켄자스대학의 심리학자 Michael Storms는 섹슈얼리티와 성적 상상(fantasy)을 연구했는데 그에 따르면 양성애자의 이성애적 상상은 이성애자만큼 강하고 동성애적 상상은 동성애자만큼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근거로 그는 양성애가 완전히 이성애적이고 동시에 완전히 동성애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킨제이척도에서처럼 둘 사이에 있다기 보다는 말이다. 1980년 스톰스는 두 개의 분리된 연속선이 아니라 X-Y축으로 된 새로운 섹슈얼리티 척도를 제안했다.
정신분석학자 프리츠 클레인(1985)은 클레인 성적 지향판(Klein Sexaul Orientation Grid)을 개발해서 복잡한 인간의 성적 태도, 감정, 태도 등을 식별하고 이해하고자 시도했다. 클레인은 기존의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가 지나치게 불분명하고 일관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킨제이의 척도가 정도를 측정하기에는 유용하지만 매력, 성적 상상, 행위 등의 성적 정체성을 이루는 각각 다른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하고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보았다. 클레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SOG를 만들었고, ‘플레이보이’지의 아류인 ‘포럼’ 독자들을 통해 그 유용성을 시험했다.
클레인의 모델은 성교육자들이나 양성애자 일반에서 많은 호응을 얻어왔다. 이 모델은 다각적으로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킨제이나 스톰스가 가졌던 개념상의 불분명함을 상당히 극복한 것이다. 그러나 스톰스가 지적할지도 모르는 비성애(asexual)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섹슈얼리티 측정이 많은 이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성주의 사회과학자들과 연구방법론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은 섹슈얼리티같이 한 사람의 어떤 한 면을 추상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그 자체 내에서만 유용한 데이터로 한정해서 봐야 한다고 보았다. 더욱이 설문, 질문지, 보고서 작성방법은 그저 어떤 사람 개인의 자기인식을 말해 줄 뿐이지 행위, 동기, 혹은 무의식의 영향 등까지 반드시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연구방법은 어떤 철학적 관점 안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몇몇 여성주의자들은 그것이 남성의 특성을 문제의식없이 당연한 규범으로 삼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거
현재(최근 몇 년)
이상적인 미래 목표
성적 매력
성적 행동
성적 상상
감정적 선호
사회적 선호
자기 규정
생활 양태(lifestyle)
성적 매력: 누가 당신을 흥분시키나? 누가 실제의 혹은 잠재적 파트너로서 매력적이라고 보나?
성적 행동: 누가 당신의 성적 상대인가?(파트너인가?)
성적 상상: 당신의 성적 상상 속에서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는 것을 좋아하나?
감정적 선호: 누구와 함께 깊은 감정적 유대를 쌓는 것을 더 좋아하나?
사회적 선호: 어떤 성의 대상과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하나, 어떤 성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한가?

<클레인 성적지향판>
또 하나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이 윤리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섹슈얼리티 척도가 성을 기술화하는(techonologizing sex) 유행의 일부라고 비판하는 이들이다.
1990년대에 새로운 척도가 Berkey와 그 동료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클레인과 스톰스를 고려하면서 개발된 이 척도는 양성애자들을 여섯 개의 범주 안에 넣고 있다. 예를 들어,
(1) 전적으로 이성애자였다가 전적으로 동성애자로 변한 이들
(2) 전적으로 동성애자였다가 전적으로 이성애자로 변한 이들
(3) 기본적으로 한 성에만 끌리고 항상 한 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주 가끔 그와 다른 성의 사람을 욕망하거나 성적 접촉이 있는 이들
(4) 기본적으로 한 성에만 끌리나 아주 가끔 그와 다른 성의 사람을 욕망하거나 성적 접촉이 있는 이들
(5) 양쪽 성에 동등하게 끌리지만 항상 한 번에 한 성에만 초점을 두는 이들
(6) 양쪽 성에 동등하게 끌리지만 항 양성 모두에게 끌리고 이들 모두와 활동성을 가지는 이들

"이성애와 레즈비어니즘 그리고 양성애"

여이연 2007 여름강좌
- 섹슈얼리티 I
강사: 박이은실 (여이연)

<강좌 자료>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Feminism and Sexuality) / 스테비 젝슨(Stevi Jackson), 수 스캇(Sue Scott), 1996
성적인 논쟁지점과 여성주의 내의 분파들: 여성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25년간의 논쟁
- 이성애와 레즈비어니즘, 그리고 양성애
번역: 여이연 섹슈얼리티 세미나팀

최초의 이성애에 대한 비판은 초기 여성해방운동에 개입했던 여성주의자들 사이의 논의에서 잘 드러나 있는데, 이는 레즈비어니즘이 가부장적 지배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이자 실현가능한 한 가지 대안으로서 가시화되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레즈비어니즘과 이성애에 대한 논쟁은 여성해방운동진영 내부에 긴장을 불러왔다. 이 긴장은 여성운동 내부에 균열을 초래했다는 측면에서 파괴적이기도 했으나 이성애를 보다 적합한 이론으로 만들도록 강제했다는 측면에서 생산적이기도 하였다.
제2세대 여성주의 초기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이성애에 관한 논의와 동의어였고, 남성과의 관계에서 만족감을 높이려는 여성들의 싸움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이성애는 삽입 성행위를 ‘진정한 것’으로 강조하면서 남성의 쾌락을 우선시해왔고, 질오르가즘 신화를 지속시켜왔다. 안느 코에디뜨Anne Koedt의 글은 발표될 당시 최소한의 성기접촉을 하면서 최대한의 쾌락을 느끼는 것이라고 속아 지내왔던 여성들의 성행위 방식을 바꾸는 데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글이다. 여성의 성적 절정이 질보다는 음핵에 집중해 있다는 논쟁의 근거는 주류 성과학 연구물로부터 여성주의자들이 목적에 맞도록 차용해 사용한 것이다. 코에디뜨와 몇몇 다른 이들은 이 ‘발견’이 성적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했고, 삽입성행위를 부차적인 성행위로 간주하게 하였으며, 여성의 성적 만족에 남성의 성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게끔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코에디뜨의 비판은 잘 겨냥된 것이었다. 남성의 성적 욕구와 여성의 성적 의무라는 신화에 빠져 있었던 많은 여성들에게 여성이 성적 쾌락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비교적 새로운 주장이었다. 1970년대가 되면서 성이 여성에게도 즐거울 수 있고, 즐거워야 한다는 인식은 주류 문화 속으로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여성주의를 접하지 않은 많은 젊은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성적 기관들과 성적 쾌락의 가능성에 무지했다. 심지어 지금도 이와 같은 정보들이 [코스모폴리탄]같은 잡지를 통해서 유통이 됨에도, 젊은 이성애자 여성들은 자신이 어떻게 쾌락을 느끼는지에 대해 말하고 이것에 대해 요구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코에디뜨는 여성의 성적 쾌락을 위해 남자들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고 제안했는데, 이것을 레즈비어니즘까지 밀고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여성주의자들의 논쟁은 레즈비어니즘과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레즈비언들은 여성해방운동 초기부터 가시적인 존재들이었으나 그들의 역할은 그들 각자의 정치적 개입 여부와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이 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의 정확한 관계는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게이운동과 여성운동이 1960년대에 거의 동시에 일어났고, 양 진영 모두에서 보다 급진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은 가부장제라는 공동의 적을 직면했다. 두 나라 모두에서 게이해방운동(GLF)은 다른 피탄압집단과 동맹관계를 맺고자 노력해왔고, ‘여성탄압의 근원이 자신들에 대한 탄압의 근원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봤다. 많은 레즈비언들이 게이해방운동을 통해 성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거나 게이정치와 여성주의정치 모두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게이정치에서 남성 중심적인 의제들이 환멸을 불러왔다. 레즈비언들이 전세계적으로 여성운동 내부에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여성주의운동이 전국여성조직(NOW)에 의해 대표되듯이 개량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즈비언들도 결합하기는 했지만, ‘존경받을만한’ 얼굴들로 대표되고 싶었던 이 조직에서 환영받지는 못했다. NOW의 영향력있는 회원이었던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1970년 제2회 NOW 총회에서 레즈비언들을 ‘보라색 골칫거리’라고 불러서, 이들의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NOW의 회칙을 바꾸고 여성들이 스스로의 성적 권리를 스스로 규정할 권리를 재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자유주의적 여성주의 경향 아래에서 레즈비언들은 여전히 문제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미국과 여러 다른 곳에서 레즈비어니즘을 핵심사안으로 만들어 낸 이들은 바로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었다. 뉴욕에서 레즈비언들의 주변화에 대해 저항했던 그들이 1970년 [급진적 레즈비언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여성관계적 여성(women-identified women)”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레즈비어니즘을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위치시킨 최초의 선언 중 하나였다. ‘한 명의 레즈비언은 일촉즉발에 있는 모든 여성들의 분노다’ 라고 적혀 있는 이 글은 여성들이 개별 남성들과의 관계를 위해 애쓰는 동안은 스스로의 해방과 더불어 모든 여성들의 해방은 늦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레즈비언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힘을 탄압자인 남성들이 아니라 바로 자매들인 여성들에게 쏟는다. 이 후 몇 년 동안, 많은 북미, 유럽과 호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이 같은 관점을 발전시켰고, 이것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의 한 가지인 개량주의자들은 미국 밖에서 별로 진전을 거두지 못했고, 여성운동 내부에서의 레즈비언들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도 미국 밖에서는 덜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여성해방운동의 주류는 급진주의적 여성주의와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였고, 레즈비언들은 이 양 집단 모두에서 주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불편함이 존재했고,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은 ‘남성혐오 뚝방(dyke)들의 집단’이라 부르며 여성주의자들을 폄하하는 태도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는 ‘규범적’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영국 여성해방운동 초기의 주요사안은 특별히 레즈비언관련 사안을 배제했고, 197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들의 요구사항에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스스로 규정할 권리와 레즈비언들에 대한 차별종식을 첨가했다. 이때가 돼서야 레즈비언 여성주의는 영국여성운동진영에서 주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성애자들로 지내왔던 많은 여성들이 이 시기에 레즈비언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냈고, 선천적인 기질로서보다는 정치적 입장이나 삶의 한 양식의 개념으로써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레즈비어니즘은 어떤 이들에게는 ‘어떤 여성이건 할 수 있는’ 이라는 표어에서 보여지듯이 어떤 여성이건 선택하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렇지만, 이 여성들을 여전히 이성애자로 남게 하는 많은 제약들이 있다는 인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성애에 대한 비판은 남성적 성적 부조리에 대한 불만족에 대한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이성애는 남성이 여성의 몸과 여성의 노동을 전유하는 제도로 간주되었다. 남성에 대한 낭만적 애착은 결국 착취로 귀결되었다. 또 하나의 유명한 표어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당신이 그의 두 팔 안에 안기는 것에서 시작해 당신의 두 팔을 그의 씽크대에 담그는 것으로 끝난다’.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따라서 가부장적 지배로부터의 탈출이자 그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런 면에서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은 가부장제를 남성지배체제로서 보는 급진적 여성주의적 관점을 이미 견지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주로 나타났다. 이들 중 몇몇은 ‘분리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고, 남성들과의 어떤 개인적, 정치적 동맹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생긴 급진적 레즈비언들과 다른 여성주의들 사이의 긴장이 1970년대 말기에 와서는 여성해방운동에 특히 저해가 되었다. 다른 경계지점들을 따라 생겨난 불화들과 함께 이 불화는 하나의 통일된 여성운동이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레즈비언들과 이성애 여성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 많은 레즈비언 여성주의자들이 분리주의를 정치적 해결책으로 추구하는 것에 반대했고, 특히 분리주의 노선이 이성애자로 머무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는 것에 반대했다. 여성해방운동이 일기 이전에 이미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던 소위 ‘진짜 레즈비언들’은 이 시기 성정체성 전환에 대한 열의에 대해 반신반의했고, 이렇게 전환한 이들의 (성적) 욕망의 진정성에 대해 우려했다. 섹슈얼리티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안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레즈비언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논쟁에서 대체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었다. 레즈비언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이 양진영 모두에 포진해 있어서 급진적 여성주의 내부에서 격렬하고 고통스런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이 논쟁이 불러온 긍정적인 측면은 이성애에 대해 비판적인 진영과 레즈비언 정치학 진영 모두에서 풍성한 이론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지표적 출판물이 에드리엔 뤼취Adrienne Rich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의 현존’이다. 뤼취는 이성애의 제도화에 초점을 두고,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간주되는 이성애가 사실은 여성에게 강제되는 것이었음을 주장했다. 그녀는 레즈비언과 이성애 여성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기 보다는 모든 여성들이 위치될 수 있는 레즈비언 연속성(a lesbian continuum)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다른 레즈비언들은 뤼취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의 특정성과 이들이 레즈비언으로서 겪는 억압을 부정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편, 스스로를 급진적 레즈비언이라고 규정하는 이들은 뤼취가 제도 자체의 억압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성애에 대한 강제성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애에 대한 뤼취의 비판은 이성애 여성주의자들 개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사실 이 점이 급진적 레즈비언들이 그녀의 견해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쉴라 제프리Sheila Jeffrey는 뤼취가 ‘이성애 여성들이 레즈비언 연속성에 공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정당하다고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남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당시 나왔던 다른 분석은 이성애 여성주의자들과 이들과 분리되기를 바라지 않는 레즈비언들에게 훨씬 더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은 여성해방운동의 배신자라는 생각은 1970년대 초기부터 있어왔던 것이었지만, 70년대 말이 가까워오면서 유럽에서는 큰 목소리를 얻기 시작했다. 1978년 영국에서 열린 마지막 여성해방운동 총회에는 이 사안을 중심으로 혼란스러운 적대 전선이 형성되며 분열되었다. 이듬해 리즈 혁명적 여성주의자Leeds Revolutionary Feminists라고 알려진 단체는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반이성애의 예’라는 제목을 글을 배포했는데, 이것은 이성애와 여성주의가 상호 배타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글이었다. 이것은 더욱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급진적 여성주의와 혁명적 여성주의자들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긋는 결과를 낳았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레즈비언이건 이성애자이건 간에 여성해방운동이 모든 여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모든 여성들이 공통적인 억압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똑같이 신랄한 논쟁이 프랑스에서도 있었는데, 모니끄 위티그Monique Wittig의 ‘일반의 사고방식The straight mind’이라는 제목의 글이 1980년 초반 여성주의자들의 질문Questions Féministes에 실리면서 급진적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공적 논쟁이 촉발되었고, 이 논쟁은 ‘누구도 여성으로서 태어나지 않는다(One is not born a woman)’라는 제목으로 다음 호에 실린 글에 의해 더욱 가열되었다. 위티그는 레즈비언은 가부장적 계급 체제로부터 이탈한 탈주자이고, 여성은 남성에 대한 스스로의 종속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므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결론짓는다. 그 해 파리 여성주의 집단들에서는 이성애 여성들은 자신들을 옹호해주었던 레즈비언들이 ‘kapos’라고 매도되고, ‘동성애 여성들’이라고 불림으로써 레즈비언이 될 자격이 부정되는 동안 조력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이성애자건 레즈비언이건 마리에-조 다버나스Marie-Jo Dhavernasr를 포함한 많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이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영국에서의 자매들처럼, 이들은 급진적 레즈비언들의 이러한 전위적 입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이들이 남성이나 가부장제가 아니라 이성애 여성을 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여성운동을 반여성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논쟁은 거의 여성들 사이의 다른 차이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이 이루어졌다. 남성을 계급의 적으로 위치시키면서 좀 더 넓은 사회적 의미에서의 계급개념은 무시되었고, 인종의 차이도 마찬가지로 간과되었다. 여성이 다양한 형태의 교차적 억압의 위치에 놓여있는 방식은 레즈비어니즘과 이성애 양쪽 모두의 경험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준다. 흑인 레즈비언으로서 셔릴 클락Cheryl Clarke은 동성애혐오증과 인종주의에 저항해 흑인공동체와 백인공동체 양측에 대항해 싸우는 등 다양한 전방에서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안은 여성주의 내부에서의 차이들에 대한 질문을 더욱 광범위하게 불러왔고, 이로 인해 여성의 삶에서의 본래적인 모순과 복잡성을 다양하게 고려하면서 기존의 남성지배에 대한 이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빚어진 결과 중 하나가 여성주의 이론을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지고 이론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이었다.
특히 좌파 학자들 중에서 전통 맑스주의에 대해 실망하고 있던 이들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 매력을 느꼈다. 여성주의자들과 게이이론가들 사이에서 전유되고, 섹슈얼리티에 적용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결과적으로 퀴어이론의 발전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레즈비언’ 등과 같은 범주를 만들어 이것을 정치적 정체성의 바탕으로 삼기보다는, 퀴어이론은 남성과 여성, 일반(straight)과 이반(gay) 등을 양분화하는 기제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와 같이 정체성이란 각 개인 주체가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이동적이어서 채택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하며, 유희적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전복되기도 하고, 각각 다른 맥락 속에서 전개되기도 한다. 급진적 레즈비언 관점은 레즈비어니즘을 가부장제도의 반대적 위치에서 가부장적 관계 외부에 있는 어떤 고정된 저점으로 둠으로써 본질주의로 보여졌다. 정치적으로 퀴어이론의 목적은 성별(gender)과 성적 범주가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담론의 결과물인 ‘조절(규제)되어지는 허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퀴이이론은 공공 ‘키스소(kiss-ins)’, 조롱 결혼식(mock weddings), '성별과 씹하기(gender fuck)'의 개념 등 길거리에서 모방적인 수행을 연행함으로써 옷입기와 관습에 위배되는 성적 수행을 해 성별 범주에 도전하고 이로써 퀴어정치학과 만난다.
퀴어는 성별과 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 퀴어도 있고, 양성애 퀴어도 있으며, 트 래니(tranny) 퀴어, 레즈(lez) 퀴어, 꽃미남 퀴어도 있고, 에스엠(SM)퀴어, 손가락 (fisting) 퀴어도 있고, 이 냉담한 우리 나라 거리 곳곳에 퀴어들이 있다.
이 인용글은 퀴어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꼬리표달기가 오직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레즈비언 여성주의와 게이 운동에서 제외되어왔던 양성애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레즈비언과 게이 남성 사이의 이성애적 성적 행위와 심지어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성애적 성적 행위를 충분히 위반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성적 실천까지 포함할 수 있다.
이성애적 행위가 항상 ‘일반적(straight)’인 것은 아니다. 내가 딜도를 둘러입고, 내 파트너와 성행위를 가질 때, 우리는 ‘이성애적’ 행위를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퀴어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우리 할머니와 제씨 헴 (Jessie Helm)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메리 와이트하우스(Marry Whitehouse)도 똑같이 말 할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주요한 퀴어적 특성, 즉, 위의 두 인용글이 암시하고 있듯이 윤리와 성별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전복적이라는 것을 더욱 잘 말해주고 있다. 클레서 헤밍(Claire Hemmings)은 양성애적 맥락에서 수행성이란 것이 위계적인 이성애적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엘리자벳 윌슨(Elizabeth Wilson)은 그 같은 행위는 쉽사리 인습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변태적(kinky)’인 이성애 한 쌍의 행위가 이런 불안정화라는 결과를 하나도 가지지 않으면서 지속될 수도 있다고 헤밍의 해석을 반박한다.
퀴어 정치학은 또한 레즈비언을 여성주의자들보다는 게이남성들과 한묶음으로 재편성해 놓는다. 에이즈 사안에 있어서나 게이남성들과 레즈비언들에 대한 도덕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면서 많은 레즈비언여성주의자들은 오래전의 게이남성들과의 동맹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여성들 모두가 스스로를 퀴어라고 정체화한 것은 아니지만, 급진적 레즈비어니즘의 지시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되살아난 이 동맹은 많은 레즈비언들이 이런 새로운 정치활동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다른 이들은 좀은 회의적인 체로 남았다. 처음 의도했던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퀴어는 또 하나의 정체성 정치의 일환으로 보여질 수 있다. 더욱이, 퀴어가 차이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를 흐리는 방법이라고 주장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백인 게이 남성들이 성정치에서의 그들의 의제를 강제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제도화된 인종적, 성적 탄압에 의한 제약을 간과하게 만드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저명한 흑인 레즈비언 활동가들이 지적해 왔다.
퀴어이론과 퀴어정치는 완전히 동일어가 아니다. 퀴어운동은 지금까지와는 반대의 새로운 정체성을 긍정하는 이상 퀴어이론이 그같은 정체성의 경계를 해체한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학계의 이론가들이 ‘성/성별/욕망의 강제적 질서’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한편, 게이 문화에서 성별 범주를 흐리는 것은 정치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스타일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닥 마틴(Doc Martins)에 발레용 치마를 입는 것으로 가부장제를 꺾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또한, 퀴어이론의 강점은 민중의 투쟁에 힘이 되기보다는 학계에서의 명성에 힘이 되는 것인 것 같고, 길거리 정치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기 보다는 학계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인 것 같다. 이 이론의 많은 부분은 이론이 생산되는 학문 영역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말들로 되어있다.
한 펨(여성적?) 레즈비언이 설명하기를, 자기는 자신의 남자친구들이 여자이기를 좋아하는데, ‘여자이다’는 것은 부치(남성적? 레즈비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남성성’을 설명해주고, 재표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남성성은-이렇게 불려도 된다면- 항상 문화적으로 인식가능한 ‘여성의 몸’에 상대적인 것으로 구제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조화적으로 나란히 놓인 배치와 그것을 위반함으로써 생기는 성적 긴장이 욕망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나와 있는 이들이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래된 논쟁들이 사그라들지 않은 한편, 최근 이성애에 관해 쓰여진 엉첨난 물량의 글들은 퀴어이론과 퀴어정치와 맥을 공유하고 있다. 이성애적 성행위가 여성에게 반드시 탄압적인지, 이성애가 여성주의자들이 권장받을 만한 행위인지는 여전히 토론해봐야 할 사안이다. 모든 여성에게 이성애가 똑같은 의미일 필요는 없다. 인종주의에 대항해 항상 흑인남성들과 동맹관계를 가져왔던 흑인 레즈비언들이 여자들끼리만 하는 퀴어적 위반행위에 대해 백인여성들만큼 깊은 인상을 받지 않는 것처럼, 흑인 이성애자 여성들이 남성들과의 관계를 반드시 반동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성애 여성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이성애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면서 남성과의 관계를 재협상하고, 성적 행위를 재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점은 여성에게 섹슈얼리티가 가져다주는 쾌락과 위험에 대한 많은 질문을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