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4일 월요일

엘렌느 식수(Helene Cixous)

언어의 수호자 - 엘렌느 식수와의 인터뷰
Guardian of Language : An Interview with Helene Cixous
캐슬린 오그레이디 Kathleen O'Grady
(영역 : 에릭 프리노위츠Eric Prenowitz)

엘렌느 식수를 소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일생동안 이루어 놓은 업적들이 매우 다방면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이다.<각주 1>

먼저 "초기의 식수"는 제임스 조이스 문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 파리 제8대학의 영문학 교수라는 특별한 자리를 맡아 활동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식수는 문학비평과 철학 분야에 걸쳐 매우 방대한 양의 저작과 논문을 집필했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 보다는, 그녀가 창조적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른바 "소설적 자서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여 작가들과 철학자들과 문학비평가들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는 "극작가로서의 식수"이다. 희곡과 시나리오, 심지어 오페라 대본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쓴 작품들은 대중적인 흥행은 물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식수"일 것이다. 1974년 그녀는 파리 제8대학에 여성학 센터Centre d'Etudes Feminies을 개설한 바 있으며, 이곳에서 유럽최초로 여성학 박사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식수는 에크리튀르 페민느(ecriture femine: 직역하면 "여성 문학"이란 뜻 - 역자 주)이론을 주창하기도 하였는데, 이 이론은 말하자면, 하나의 음성적 기입으로서의 여성의 신체와 그것에 담긴 파동의 흐름을 통해 타자의 차이를 드러내어 이를 껴안을 수 있도록 하는 (여성들만이 접근 가능한) 미학적 글쓰기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비평가, 철학자, 극작가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식수는 물경 40여편에 달하는 저작들과 100여편에 달하는 논문들을 저술했다. 이는 한 사람의 생애가 낳은 성과라기보다는 여러가지 인격적 삶이 합쳐진 최고의 성과로서, 이들 각각을 결합하고 융화시킨 것은 고독한 시인의 목소리였다. 식수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시인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발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각주 2> ---- 이하는 인터뷰 내용(< >안은 오그레이디의 질문, - 표시는 식수 의 대답) ----- (1970년대에 당신은 이론 및 창작 양방향에 있어서 데리다에게서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에크뤼튀르 페민느라는 개념을 구성한 바 있다. "까트린느 클레망과 더불어 다시 태어난 여성The Newly Born Woman with Catherine Clement(1975)"나 "메두사의 웃음The Laugh of the Medusa(1976)"과 같은 텍스트를 통해 당신은 여성에 관한 리비도 경제 학the libidnal economy of the feminin을 개창하고 양성애에 대한 재검토를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뒤이어 "극도의 충실Extreme Fidelity(1988)" 에 있어서는, 성적 차이를 문화적 영역 내부에 위치시킴으로서 그 개념을 확장하고 명료화한 바 있다. 이 이론이 당신의 철학적-시적 텍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미학적 차원을 넘어선 어떤 윤리적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가?) - 나에게 있어서 이론은 영감 이전의 것이라거나 그것에 선행한다던가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론은 나의 텍스트에 있어서 철학적-시적 기원에 속하는 결과물이자 긴급한 절충적 요구에서 나온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있어서나 현재에 있어서 내가 "이론적인"(강조부호를 쓰는 이유는 나의 이론적 저작들이 시적인 운율을 지닌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텍스트를 쓸 때는 언제나 현재의 문화적 사건들에 존재하는 긴장이라는 계기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문화적 사건들에 있어서 담론(학술적, 저널리즘적 정치적 담론 등등)을 둘러싼 상황으로 인해 나는 사물들 뒤로 물러서서, 지적 여행을 멈추고 다시 한번 강조의 기회를 가지면서 나에게 있어서 시적 운동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사고의 운동을 설명적 방식으로 보여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작업이 실제로 화제에 올려질 때에는 잘못 이해되거나 망각되거나 억압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따라서, 나의 저작에 있어서 "이론적인 것"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은 사실, 나의 작품들에 포함된 내용과 나의 소설 작품들에서 독해해 낼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윤곽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고 운동의 일시적인 정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이 나의 시적 텍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바는 없다. 나의 시적 텍스트들은 이따금씩 까페의 벤치(이것은 지금 이 순간, 행위의 과정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보다 명료하면서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되기 위해서 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 안식처 같은 것이다. 따라서, 당신 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론은 부가적인 윤리적 정치적 구조를 제공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시인이 교육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낸 절충안일 뿐이다. (당신이 많은 저작들을 통해 콜레뜨(Kamilla Collete: 노르웨이 태생의 소설가, 여성운동가)와 뒤라스, 조이스와 쥬네(Jean Genet: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극작가이자 소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칭송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신의 소설 저작들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것은 클라리스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브라질 태생의 실존주의 소설가-이상 역자 주) 의 목소리일 것이다. "

오랑제적인 삶To Live the Orange(1979)", "극도의 충실(1988)", "클라리스 리스펙토르 읽기Reading with Clarice Lispector(1990)", "글쓰기라는 사다리에 오르는 세가지 방법Three Steps on the Ladder of Writing(1993)" 등의 저작들의 경우 리스펙토르의 저작들에 대한 명목상의 동일시 혹은 치환이랄 만한 것을 구성하고 있다. 당신의 글쓰기 작업에 녹아들어 있는 신화적 특질들에 그녀의 언어가 미친 영향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가? 당신의 소설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강조부호는 역자의 것)라는 측면에 있어서 리스펙토르가 모티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 먼저, 나의 저작 전체영역에 있어서 리스펙토르가 차지하는 지위가 극도로 예외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녀를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어떤 인물과도 말이다. 그와 비견할만큼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을 들라면 자끄 데리다를 들 수 있을 텐데, 어떤 면에서 (단순화시키자면) 이들 각각은 나의 글쓰기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적인 차이를 놓고 보자면, 데리다는 여성성을 아우르는 남성성이라는 영역을 차지하고 있고 리 스펙토르는 남성성을 아우르는 여성성이라는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그녀와의 관계를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저작을 1977년에 처음 접했는데 이는 말 그대로 그녀의 작품에 대한 입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녀를 진정으로 알아가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그녀의 작품에 대해 화답 할 수 있게 된 것은 2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 에서 그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2년 간의 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책을 펴내기 시작한 1967년에서부터 197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나는 이미 20-30권 정도의 소설 작품과 4-5권의 평론집을 펴냈으며 이는 "다시 태어난 여성"과 "인간의 이름Prenom de personne", 그리고 몇 몇 희곡들과 같은 대표 저작들로 이어졌다. 따라서 클라리스 리스펙토르를 만날 때 나는 이미 기나긴 문학적 시적 정치적 경험들을 거치고 난 이후였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의 동료이자 동시대의 여성으로서 그녀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행운이었다(즉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녀의 진가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 - 역자 주). 나의 저작들에 있어서 당신이 "신화적 특질"이라고 표현했던 부분이나, 그 밖에 신에 대한 암시와 같은 체계적 기술과 같은 것은 나만의 고유의 것이다. 1967년 나는 단편소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의 이름이 바로 "신의 이름Prenom de Dieu"였다.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신과 함께 "놀았다"(강조부호는 역자의 것). 언제나 말해왔지만, 나에게 있어서 신이라는 시니피앙은 우리를 초월하는 그 무엇과 동의어이자 미래와 무한성을 향해 투사된 우리 자신과 동의어이다. 스스로의 작품에서 "신이라는 말the word Dieu"과 "말로서의 신Dieu the word"(이상 강조부호는 역자의 것)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작가들이 그러하듯, 나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자이지만 문학적으로는 이신론자 理神論者이다. 그것이 전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신의 도움없이 는 그 누구도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이란 무엇인가? 글쓰기의 도움이 없다면 그것은 기표로서의 신God-as-Writing일 뿐이다. (저명한 소설가이자 이론가라는 칭호 이외에도 당신은 극작가로서도 성공했다. "캄보디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에 관한 끔찍하고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The Terrible But Unfinished Story of Norodom Sianouk King of Cambodia(1985)"와 "그들이 꿈꾸는 인디아 또는 인디아다Indiada or the India Of Their Dreams(1987)"와 같은 작품은 프랑스에서 대단한 흥행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당신의 희곡을 보면 글쓰기에 있어서 내면적인 시적 심상으로부터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관찰로의 일정한 이동을 감지할 수 있다. 당신의 에세이 "범죄의 현장, 용서의 현장The Place of Crime, The Place of Forgiveness(1987)"에서 당신은 이러한 이동을 하나의 윤리적인 문제라고 쓴 바 있다. 운문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연극 공연에서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주관적 힘이란 어떤 것이 있는가? 당신의 초기 개념에서 그러한 주관적 힘이 증폭되었다면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가?)

앙가쥬망과 관계된 그 어떤 경우에서도, 글쓰기의 책임성이라는 명령에 따라야한다는 점에서는 연극과 소설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에서는 불가능하면서도 연극에 서는 가능한 그 무엇일진대, 이는 말하자면 관객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당연히 그것의 강도强度가 크다는 점, 즉 밀도 있는 정치적 도덕적 메시지를 보다 넓은 범위에서 즉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연극과 소설 작품이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 차이를 가진다면 그것은 연극이 보다 즉각적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각색과 상연, 그리고 미장센mise en scene이 바로 차이 그 자체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몇가지 동어반복 또는 진부한 표현 들에 관한 것이다. 최근 롭세르바퇴르지l'Observateurs誌는 자끄 데리다와의 인터뷰 기사를 여러 페이지에 걸쳐 게재하면서 "그렇소, 나의 글들은 정치적이요"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이러한 저널리즘적 태도 혹은 표피적인 독해방식은 그로 하여금 너무나 명배한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그의 철학적 글쓰기는 언제나 정치적인 글쓰기이며 다시 말해 정치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양자는 동일한 말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어떤 독자가 "정치적"이라는 말을 "역사적-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문헌을 대상으로 하거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어떤 것"(강조부호는 역자의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그러한 사건들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역사책이나 신문지상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 이것 역시 진부한 표현으로서 이 글에서조차 이런 말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 은 단순히 정치적 영역 혹은 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정치적 사건들에서만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은 분명 그 혹은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발언의 주체 담론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이는 쉽게 말해 정치적 영역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 -- 권력관계라든가, 억압, 종속, 착취의 관계 등과 같은 -- 은 나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나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 학정과 독재, 전제정치, 자본주의 등등 우리에게 있어서 가시적인 정치 공간들을 형성하는 모든 것들은, "타자와 공존하면서 반발하는 자아the Self-with-against-the-other"(강조부호는 역자의 것)의 가시적이면서 연극적이면서 또한 포착가능한photographable 투사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영어에 "공존하면서 반발하는withagainst"이라는 어휘를 추가할 것을 제안한다. 프랑스어에 있어서는 "꽁트르contre"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조차 없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독자들로 하여금 특정의 독해방식을 강요하자는 건 아니지만) 내가 소설 작품을 쓸 때나, 주체일반 혹은 특정의 인간주체에 대한 정의定意에 관한 문제의식을 다룬 소설작품들에 있어서나, 혹은 가족의 영역 혹은 유배의 문제를 은유적 시적 내러티브 -- 이러한 내러티브 가운데 최초의 것은 "드당(Dedans, '내적으로'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 전치사: 역자 주)"이란 제목을 지닌 것으로, 알제리 에 있어서 4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시대가 가진 의식적 무의식적 상황에 관한 간접적인 비평을 실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 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적용된다. 그것을 관통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 고려와 앙가주망이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나 카프카가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형식만 다를 뿐 근본적 시야라는 점에서는 이와 동일하다. 이는 정확히 동일한 차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운명을 내재적인 것과 외재적인 것으로 나누고, 전자를 비정치적인 것으로 후자를 정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최소한 그리스 비극의 경우를 생각해보더라도 이는 하나의 넌센스인 것이다. 하나의 인간주체는 그것이 인간존재로서의 하나의 시민권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단일한 숙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나의 소설작품들 가운데 세계사라는 메아리와 공명하지 않는 것은 단 한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정치적으로 태어났고, 따라서 정치적 비극에 화답하는 시를 쓰기 시작한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리적-정치적 문제의 식의 기입 혹은 표현이라는 문제 뿐만 아니라 행동의 문제 또한 존재한 다는 것을 역설해왔다. 이 점에 있어서 행동 -- 즉 일반적으로 운위되는 행동 -- 이란 투쟁의 장이나 정치영역의 장, 혹은 정책적 논의의 장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여기서 유감스럽게도 문학적 행동이란 것이 변화의 힘과 정치적 확신의 힘, 그리고 절망적 상황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던 혁명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듯하다. 알제리 유배와 유배된 알제리의 지식인들,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었으면서도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바로 그들이 그 증거이다. 학살과 암살에 있어서 최초의 대상은 펜을 통해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이들 가운데에는 우리같은 사람들과의 텍스트적 관계 혹은 소통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그들 자신이 하나의 텍스트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많은 친구들이 있다. 마지막 증거로는 프랑스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문학 텍스트 혹은 작가와 일반여론과의 상호관련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소설가, 철학자 등등은 언제나 자신의 집필행위가 하나의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해왔으며 또한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겨 왔다. 에밀 졸라가 창작행위를 접어두고 드레퓌스를 위한 투쟁에 참여한 것은 겨우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영역에 있 어서 나의 행동을 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사실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정확히 글쓰기에 있어서만 해당되는 독특한 사항으로서, 내 생각으로는(언제나 사용해온 말이지만 "내 생각"이란 표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의식있는 작가는 국가와 공적인 가치의 수호자이기도 하지만 이는 그들의 작업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 중요한 것 -- 즉 그들의 역할 혹은 임무 -- 은 그들이 언어의 수호자, 즉 언어의 풍요성과 자유와 낯설음strangeness과 낯선 의식 strangerness의 수호자라는 사실이다. 언어를 하나의 국가country라고 할 때, 언어라는 국가 내부에서는 실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현재의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경을 개방할 것이냐 폐쇄할 것이냐라는 문제 영역을 두고 언어학적 시적 유파들 사이에(말하자면, 유럽 연합을 앞두고 벌어지는 국경개방 논쟁과-- 역자 주) 동일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즉, 프랑스 민족주의와 민족성의 발호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르고도" 적절한 프랑스말을 살려써야 한다는 논의가 있는 반면, 프랑스어를 탈문법화 혹은 비문법화 하고 그 구문법syntax에 있어서 프랑스어가 보다 개방적, 수용적, 확장적, 관용적, 지적 언어가 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자신의 신체를 통해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시학에 있어서 대단히 혁명적인 전통 -- 이러한 관점에서 나 자신은 랭보를 시원으로 하는 계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 이자, 한계에 대항한 도전이자, 언어에 대한 하나의 찬미이자, 시니피앙에 관한 작업이자, 무엇보다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바른 프랑스어"를 사용함으로써 학계와 언론계에서 지배적 권위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더이상 사상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 아닌가. (1974년, 당신은 제8대학에 여성학 센터를 창립한 바 있다. 최근 프랑스 정부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여성학 박사과정을 개설하고 여성학 관련 자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이곳에 대해 폐쇄 위협을 가하고 있다(이 인터뷰가 있었던 96년 당시는 우파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역자 주). 70년대에 이 프로그램을 열게 된 배경은 어떤 것이며, 90년대에 있어서 이러한 위협이 초래한 결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1974년, 내가 여성학 센터를 열게 된 이유로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근본적인 이유로서 내가 영문학 교수였기 때문에, 내가 학계에 몸담게 된 이래로 문학적 유산들을 민족적인 차원에서 정의 내리려는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려왔었다는 점이다. 나는 문학을 국경이란 것으로 감금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한가지 이유다. 문학은 국경없는 국가transnational country이다. 우리가 읽는 문학작품의 작가는 언제나 또다른 세계의 시민이었고, 국경을 넘나드는(좋은 의미에 서의-역자 주) 무법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우리 언어를 새롭게 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문학이 -- 다른 모든 담론 들에서도 그러하듯 -- 남성지배적 영역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영어로 쓰여진 남성중심적 문학이라는 제한된 분야를 열정을 다해 가르치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나는 배타적이지 않은 영역에서 일을 할 때 행복 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단일한 성, 단일한 언어라는 제약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으며, 프랑스에 있어서의 대학체제와 학위체계, 그리고 그것이 요구하는 바를 재조직하여 프랑스학French research 분야에 있어서 새로운 박사과정을 개설하고 프랑스에 있어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박사과정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여성학 과정이다. 그리고 74년, 그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이 학문은 간학제적間學制interdisciplinary이며 따라서 당연히 간문화적intercultural 간언어적 interlinguistic 과정으로서, 문학과 철학, 언어와 언어 사이에 놓은 비합리적인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으며 또다른 측면에서 그것은 처음부터 문학적인 담론들에만 제한을 두지 않고 여타의 담론들을 기꺼이 수용하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역사학의 목소리와 사회학의 목소리, 정신 분석학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통해 나는 나와 친숙했던 테마, 즉 성적 차이라는 테마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매우 신속하게 행동하여 하나의 일반적 주제학문 즉 성차의 시학The poetics of sexual difference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러한 학문은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탄압의 위협이 존재했고 최근에 있어서 되살아난 위협 역시 당시와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발라뒤르 행정부 출범 이후 새로이 들어선 교육당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프랑스에 여성학이라는 학문이 있어야하는 이유가 뭔가? 남성학도 없는 판국에..."(인용부호는 역자의 것) 이게 전부다. 너무나 간단한 일인 것이다!!! 이는 프랑스가 이념적으로 퇴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프랑스는 여성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모든 지표에서 유럽 내 15위를 점하고 있으며, 이는 또한 사회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평등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와 동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마지막 질문으로,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 더블린 태생의 영국 작가이자 비평가)은 최근, "철학자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은 언제나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과 함께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내가 당신이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내가 생각할 때 존재하는 나란 과연 무엇인가Que sont-je quand je sonje?"라는 질문이 지닌 이면裏面 혹은 행간의 의미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Que sont-je quand je sonje?"를 제대로 번역했는지는 나 자신도 의문 이지만, 영어로 표현하자면 "What am I when I think?" 정도가 된다. 이는 물론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빗댄 것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어로 읽어 보면 식수의 시적인 재치를 엿볼수 있다-"끄 송쥬 깡 쥬 송쥬". 이러한 시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식수는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쓰이는 "penser" 동사를 쓰지 않고 "songer" 동사를 사용한 것이다 - 역자 주) - 말하자면 나는, 내가 두려워하지 않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보다 명확히 말해서, 그리고 정숙하고도 겸손한 표현 방식을 쓰자면, 나는 다른 모든 인간존재들이 그러하듯 내가 보는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이 대단한 두려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자 삶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것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다. 삶 -- 우리가 타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러한 두려움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그 나머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분노일 것이다. 나는 개인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배신의 유령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각주) 1. 식수의 작품을 검토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훌륭한 문헌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 The Helene Cixous Reader. Susan Sellers, ed. (London: Routledge, 1994) and Helene Cixous: Authorship, Autobiography and Love by Susan Sellers (Oxford: Polity Press,1996). 2. "Extreme Fidelity," in Susan Sellers (ed.), Writing Differences: Readings from the Seminar of Helene Cixous (New York: St. Martin's Press, 1988).

* 번역 : 강현석
* 이상은 여성학술지 "데 팜므(des Femmes)"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발췌한 것입니다.
- 출처 : http://dalara.jinbo.net/home/jarou_elan.html
- 출처 게시된 출처: http://cafe.daum.net/bookwomanlife